[가정맹어호]대한제국의 최북단

말갈국은 대한제국이 극동대전기 청나라와의 일전에서 강탈한 만주에 세운 괴뢰국이었다. 본래는 대한제국의 제후국이라는 핑계였지만, 국제무역에 패권을 떨치는 소비에트가 식민지, 괴뢰국, 제후국 등에 대한 무관세 무역을 고깝게 보고 국제조약으로 관세를 마음대로 매기는 것을 막자, 대한제국은 과격하게 말갈국의 괴뢰 체제를 무너뜨리고 본토로 편입시켜 버리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말갈국의 주인은 사포대. 이제는 개모라 불리는 심양에 그 본사를 둔 세계 최대의 비국가 군사집단으로, 43만 명에 이르는 대군과 2,000여 대의 기갑차량을 거느린 강대한 세력이었다. 명목상 CEO이자 최대주주는 대한제국의 황제였으나, 실질적으로 사포대의 지휘권은 사포대 병마절도사가 가졌다.
차단봉이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낡아빠진 볼트액션 소총을 들고 있는 병사가 총으로 가로막으며 말했다.
"일단 정지."
그러자 검은색의 차가 그 앞에 멈춰 섰다. 차의 창문이 윙윙거리며 내려가고, 담배를 문 군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 차 등록 안 되어 있나?"
"미등록 차량이십니다.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나오셔서 인가신청을 하셔야겠습니다."
군인이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자 중년 남성이 담배를 집어 내리고 연기를 훅 뱉은 후,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죄송합니다. 인가신청을 하셔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중년 남성의 군복 어깨에는 [가선(嘉善)]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선대부. 종2품하의 계급이었다. 서구식 군 체제 기준에서는 원스타 준장쯤 될 것이다.
"내가 이 차 타고 100번은 넘게 드나들었는데, 왜 너만 지랄이야?"
"못 들어가십니다. 인가신청을 하셔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이 새끼가..."
가선대부가 문을 열고 나와서 담배꽁초를 던지고 그 군인 앞에 섰다.
"네가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아닙니다. 원칙일 뿐입니다."
"너 관등성명 불러."
"충성. 상병 이철휘."
"어느 사단 어느 대대 소속이야?"
"사포대 제18사단 3대대 소속입니다."
사포대. 정규군이 아니라 준군사집단 징집형 용병으로, 조정이 지분의 50.1%를 갖고 있는 민간군사기업이자 황제 직속전력이다.
말이 준군사집단이지 창설 이래 만주 전 지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군사집단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기에는 그 규모가 무려 270만 명에 이르러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비국가 단일 군사전력이었다.
지금도 40만을 넘나드는 규모와 대한제국 육군 기갑전력의 과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군사집단으로, 징병제까지 운용하며 대한제국 최강의 군사전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18사단? 거기서는 원스타를 이렇게 무시해도 된다고 가르치던?"
"아닙니다. 원칙일 뿐입니다."
"엎드려뻗쳐."
이철휘라는 장병이 소총을 내려놓고 엎드렸다. 가선대부가 차에 오르면서 말했다.
"너 내가 지나갈 때까지 일어나지 마. 야! 문 열어."
차단봉을 여는 병사가 우물쭈물하다가 차단봉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가선대부의 차가 부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대한제국군의 정규 전투차량인 천량 한 대가 차 앞에 멈춰 섰다.
이어서 문이 벌컥 열리고 4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군인이 걸어나왔다. 가선대부가 깜짝 놀라서 급히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그 군인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이철휘라는 병사 앞에 반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일어나게."
이철휘가 일어나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 군인이 싸늘하게 돌아보면서 가선대부에게 쏘아붙였다.
"부대의 출입을 관리하는 병사가 어찌 출입을 관리하지 않고 엎드려뻗쳐 있었는지 설명하게."
"...저자가 소장을 무시하여..."
"무시했다?"
천천히 일어나는 군인의 가슴팍에서 김세환이라는 황금빛 명찰이 태양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의 어깨에는 [숭록(崇祿)]이라 적혀 있었다. 숭록대부. 종1품상의 계급. 서구식 군 체제 기준에서는 4성장군급이며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병력과 군 인사에 행하는 권한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김세환이 가선대부 앞에 서서 잠시 노려보다가 쏘아붙였다.
"어떻게 무시했는가?"
"...소장의 통행을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사옵니다."
"이 차가 등록되어 있는가?"
"...허나..."
"그대가 대답하게."
김세환이 이철휘를 보고 말했다.
"이 차가 등록되어 있었는가?"
"아닙니다. 하여 인가신청을 받으려 하였사옵니다."
"그래?"
김세환이 가선대부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관등성명이 어떻게 되지?"
"추, 충성. 제21대영 방어사 김찬태."
