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맹어호]제국의 주인

지프차는 한양도성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홍지아 사병의 군영에 도달했고,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그녀의 가신들과 사병 군관들이 정렬하여 경례했다. 그 때였다.
"영상 대감!"
강명수가 달려오면서 외쳤다.
"형정왕 김한래가 사병을 동원하여 형정원을 둘러싸 방어선을 포진했습니다. 이미 형정원 건물은 물론 그 주변 거리까지 요새화가 완료되었습니다."
공지형이 한숨을 쉬었다. 결국 피를 보겠다는 소리. 김한래 형정왕, 그대의 뜻은 이해하지만 별로 현명한 처사는 아닌 듯합니다.
"그래?"
홍지아가 눈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병력은 몇이나 되던가?"
"3천 명에 육박합니다."
"김한래 이자가 끝까지 사법권을 넘기지 않으시겠다?"
홍지아가 코웃음치고 손가락을 뻗으면서 지시했다.
"공격하라."
+ + +
요란한 폭음이 밖에서 울려 퍼지자, 황태자 이철이 머리를 감싸안고 소리쳤다.
"으아악!"
다급히 문이 열리고 밖에서 이거명이 달려왔다. 그가 이철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 나가셔야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국본이십니다, 여기서 몸이 상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궁궐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홍지아의 사병들은 무서운 속도로 한양도성 전체를 점거했고 그중에서는 궁궐도 포함되었다. 이철이 무섭다는 듯이 소리쳤다.
"여기 있겠습니다, 아바마마가 와서 막아주실 것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승하하셨습니다!"
이거명이 소리쳤다.
"저희 종친의 사병들이 보호하겠사옵니다. 어서 빠져나오시옵소서! 이 전란이 끝나면 다시 나오셔도 늦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이철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감싸안은 채 달려 나갔다.
+ + +
병사들의 두개골 조각으로 칠갑이 된 홍지아 사병의 전차들이 시체를 짓밟으면서 형정원 건물 앞으로 밀어닥쳤다.
그리고 주포를 돌려 법정 건물을 향해 방포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법정 앞쪽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곳곳에서 폭음이 터졌다. 한쪽 벽이 주저앉아 내리는 모습을 보고 김한래가 급히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홍지아 이 미친 여자가 감히 대법정에 전차포를 쏴!"
형정원의관들이 웅성거렸다.
"전하, 사병들의 방어선이 다 무너져 버린 모양입니다."
이어서 전차들이 캐터필러로 형정원 담장을 짓이겨 버리면서 밀고 들어왔다. 홍지아가 검을 쥐고 뚜벅뚜벅 사병들을 이끌며 전차 뒤로 걸었다.
이미 형정원의 경비대와 김한래의 사병들은 모두 전멸했고, 홍지아의 사병 1만 7천 명이 사병 소속의 전차 35대와 야전포 150문으로 형정원 법정 건물을 겨누고 있었다.
충분한 탄약과 함께 돌격소총에 최신 방탄복과 고어택스 전투화로 무장한, 대한제국 정규군보다도 비교할 나위 없이 완벽한 무장을 한 홍지아의 사병들, 그 앞에 맞설 방도는 애시당초부터 없었다.
시가전으로 끌고 가려 했던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김한래의 사병 3천은 압도적이고도 강력한 홍지아의 사병 앞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사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단지 최악의 발악이었고, 마지막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군인들이라 해도, 그리고 그들의 의지가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그 알량한 것들은 단지 적군이 쥐고 있는 비싼 장비 앞에 무력했다.
홍지아가 칼을 겨누면서 소리쳤다.
"쳐라!"
사병들이 대한제국 정규군들의 착검돌격보다도 완벽한 자세로 착검돌격을 시작했다.
하급 법관들과 포졸들이 권총과 삼단봉으로 절망적으로 맞서 싸웠지만 단 한 명의 사병도 죽이지 못했고 순식간에 형정원 전체에 시체가 질펀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홍지아의 사병들은 강했고 홍지아의 자금력과 권력은 높았다.
이제 그걸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사라졌다.
