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맹어호]다시 한 번 위대한

미합중국 대통령의 관저인 백악관 위로 10여 발의 포탄이 날았고 곳곳에서 폭음이 터졌다. 그리고 바닥에 질펀하게 내걸린 미 정부군의 군화를 밟으며, 에이브람스 전차 10여 대가 밀고 들어갔다.
워싱턴 D.C.의 방위군은 멕시코집단군의 반란에 내응하여 대통령 제럴드 가이막을 잡으려 했으나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참패했다. 그러나 정부군 핵심전력 대부분이 수도에 발묶이는 정도의 효과는 얻어냈고, 멕시코집단군이 장장 3,000km에 달하는 거리를 돌진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임스 스미스와 35명 정도 되는 멕시코집단군 특수부대가 백악관 담장 정문을 걷어차 열고 내부로 진입했다. 건물 안은 난잡했고, 벽에 걸려 있었던 듯한 조각상과 명화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급히 짐을 싸서 귀중품만 들고 달아난 듯, 내부가 너저분하고 난잡했다. 제임스 스미스가 권총을 권총집에 집어넣으면서 중얼거렸다.
"다들 총 내려. 이 새끼 도망갔어."
9번이나 대통령을 연임하며 미합중국의 경제를 처참하게 망가뜨리고, 남미 국가들에 마약 전쟁을 선포하여 수십만 명의 미군을 아마조니아 정글에서 죽게 만든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제럴드 피츠와일드 가이막. 그는 백악관이 함락되자 귀중품만 몇 개 짊어지고 다급히 어딘가로 달아났다.
스미스가 백악관 웨스트윙의 오벌 오피스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너덜너덜하게 곰팡이 핀 성조기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유리창은 두 개 정도 깨져 있었으며, 소파와 테이블도 모두 급히 떠난 듯 삐뚤어졌다.
테오도르가 뚜벅뚜벅 걸어와서 스미스 옆에 섰다. 스미스가 경례했다. 테오도르가 처참한 모습의 오벌 오피스를 굽어 살피며 중얼거렸다.
"박살났군."
"미합중국처럼 말입니다."
테오도르가 비뚤어진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 스미스가 걸어가서 쓰러진 성조기를 집어 들었다. 성조기는 여기저기 뜯어지고 너덜너덜하게 늘어졌으며, 모서리를 따라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이것이 지금 미합중국의 모습입니다."
속에서는 썩어 문드러지고 밖으로는 망가진 상태. 소비에트에게조차 총생산으로 밀리고, 민주주의는 박살이 났다.
스미스가 성조기를 똑바로 세우면서 말했다.
"이제 원수께서는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으실 준비를 하십시오.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성조기의 깃대를 꽉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위대한 미국이."
+ + +
한상훈이 활주로를 걸으면서 앞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신도연이 한상훈 옆으로 걸으면서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저기 우리 엄마 나온다."
"월성서원 COO 양서은. 신문에서 본 적 있어."
양서은이 삼조룡 그려진 푸른 재킷을 걸치고, 한 걸음씩 걸어왔다. 신도연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위압적이었고, 저절로 발걸음을 떼기 힘들게 만드는 분위기가 풍겨났다.
양서은의 눈빛은 보는 순간 딱 하나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천둥. 아무리 조용히 아무리 고요히 있어도 눈동자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천둥 같은 쩌렁쩌렁한 분위기가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꽂혔다. 한상훈은 자신의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신도연이 우아하다면, 양서은은 위엄 있었다. 한상훈은 저절로 자기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느꼈다. 신도연이 한상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개 들어. 우리 엄만 당당한 사람 좋아해."
양서은이 한번 고개를 돌려 옆에서 정비 중인 헬기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일하던 인부들이 그녀 쪽으로 눈길을 힐긋힐긋 돌리더니, 덜덜 떨면서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일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 것도 보였다.
그녀의 발길이 앞으로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벼려낸 장팔사모처럼 날카로운 표정과 쩌렁쩌렁한 천둥 같은 눈빛이 한상훈을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광만제 앞에 섰던 김민현의 기분이 이랬을까. 대체 그 친구는 어떻게 그 앞에서 전기톱을 내걸고 반말까지 내뱉었던 것일까.
"당신이 우리 도연이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남자인가요?"
그러자 신명진이 살짝 눈짓했다. 잠시 생각하던 양서은이 뚜벅뚜벅 다가가면서 정정했다.
"...그러니까,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한상훈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한상훈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뭐죠?"
양서은의 질문에 한상훈은 둘러대지 않고 대답했다.
"별다른 직업은 없습니다."
그러자 신명진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신도연이 살며시 한숨을 쉬고 옆에서 거들었다.
"상훈인 자기 직업 남한테 자랑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양서은의 눈빛이 한상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듯하더니, 이내 붉게 상기되었고, 이어서 다시 원래의 빛깔로 돌아왔다. 그녀가 뒷짐을 지면서 중얼거렸다.
"도연아, 엄마가 거짓말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네."
"솔직해서 좋군요. 거짓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양서은이 한상훈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신도연은 그녀의 미소를 보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아, 다 끝났구나. 저 웃음. 신도연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양서은은 절대 웃지 않았다. 뭔가를 비웃을 때를 제외하고는.
"들어와요. 같이 식사하게."