"군뢰!"
김세환의 외침이 떨어지자 곧 나름대로 중무장을 한 군인 10여 명이 뒤편에서 달려왔다. 군뢰조선군의 헌병들이었다. 김세환이 싸늘하게 김찬태를 노려보다가 지시했다.
"이 차를 압류하여 군 치장물자로 돌리라! 무단으로 군부대를 범한 불순한 차량이다! 이자를 즉시 체포하여 모든 계급을 박탈시키고 군부대 무단 침입을 물어 군법에 회부시키라!"
군뢰들이 모두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흔히 벌어지는 일, 가벼운 경고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다. 기겁한 김찬태가 다급히 엎드렸다.
"대, 대감! 소장이 잘못하였사옵니다!"
"뭣들 하느냐, 군령을 어긴 자를 끌어내지 아니하고!"
곧 군뢰들이 다가가서 김찬태를 끌어내고, 견인차를 가져와 그 차를 끌고 갔다. 주변에 있던 군관들이 모두 겁에 질렸다. 그들을 한 번 둘러본 김세환이 쩌렁쩌렁하게 호령했다.
“군율은 지엄한 것이다! 북방에서는 레드 마피아가 준동하고, 서쪽으로는 중국의 흑건적이 치고 올라오는 지금, 보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모두 알겠느냐?”
“예! 사포대 병마절도사 대감!”
김세환이 돌아서서 이철휘를 보며 말했다.
"잘했다."
"망극하옵니다."
"오늘부로 자네에게 수문장을 맡기니 전역할 때까지 이 부대의 출입을 책임져라."
이철휘가 고개를 숙였다.
"예, 대감."
김세환이 천천히 자신의 전투차량으로 돌아가서, 직접 운전대를 잡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뒤를 돌아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군관들부터가 군령을 동네 개 짖는 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데 군의 기강은 무슨 기강."
대한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장병에서부터 사포대 병마절도사까지, 그것도 18년 만에 치고 올라간 인물. 자기 하급자, 그중에서도 병사들을 자기 자식보다 아끼는 것으로 유명했다. 인자하고 따뜻했으며 전투 중에 죽은 병사를 보면 눈물을 쏟았다.
그가 유일하게 용납하지 않는 것은 자기 하급자들끼리 계급으로 군림하려 드는 것뿐이었다.
+ + +
대한 제정연합국의 말갈국은 1870년대에 벌어졌던 극동대전에서 대한제국이 청을 쳐서 이긴 뒤 만주에 세운 괴뢰국이었다. 말갈국 대칸(靺鞨國大可汗. 말갈국 대가한)이라는 국가원수직이 존재했지만 실상은 대한 제정연합국 황제가 겸임하는 자리였다. 그조차도 지금은 그 국체가 격하되어 대한제국의 제후국이 아닌 봉신국으로 전락했다.
중화민국이 대한제국의 점령지를 탈환하기 위해 벌인 북벌 당시, 중화민국의 군사고문으로 왔다가 권력을 잡은 독일인 장군 에르빈 롬멜의 전격전을 막으며 크게 발흥했던 대한제국군의 파벌, 이른바 소장파는 부마광합 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인 시위대에게 원자폭탄을 투하하라는 병조의 지시에 반발했다가 모두 좌천되었다.
비록 원폭 투하를 막지는 못했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변방 중의 변방인 말갈국의 군대 말갈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말갈군은 대한제국군에서도 가장 그 처우가 안 좋은 군대였다. 실질적으로 만주를 지키는 군대는 말갈군이 아니라 사포대였기 때문이다.
소장파 무신의 중핵이었던 늙은 백전노장 곽대진이 말갈군 기지 건물 안에서 스탠드를 켜고 조용히 서류를 넘기면서 중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한양에서 무슨 일이 터졌나 보군."
그동안 거의 일이 없었던 말갈군의 업무가 폭증하는 것을 보니, 한양도성에서 뭔가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큰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 때 한 장교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곽대진 앞에 경례했다.
"충성! 병마사 대감, 한양에서 연락입니다."
"그래? 얼마 만이더라?"
"꼬박 4년 만입니다."
장교가 고개를 숙이고 아뢰었다.
"대감, 한양도성에서 전군에 4거 비상령을 걸라는 지시이옵니다."
"뭐라?"
곽대진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왜?"
"구체적인 지시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4거 비상령을 걸라는 황명만이 전달되었습니다."
"황명?"
곽대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18년 만에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이 전투태세를 취하라는 것이라?"
"지금은 그런 듯 하옵니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곽대진은 사태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대한제국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소비에트와 대한제국은 지난 18년간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니까.
"사포대를 포함하여 전군에 4거 비상령을 걸라 전하라."
"아니 됩니다."