널브러진 수없는 시체들은 모두 포졸복과 법관복을 입고 있었으며, 홍지아의 사병이 갖춘 복장은 어느 하나 시체에 입혀진 것이 없었다. 홍지아의 사병들이 형정원의 대법정 재판실로 밀어닥쳤다.
아무도 없고 불까지 꺼진 재판실의 최고 상석에 위엄있게 법관복을 입고 정좌한 김한래가 늙은 목소리로 포효했다.
"네 이놈들! 네놈들이 지금 범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사병들을 헤치고 나타난 홍지아가 검을 겨누며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전하. 이 나라의 사법권을 쥐고 있는 장소가 아닙니까."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지 마라!”
김한래가 홍지아를 가리키며 외쳤다.
"네가 황제 폐하를 시역하였던 것인가?"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말하지요."
홍지아가 위로 올라와서,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에 검을 겨눴다.
"오늘부로 대한제국의 모든 사법은 형조(=법무부)에서 관할할 것입니다. 형정원에서는 형조가 내려보낸 판결문을 읽기만 하면 됩니다. 직접 양형의 크기를 조율하거나 수사를 할 권한은 모두 조정에서 가져갈 것입니다."
"감히 과인을 겁박하는 것인가?"
"겁박이 아니라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홍지아가 빙긋 웃었다.
"나는 당신에게서 알겠다는 대답을 받으러 온 것이고."
"내가 싫다고 하면, 나를 죽일 것인가?"
그러자 홍지아가 대답했다.
“아마도요.”
김한래가 부들거리면서 주먹을 쥐고 말했다.
"홍지아, 그대가 이 나라를 가지려 할 정도의 야심이 있다는 걸 내가 일찍부터 알아차렸다면, 지금쯤 그대의 머리는 몸통에 붙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홍지아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이제 내 것입니다."
김한래가 눈을 찌푸리고 탁자 밑에 있는 권총을 꽉 움켜쥐었다.
홍지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김한래가 벌떡 일어서서 홍지아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깜짝 놀란 홍지아가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권총이 유리창에 맞으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의 이마에 유릿조각이 박히면서 길게 찢어진 상처를 냈다.
“아악!”
김한래가 계속해서 권총을 쏘았다. 홍지아는 피 흐르는 이마를 붙들고 의자 뒤로 숨었고, 이어서 사병들이 일제히 김한래를 향해 총격을 난사했다.
김한래가 벌집이 된 채 신음하면서 쓰러졌다. 그리고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나라가 어찌 되려고...”
홍지아가 피로 흥건한 이마를 손으로 꽉 쥔 채 일어났다. 의무병들이 달려와서 그녀의 이마에 거즈를 대고 약을 발랐다.
홍지아가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새 형정원의장을 선출해야 하니 형정원의관들을 모두 불러모으라.”
형정원의 우두머리인 형정원의관은 모두 아홉 명.
이 중 한 명 이상이 사망하면 나머지 형정원의관들이 모여 새 형정원의관을 선출하며, 형정원의장이 사망하면 형정원의관 중에서 새 형정원의장을 뽑는다.
그러자 군관이 경례하면서 말했다.
“송구하오나 다 죽었습니다.”
“에이, 야만스럽게시리.”
홍지아가 얼굴을 한 번 찡그리고 나서 말했다.
“이럴 땐 어떡해야 하지? 공지형한테 가서 물어보라.”
“예.”
+ + +
류주영이 눈물을 흘리면서 홍지아 앞에 앉혀졌다. 홍지아가 고기 접시를 내밀고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이 나셨다구요?”
류주영이 홍지아 앞에 고개를 푹 숙이면서 울먹거렸다.
“...부탁이오. 내 가족과 사헌부 간원들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지켜 주시오.”
“난 약속은 지킵니다. 먼저 어기지 않는다면.”
홍지아가 손을 내밀었다. 류주영은 그녀가 뭘 달라고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주섬주섬 품에 끼고 있던 서류철을 내밀었다.
홍지아는 그걸 받아들고 제목을 보았다.
진술서.
“생각 잘하셨습니다.”
홍지아가 빙긋 웃어 보였다.
