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맹어호]계속되는 공세

홍지아가 덜덜 떨면서 광만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
“소, 소신, 폐하께서 요구하신 선거 자금을 모두 송금하였사옵니다. 그리고 부마광합...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에게 보상할 돈도 모두 송금을 했사옵니다.”
그러자 광만제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하교했다.
“그 또한 짐이 진노한 까닭이다!”
“예?”
홍지아가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광만제가 용상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내려다보면서 그녀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통상적인 사람이라면 온 가산을 다 팔아도 그 돈의 1%조차 못 내고 파산 신청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그 돈을 단번에 일시불로 지불해버리고도 파산하기는커녕 여유롭구나. 그 많은 돈을 국고에서 빼돌렸다는 뜻이겠지.”
홍지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시키시는 대로 했사온데...”
“그래, 처음엔 앞으로 그대가 파산할 때까지 계속 뜯어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생각이 바뀌었다.”
광만제가 천천히 일어나 홍지아에게 걸어왔다.
“이사노마키는 명분일 뿐, 그대가 원한 건 그걸로 인해 촉발되는 전쟁 위기 그 자체겠지. 그 전쟁 위기를 구실로 삼아 그대의 애인인 소비에트 대사와 손발을 맞춰서 협상을 한 척하고, 자치권을 받아냈다는 식의 명분 아래 대한제국을 소비에트의 위성국으로 전락시킨 다음, 황정을 폐하고 그 괴뢰정부의 수장 자리에 앉으려 한 거야.”
“폐하, 소신...”
“거짓말하면 입을 찢어버리겠다. 진실을 말할 게 아니면 잠자코 있어라. 짐이 20년 뒤에 황태자가 스물이 되면 복권하겠다고 했던 것 때문에, 그대가 시간에 쫒겨 급하게 진행한 일이 아닌가?”
홍지아는 더 반발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그대가 갑자기 황국민정당에게 협치를 구한 것이지. 황국민정당이 중추원에서 유일하게 개헌저지선을 가지고 있는 야당이니까. 대한국 국제의 제1조, 대한국은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인정해 온 바와 같이 자주 독립을 누리는 제국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만백성을 대리하여 국가의 주권을 집행할 권한을 가진다."
광만제의 눈빛이 더더욱 이글거렸다.
"이걸 각각 ‘자주 독립을 누리는 제국’에서 ‘타국과 함께하여 세계 질서에 공헌하는 제국’같은 자주독립을 애매하게 우회해 표현하는 용어와, ‘대한국 대황제는’을 ‘대한국 조정의 수장은’으로 황제가 아닌 영의정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도록 하는 단어로 개헌하려는 게 그대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래야 그대의 주도 하에 소비에트의 위성국으로 전락하는 게 정당화되니까. 아니 그런가?”
저 인간은 내 머릿속까지 들여다보고 있어. 홍지아가 조용히 눈을 질끈 감았다가, 광만제에게 말했다.
“폐하... 그 말씀이 다 옳으십니다. 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유언인가?”
“아닙니다. 폐하.”
홍지아가 물었다.
“...그럼 소신을 어찌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왜, 살려 두기를 바라느냐?”
“소신을 죽이면...”
홍지아가 광만제를 올려다보면서, 식은땀 나는 등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소비에트가 더 이상 교섭을 하려 하지 않을 텐데... 그럼 전쟁을 불사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지금의 저 군대로?”
그러자 광만제가 노련한 거짓말로 대답했다.
“소비에트 대사가 다 짐한테 폭로했다니까? 그대는 버려진 것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지. 황국민정당이 장악한 사헌부에서 그대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렸으니까. 소비에트 대사관에서는 그걸 그대가 황국민정당에 했던 협치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봤겠지. 황국민정당과 그대의 대한정우회가 협치해서 개헌을 할 여지가 없다고 봤다는 거다. 다시 말해서, 그대의 조정 및 정국 장악 능력을 의심한다는 거지.”
그가 잠시 홍지아를 내려다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의 군대로도 짐은 마음만 먹는다면 소비에트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이미 어제 소비에트군의 포진도와 유사시의 만주작전 예상 진로를 확인했다. 그리고 해당 지역의 제국군에게 4거 비상령을 걸었다."
홍지아의 안색이 다시 역변했다. 광만제가 조롱조로 미소지었다.
“정치란 주고 받는 것. 지금이라도 대사관으로 짐과 함께 가서 전쟁을 멈춰달라고 같이 교섭하겠는가? 아니면 외환죄, 내란죄로 짐에게 죽겠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리던 여인이, 이제 이 천하무적 황제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중추원 편전.
