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 실종 (2)

***
없었다.
기숙사에 아이린은 없었다.
텅 빈 기숙사 방의 문 앞에서 킴벌리는 주저앉았다.
유진의 눈에는 그러는 킴벌리가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혼자 수련이라도 하러 갔겠죠. 진짜 왜 그러는데요? 비제가 아이린을 납치라도 했을까 봐요?”
“···그래.”
“예? 하핫!”
하하하.
유진은 웃었다.
“걔가요? 비제한테요? 하하··· 비제가 뭐가 아쉬워서 린 같은 걸 납치해요? 농담도 심하시네.”
“···아쉬울 게 있지. 내가 그놈의 예비 육체를 모조리 빼앗아버렸으니까.”
킴벌리의 말이 웅얼거리는 통에 유진은 그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난 비제의 제자인 노릭을 꺾고, 내 쪽으로 끌어들여서 비제를 다시 도발할 생각이었어. 비제가 스스로 내게 싸움을 걸어오도록.”
뭐야, 그럼 노릭도 킴벌리의 제자가 된다는 뜻인가?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몰랐네요. 근데 그게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하지만 비제가 고작 그런 일로 내게 싸움을 걸어올까? 라반을 죽인 내게?”
“···뭐 그럴 수도 있죠. 제자가 그렇게 소중하다면.”
물론 유진은 비제가 그럴 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킴벌리는 유진의 말에 긍정했다.
“맞아. 비제에게 노릭은 자기 목숨만큼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 비제가 그렇게 좋은 스승이었어요?”
“아니, 노릭은 비제가 갈아탈 다음 몸이었어.”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킴벌리는 거기 대답하는 대신 유진을 가리켰다.
“두 번째는 네가 될 예정이었지.”
물론 그건 정말 예정으로 끝났다.
이번 세계에서는 애초부터 비제가 유진에게 눈독을 들인 적이 없었다.
‘내가 역사를 바꿨으니까.’
“하지만 난 모르고 있었어. 비제가 처음부터 너와 노릭만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비제에게는 세 번째 후보가 있었던 거야.”
굳어진 킴벌리의 표정.
유진은 아직도 킴벌리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정말로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저와 노릭이 뭐요? 후보는 또 뭐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똑바로 말해봐요! 못 알아듣겠으니까!”
“그럴 시간이 없어.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다시 비제를 찾아야 해. 가보지 않은 데··· 어디가 남았지···?”
킴벌리는 일어서서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유진은 가려는 그를 잡아 세웠다.
“좀 가만있어 봐요!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건지 얘기는 해 줘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럴 시간이 없다고 하잖아!”
킴벌리가 으르렁댔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유진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서 킴벌리와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은 지금까지의 유진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나는 망설이기만 했어.’
킴벌리의 본심을 알고 싶었지만, 그 본심을 쫓아갈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알고 싶었다.
돕고 싶었다.
“시간이 없어도 알려줘야죠···! 난 당신 제자니까!”
유진의 말에 킴벌리는 잠시 얼어붙었다.
하지만 곧이어 유진을 뿌리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교수님···!”
“그래. 난 너희 스승이니까 너흴 지켜야 해.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라.”
“아니! 당신은 내 교수잖아요. 감추고 모르게 하는 게 아니라 가르쳐 주는 게 교수 아닙니까? 내 말이 틀려요?!”
“그건······.”
유진의 목소리가 결국 킴벌리를 멈추게 했다.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킴벌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지금껏 학생을 지키는 게 스승의 의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이 정말 옳은 길인 것일까?
제자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것뿐이 아닌가?
‘정말로 나는 스승이라고 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지금까지 선생 노릇을 하겠다고 이 고생을 해왔지만, 유진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보단 유진을 앞서가려고 했다.
‘그게 유진의 앞길을 닦아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유진은 그런 생각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린의 동기기도 해요. 사이는··· 뭐 그다지 안 좋지만. 어쨌든 린이 뭔가 안 좋은 상황이라면 저도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 거잖아요.”
“······.”
‘정말. 못 이기겠군.’
“···맞아.”
“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그래. 너도 알 자격이 있지··· 미안하다.”
킴벌리는 노릭에게 했던 것처럼, 비제에게 엮인 비밀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유진. 내가 지금까지 비제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닌 이유. 알고 있냐?”
“나쁜 새끼라 그렇다면서요. 교수님이 말했잖아요?”
“아카데미에 비제만큼 나쁜 새끼는 흔해 빠졌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말이야.”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 넌 비제의 외모가 이상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냐?”
전혀 예상외의 반문이었다.