양서은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신명진이 양서은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한상훈은 여전히 양서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편하게 걷기 힘들어했다. 신도연이 한상훈의 옆으로 뚜벅뚜벅 걸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양서은이 살짝 뒤로 고개를 돌리고, 걸어오는 한상훈을 보면서 싸늘하게 생각했다.
백수. 결코 돈이 많아 보이지도 않고 어떤 엄청난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야.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파악은 다 끝났다. 몽상으로 가득한 입만 산 어린애. 자기 딴에는 이상을 추구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아직 세상에 부딪혀 보지도 못한 애송이. 나 같은 몰락한 가문의 변방 여인 하나에게도 압도당하는 풋내기.
한때 황후를 배출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대한정우회와 황국민정당을 전부 잠식해 버리고 진지하게 용상까지 노렸던, 경주 홍씨 최대의 대항마였고 전성기에는 오늘의 홍지아조차 도달하지 못한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던 남양 양씨 가문이다. 남양 양씨가 대적했던 그 황제가 광만제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대한제국은 전주 이씨에서 남양 양씨로 역성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제국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려 들었고 실제로 그럴 뻔했던 남양 양씨, 대한제국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초거대기업의 COO의 자리를 꿰어찬 것조차 "정계 이탈 및 변방으로의 몰락"으로 여길 정도의 여인 앞에, 한상훈 같은 애송이는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는 것이 실로 당연했고 한상훈 역시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저 남자로는 안 돼. 저 남자 가지고는...
양서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시 한 번 위대한 남양 양씨가 되지 못해.
+ + +
그 시각, 소비에트의 수도 모스크바.
세계수도로 거듭난 붉은 세계의 수도 모스크바는 지구상에서 손에 꼽히게 거대한 도시였다.
더 이상 소비에트의 질서 앞에 대적할 국가는 지구상에 없었고, 경제력, 군사력, 학문적 성취, 정치적 선진성 등 모든 면에서 세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공산독재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고, 세계에서 최고 수준으로 발달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영위하는 거대 패권 체제의 수장.
소비에트의 국회, 국가두마에서 논쟁이 일고 있었다.
"소비에트의 국익이 제일의 기치임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도 스탈린의 일국공산론도 동시에 지지하는 기치입니다!"
완연한 붉은 넥타이에 정장을 착장한 순혈 슬라브계의 여성이 금발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열불을 내며 소리쳤다.
"현재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전 세계 헤게모니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유지되는 것, 결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국방비 절반의 감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이제 임기의 끝이 다가온 고르바초프의 뒤를 이어 차후 소비에트의 서기장으로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는, 예카테리나 알라야노프나였다. 2차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양당제 국가가 된 소비에트의 현 집권여당 자유공산당의 당 대표이기도 했다.
"소비에트의 헤게모니는 군사력이 아니라 모두가 믿고 따르는 소비에트의 리더십과 반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후줄근한 복장에 추리닝 바지를 입은 아리아 혼혈계의 남성이 마이크에 대고 무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주적인 대영제국이 무너졌고, 유일한 구대륙의 경쟁자였던 대한제국은 사지 병신이 되었으며, 미합중국은 지난 35년간의 독재로 썩었습니다. 더 이상 소비에트가 총생산의 5%에 육박하는 연 1,600억 루블을 군비로 지출하면서 750만 대군을 유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카테리나 최대의 정적이자 정통파 사회주의자, 소비에트의 야당 노동인민당의 당 대표 예브게니 안드로포프였다.
"국방비를 절반으로 감축한다면 군대 역시 절반 이상으로 감축될 것. 32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없어진다는 뜻인데, 소비에트군이 상호 방위를 약속하고 지켜주는 국가들에서 주둔군을 줄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켜준다고 표현하시는 것 자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상은 주둔 소비에트군 장교들이 그 국가들의 국방부 장관까지 해먹는 것을 어떻게 지켜준다고 표현하십니까! 이제 위성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멈출 때도 됐습니다!"
"그거야말로 소비에트의 헤게모니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뭡니까!"
안드로포프가 탁자를 내려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보십시오. 중국이 일본, 한국, 베트남, 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킨 역사가 있습니까? 그 국가들은 단지 중국이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국이었기 때문에 그런 압박 없이도 그들이 주도하는 질서를 따라갔습니다! 지금 세계를 보십시오. 우리 소비에트보다 더 발달한 나라가 있습니까? 더 부유한 나라는요? 더 많은 학술적 성취를 거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소비에트의 헤게모니가 단지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입니다!"
그러자 예카테리나가 마주 소리지르면서 동쪽을 가리켰다.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왜곡해서 표현하지 마십시오, 중국은 대한제국이 나타나기 전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의 고씨 왕조와 사생결단을 냄으로서 한국에 대한 우위를 점했고, 곽거병이라는 장군에게 대군을 주어 바이칼호까지 쳐들어감으로서 몽골을 제압했습니다. 영락제의 시대에 정화라는 인물에게 대함대를 주어 인도양 지역을 휘몰아쳐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중국은 문화가 아니라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그 패권을 유지했던 것이고, 그 법칙은 유럽과 중동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단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소비에트는 앞으로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가져야 하고, 그것으로 소비에트에 도전하는 모든 국가를 제압해야 하며,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범세계적 질서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소비에트는 앞으로 군사력을 감축하고 다른 국가에 대한 강압적 외교를 멈춰야 하며, 소비에트의 문화의 힘과 경제적 우위로 상호 병존의 질서를 확립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동시에 소리쳤다.
"다시 한 번 위대한 소비에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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