중추왕 홍지욱이 책을 넘기며 말했다.
"황제께서 소비에트 대사관을 다녀오셨다는 말인가?"
그의 정치감각은 홍지아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훨씬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홍지욱의 계산이 지금 상황을 크게 훑어냈다. 비서가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눈을 찌푸린 홍지욱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영의정과 독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습니다."
비서가 고개를 숙이자 홍지욱이 잠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책을 손으로 덮어버리고, 어찌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즉각 내 집에 가서 안사람에게 전해라. 사병의 계약주체를 황제 폐하로 돌리고 모든 사병을 황제 폐하께 반납하라고."
그가 눈을 찌푸렸다.
"또한 당장 그동안 사들였던 부동산을 국고에 귀속시키라고도 전해라."
홍지욱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또한 지금 당장 나를 따르는 의원들에게 각자의 사병을 해체시키라 전하라. 가능한 한 시급하게, 가능한 한 빠르게 사병을 해체하고 그들의 계약주체를 황제 폐하께 귀속시키라고 하라."
그가 눈을 찌푸렸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황제 폐하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것은 어명이다."
그러자 와장창 소리와 함께 홍지아의 측근이자 이조판서 홍예찬이 들이닥쳤다.
"그게 어인 하명이십니까, 전하!"
홍지욱의 눈빛이 조롱조로 확 치달았다. 본래 중추원은 중추원의관과 중추왕의 땅. 조정대신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원칙이 무너진 지도 꽤 됐지만.
홍예찬의 당황과 분노가 섞인 표정을 확인한 홍지욱이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면서 쏘아붙였다.
"뭐야, 이판이 중추원엔 어쩐 일이오?"
"전하, 아무리 전하께서 영상 대감과 사이가 나쁘다 해도,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어쨌거나 누님이 아니십니까!"
"이판, 어찌 이러시오?"
홍지욱이 차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누님이라니요, 서로 목덜미를 도려내려고 싸웠던 것이 아직 10년이 안 됐습니다."
그 젊은 제후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지고 말투는 공격적으로 변했다.
"과인과 영상은 오누이가 아니라 정적인 것입니다. 반드시 어느 한쪽이 죽어 없어져야 하는! 그리고 누구를 죽일지 선택하는 것은 황상이십니다!"
그것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인 홍예찬이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중추왕께서도 후회하실 겝니다."
무도하군. 감히 이 나라의 둘째가는 제후 앞에서 저렇게 겁박성 발언을 입에 올리다니 말이다. 홍지욱이 한 걸음 다가서면서, 홍예찬의 눈을 똑바로 보고 쏘아붙였다.
"당신 일이나 신경쓰세요. 사헌부가 당신에 대한 탄핵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까."
홍예찬의 표정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홍지욱이 다가가서 홍예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 그리고 과인의 짧은 식견으로 단지 조언을 하나 하자면, 오늘 집으로 돌아가서 가능한 한 빠르게 지난번에 의료보험 재정 빼돌린 기록이나 인멸하세요. 그거 걸리면 당신 파직으로 안 끝나니까."
+ + +
"서기장 동지, 절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에라스트 스미르노프가 수화기를 잡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러시아어로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띤 대답이 튀어나왔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다시 직무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사, 이제 다 끝났습니다. 그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면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동지, 정신을 가다듬으십시오. 대한제국의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 하나 알코올 중독으로 감이 크게 떨어지고, 조정 장악 역시 대한제국 영의정의 파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만함도 고쳐지지 않았고!"
에라스트가 애타게 소리쳤다.
"제발 그 황제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소비에트가 고압적으로 나간다면, 그래서 홍지아를 앞세우고 정권을 장악한다면 그 황제 정도는 제압할 수가 있습니다! 소비에트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입니다! 이 망조 든 봉건조선 따위는 무너뜨리고도 남습니다!"
"동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시오!"
소비에트의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겁에 질려 있었다.
"대한제국 경제 통계도 안 보았소? 그 황제가 국무를 본 지 이틀만에 대한제국의 총 GDP가 2%가 상승했습니다! 20년 전의 대한제국을 그대는 젊어서 직접 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봤단 말입니다! 그 황제는 행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이기지 못하는 적이 없으며, 손에 넣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자기 손바닥 안에 넣고 움켜쥐고야 말아요!"