곽대진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김세환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최근 군량이 오지 않아 병사들 중 태반이 나흘을 굶었습니다. 지금 전투태세를 지시하면 탈진해서 사망하는 병사가 속출할 것입니다."
"허나 황명일세. 김 첨사, 그대가 병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내 모르는 바 아니나, 군령을 어기면 군법에 회부될 수 있으니, 일단은 황명에 따르는 척이라도 해 주게."
"아니 됩니다!"
김세환이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지금 군영에는 불량식품 납품으로 인해 설사병과 식중독이 돌아 이미 초죽음에 이른 병사들도 무더기입니다. 방산비리로 탄약 재고가 서류 기입분의 40분의 1도 안 되어 모든 병사에게 나누어줄 수도 없거늘, 어찌 지금 전시에 준하는 4거 비상령을 전군에 걸라 하십니까!"
"이보시게, 김 첨사."
곽대진이 천천히 다가가서 김세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허나 지금 18년간 아무것도 아니 하시던 황제께서 친히 황명을 내리셨어. 뭔가 대단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세."
"언제는 심상했답니까? 병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량 무기로 사고사하고, 식품 공급 부족으로 아사하고, 의복 부족으로 동사하고, 말라리아에 황열병까지 시달리면서 중금속 가득한 낡은 수돗물을 퍼마시는데, 군관들은 군령을 없는 듯이 여기고 지휘권을 생사여탈권이라 여기며, 군인들을 용역업체에 보내고 돈을 챙기거나 심지어 군인들의 장기를 팔아먹는데, 언제 우리가 심상한 군대였던 적이 있습니까?"
김세환은 물러설 여지가 없어 보였다. 곽대진이 한숨을 쉬고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허면 사포대는 비상령을 걸지 말도록 하세. 나머지 부대는 일단 비상령을 걸라는 지시가 하달되었으니 비상령을 걸 것이야."
"정녕 병마사께서는 이 사건의 진상을 모르십니까?"
김세환이 답답하다는 듯이 탁자를 탕 내려치며 소리쳤다.
"홍지아가 소비에트를 끌어들여 국가 위기 분위기를 조성해서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려는 술수가 아닙니까!"
"그런 추측에 의존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네."
곽대진이 다시 한 번 푹푹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는가. 군인이 까라면 까야지."
"원폭 투하 명령 때는 아무리 까래도 안 까셨던 대감이십니다!"
"어허, 김 병마사!"
곽대진이 눈을 찌푸리면서 소리쳤다.
"그 이상 언성을 높이면 나도 군율로 다스릴 수밖에 없어!“
- 작가의말
대한 제정연합국 사전
경덕제 선종 이장[慶德帝 宣宗 李螿]
[상세]
대한 제정연합국 제3대 황제이자 대조선국 제28대 대군주, 제3대 말갈국 대가한. 박태연이라는 엄청난 권신에게 유구국 중산왕의 자리를 주었기 때문에 당대 경덕제는 유구국 중산왕은 겸하지 못했다.
비록 길게 재위하지 않았으나 그의 시기에 대한제국은 대영제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그레이트 챌린지를 개시했다.
[짧았던 치세, 엄청난 발자취]
경덕제는 1919년 즉위하여 1920년까지 살았다. 그의 시대는 고작 2년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고, 어떤 실책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대한제국은 본격적으로 대영제국의 세계 해양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이를 그레이트 챌린지(Great Challange)라고 부른다.
그레이트 챌린지는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단초가 되었고, 나아가 냉전의 구도를 짜는 패권 경쟁이 되었다.
경덕제는 당대의 권신인 박태연과 그 남편이자 대한제국 수군 극동수역체찰사인 한수전을 적대시하지 않고 친하게 지냈으며,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1920년 일본 독립운동가 아카바네의 폭탄 의거로 한수전, 박태연, 경덕제와 그 황후 및 두 아들까지 한꺼번에 폭사하면서 그의 치세는 막을 내렸다.
[당대의 평가]
경덕의 치세는 고작 2년에 그쳤지만 대한제국의 다른 황제들과 비교할 때 결코 그 중요도가 낮지 않은 시대였다. 경덕제의 시대에 대한제국은 그레이트 챌린지에 뛰어들며, 대영제국과 그 국력을 겨루면서 유럽의 다른 이류 열강들과도 더 이상 체급을 비교할 수 없는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했다.
또한 대한제국의 “개화”가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당시 중립국을 표방하던 태국을 포함외교로 강제 개항시키고 러시아 적백 내전, 튀르키예 독립전쟁 등을 지원하며 대한제국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레이트 챌린지와 별개로, 경복궁을 중건하고 한양도성을 개수했으며 중공업과 경공업을 고루 발전시키는 로드맵이 나온 시기가 경덕제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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