“사헌부 대사헌 자리는 유지하실 겝니다. 사헌부 간원들과 그 친족들, 무엇보다 당신 가족들의 안위는 확실하게 보장하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사헌부는 제가 주문하는 탄핵 상소만 작성하셔야 하며, 불문언근의 원칙 또한 폐하여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류주영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홍지아가 턱을 짚으면서 능글맞게 물었다.
“내 보고를 듣기로는 고기를 먹다가 잡혀왔다던데. 맞소이까?”
“그렇습니다.”
“체포 과정에서 죽은 간원들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내 그들의 유족을 휼전(恤典. 돈으로 구휼함)하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러드리지요. 그리고 매주 금요일마다 사간원 전체를 연회에 불러드리겠습니다. 내가 속이 넓은 사람은 아니지만 먹던 거 뺏는 게 얼마나 화나는 일인지는 알거든요.”
류주영이 팔을 모으고 얼굴을 묻은 채, 고기 접시가 놓인 탁자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홍지아가 진술서를 들고 나오면서 외쳤다.
“이 진술서에 거론된 모든 황국민정당 당원들은 역적이니, 남김없이 잡아들여 목을 쳐라!”
+ + +
그렇게 1881년 명성황후 민씨의 어용정당으로 설립되었다가, 1893년 민씨 가문이 풍비박산난 후 독립된 정당으로 다시 출범한 민정협회에 그 뿌리를 둔, 104년 역사의 대한제국의 범민족주의 정당 황국민정당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사헌부 연계 인력 극히 일부를 제외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황국민정당 당원들이 끌려와서 목이 베이고 교수대에 서고 약물주사형을 당하고 사약을 받았으니, 그 수가 최소한 500인에 이르렀고, 이들이 모두 죽고 나자 더 이상 살벌한 정치계에 뜻을 두는 이가 없었다.
사건 발생에서부터 종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총괄하고 모든 정적을 제압하면서 전권을 장악하여 천하무적의 권력자가 된 홍지아는, 다시 한 번 의정부에 재상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이제 하루빨리 새 황제를 세워 나라의 중심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홍지아가 눈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누가 좋을 것 같습니까?"
그러자 복직되고도 여전히 눈치 없는 홍예찬이 대답했다.
"대감, 지금 사알직을 맡아보고 있는, 전대 황제의 동생 강정대군 이거명이 있지 않습니까?"
홍지아가 눈을 감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강명수도 거들었다.
"그게 좋겠습니다. 황태자께서 성년이 되셨기는 하나, 이와 같은 혼란한 정국에는 장성한 군주가 필요한 법이지요. 게다가 이거명은 전대 황제의 황위에 대한 대체자로 거론되었던 정적이 아닙니까?"
홍지아의 눈치를 읽은 공지형이 눈을 찌푸리더니, 이내 주변을 둘러보면서 호통쳤다.
"지금 다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이까! 적장자의 황위 계승은 황조의 정통성과 정권의 정통성에 직결되는 문제임을 모르시오?"
"하지만 이와 같은 정국에서는 반드시 장성한 임금이 있어야겠기에..."
홍지아가 탁자를 검지손가락으로 똑똑 치면서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대신들 간에 논쟁이 점점 불타오르고 있었다.
공지형을 비롯하여 이거명이 결코 자신들의 편에 서지 않으리라 파악한 대신들은 황태자 이철을, 전대 황제의 아들 이철이 황제가 되면 이 역모를 재조사하려 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들은 강정대군 이거명을 밀어붙였다.
두 파벌의 논쟁은 거의 10분을 끌었다. 금방 종결될 거라 보고 그냥 방기했던 홍지아가 한숨을 쉬고 탁자를 가볍게 땅 내려쳤다. 모두 조용해졌다. 홍지아가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
"황태자 전하로 합시다."
순식간에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모든 대신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외쳤다.
"그리하십시다!"
용상의 향방까지도 아무 근거 없이 그냥 말 한마디로 결정해버리는, 대한제국 역사상 최대의 권신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홍지아가 고개를 한 번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다시 한마디 했다.
"내일 즉위식 합시다."
"내일 즉위식을 합시다!"
모두 다시 한 번 고개를 일제히 숙였다. 홍지아가 일어나서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제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제국의 주인은 홍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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