"이제 양국 군사력 격차가 수 배에 이르는데 어떻게 그렇단 말씀입니까! 그자가 핵을 쓸 가능성은 전무하고, 쓴다 해도 우리 소비에트의 요격체제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다급했다. 대한제국이 위협이 된다는 건 누구나 알았다. 그래서 지금 끝내야 한다고 봤다. 에라스트가 탁자를 탕 내려쳤다.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지금 대한제국을 위성국으로 만들고 인민 공화국으로 바꿔놓지 못하면, 언젠가 대한제국은 우리 소비에트에게 다시 위협이 될 것입니다! 지금 죽여놔야 한단 말입니다!"
"이런 젠장, 그만하시오!"
연결음이 끊겼다. 에라스트가 수화기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홍지아는 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밖에서 문이 열리고 다급히 바빌리나가 뛰어들어왔다.
"대사님, 영의정 홍지아가 문을 열어달라 합니다."
에라스트의 얼굴이 반색했다.
"오, 그래? 어서 문을 열어줘라."
바빌리나가 밖으로 다시 달려나갔다. 이어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바빌리나의 비명소리가 났다. 에라스트가 목을 쭉 빼고 외쳤다.
"밖에 무슨 일인가?"
이어서 대사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바빌리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에라스트를 바라보았다.
홍지아는 완전히 기가 눌린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의기양양하게 미소짓는 광만제가 황룡포를 펄럭이며 홍지아 뒤에 서서 에라스트를 노려보았다.
"아파서 못 만나준다더니."
에라스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광만제의 입가에 더더욱 비릿한 미소가 견고하게 굳어졌다.
"천만다행히도, 대사께서는 몸이 좀 나아진 모양이군요."
오만하고도 깔보는 듯한 광만제 특유의 눈빛을 본 에라스트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 작가의말
대한 제정연합국 사전
도통제 만종 이관[度統帝 滿宗]
[상세]
대한 제정연합국 제4대 황제이자 대조선국 제30대 대군주, 제5대 말갈국 대가한, 제5대 유구국 중산왕이며, 인도차이나, 남방, 북중국의 두 번째 위임통치자.
외적으로 본다면 전후처리를 무난하게 끝마치고, 광만제에게 정권을 넘겨주며 무난하게 재위를 끝낸 군주이다. 그러나 실상 그의 시대는 황태자 이찬과 남양 양씨의 정권 경쟁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전후 처리와 우주경쟁, 그리고 암투]
그는 지난 전쟁으로 수백만까지 증가한 대한제국군을 수십만 단위로 감축시키고, 각지의 치안 역시 군대가 아닌 현지 경찰이 집행하도록 바꾸었다. 또한 각지의 총독부와 막부를 철저히 재정비하고 지방관 파견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시켰다.
그의 시대에 황태자 이찬이 강력한 재능을 보이자, 그는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우주에 첫 번째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우주 경쟁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주적이었던 영국의 본토를 겨냥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탄을 처음으로 실전배치하여 세계 최강의 핵강국으로 다시 발돋움하게 된다.
또한 전후처리를 성공적으로 끝마쳐 대한제국의 총생산을 다시 세계 4위권으로 끌어올리고, 대한제국의 군사력, 행정력 등을 복구시켰으며, 북중국 지역에 대한 한국화 정책을 밀어붙이는 등 적극적인 국가 유지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본격화되는 냉전의 시대에서 대한제국을 소련, 미국, 영국과 마주앉을 수 있는 패권대국으로 급부상시킨 업적을 세우기도 했다. 외교적, 행정적으로도 그의 업적은 컸다.
남양 양씨의 거두였던 진성황후의 맹공으로 이찬이 폐태자될 위기에 몰리자, 그는 황제의 권위를 발휘하여 중추원을 강제해산시키고 즉시 양위하여 이찬을 황제에 옹립시키는 극약 처방으로 남양 양씨의 세도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대한제국은 경주 홍씨가 다시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이것은 광만제 이후까지 이어지게 된다.
[당대의 평가]
도통제의 시대는 바로 앞이 2차 세계대전이었고, 그 이후가 대한제국 최대의 분기점 중 하나인 광만성세였기 때문에 단지 무난한 시대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치적 감각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황권을 계속 위협하려 들었던 남양 양씨에게는 사신과 같은 인물이었으며, 실제로 남양 양씨가 가장 두려워했던 군주는 도통제였다.
외교적 감각 역시 탁월해 소련, 영국의 패권 대립 사이에서 실속을 챙기면서도,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여 냉전을 단순한 다극 체제나 양분 체제가 아닌 모든 국가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을 강요함으로서 미소영간 열전으로의 격화를 막았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소련이나 영국에 있어 그는 이전까지의 대한제국 황제 가운데에서도 대한제국의 국력과 자신의 역량을 가장 객관적으로 파악한 군주로 여겨졌으며, 그것을 가장 현명하게 이용한 군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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