유진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야 생각했지만··· 그냥 장수하면서 좀 예쁘장한 종족이겠거니 생각했죠. 근데 그게 나쁜 거랑 무슨 상관이··· 아······.”
유진은 겨우 깨달은 듯했다.
그는 킴벌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노릭은 비제가 갈아탈 몸이야.’
그러자 끔찍한 상상이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몸을 갈아탄다는 게··· 설마··· 그런 뜻이었어요? 그런 게 정말 가능한 거예요?”
“그게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건지는 나도 몰라. 확실한 건 비제가 남의 몸을 빼앗을 수 있다는 거고, 지금 비제의 목표는 아이린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도대체······.”
유진은 그런 결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래··· 뭐, 좋다 이거에요. 비제가 남의 몸을 빼앗는 괴물새끼라니··· 믿기 힘들지만··· 근데 하필이면 린을 목표로 삼은 이유가 뭐죠?”
“나도 그 기준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학생의 실력이나 힘에 끌린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니었던 것 같아. 좀 더 복잡한 기준이 있었던 거야.”
“그게 뭔데요 도대체?”
“미학.”
“미학···?”
미학.
미의 본질을 다루는 학문, 혹은 주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
아름다움.
“아······.”
그제야 유진은 알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모든 걸 설명해 주었다.
“비제가 가진 지금의 몸도 다른 사람 것을 빼앗은 거라면··· 후보들 간의 공통점은 너무 명확해요. 그건······.”
여자아이같이 가녀린 몸,
수려한 외모.
그리고 유려한 검술.
“비제는 처음부터 린에게 관심이 있던 거예요. 그래서 전공 수업에서도 린을 괴롭혔던 거고요! 린의 실력을 꿰뚫어 보고 그걸 끌어내기 위해서! 이걸··· 이걸 왜 이제야 알았지···?”
킴벌리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건 바로···
“너라는 예외가 있었으니까. 비제가 유진 너를 두 번째 육체 후보로 삼을 예정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비제가 후보를 고르는 규칙을 깨닫지 못했다.”
유진은 또래 남자애들의 평균 이상으로 건장하다.
외모는 잘생긴 편이지만, 역시 비제의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원작 시나리오에서 비제는 유진을 택한다.
‘강신의 압도적인 힘이 다른 모든 기준을 무의미하게 만든 거야.’
하지만 그걸 킴벌리가 알아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탓에 킴벌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비제에게 후보를 고르는 규칙 따윈 없다고.
젊고 강하면 그만이라고.
‘당연히 유진의 탓은 아니야. 내가 더 의식했어야 했어. 유진은 단지 예외일 뿐이고, 비제에겐 여전히 후보를 고르는 규칙이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킴벌리는 원작을 너무 신뢰했다.
아니, 원작의 그림, 그 이면에 숨겨진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킴벌리 자신이 역정보로 비제와 노릭을 속였던 것처럼, 그도 원작의 역정보에 속은 것이었다.
“···미안하다. 네 탓이 아니야.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멍청했다. 계획이니 뭐니 잘난 듯이 지껄이고 다녀 놓고서는······.”
“후회할 시간은 없잖아요.”
유진은 킴벌리의 말을 잘라냈다.
“그럼, 일단 둘로 쪼개져서 다시 찾아보죠. 이미 가본 곳은 제외하고요. 서둘러야 해요. 아이린은 이미 그 괴물 새끼한테 먹혔을지도 몰라요.”
‘잠깐. 뭐?’
유진의 한 마디가 킴벌리 안의 무언가를 번뜩이게 했다.
킴벌리는 유진에게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다.
“잠깐. 방금 뭐라고 했지?”
“뭐가요? 서둘러야 한다니까요?”
“아니 그다음에!”
“괴물에게 먹혔을지도 모른다고······.”
“그래. 괴물. 그거다. 그럴 리가 없어. 아직 아이린은 살아 있을 거다.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예?”
킴벌리는 지금까지 원작 지식에 근거한 계획으로 상황을 타개해 왔다.
하지만 이건 원작 지식에서도, 킴벌리의 통제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방금까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패닉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흔히 지문 안에 답이 있다고 했던가.
아직 원작 안에 답은 있었다.
“내가 가진 정보는 비제가 바디스내쳐라는 것뿐이야. 그 녀석이 어떻게 몸을 빼앗는지는 전혀 알지 못해.”
“그게 지금 중요한 거예요?”
“당연하지. 비제가 네 말대로 괴물이라서 아이린을 집어삼키고 그 모습으로 의태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아이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린의 행세를 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비제는 나를 피해서 사라졌어. 그 녀석이 바디스내쳐라는 걸 내가 안다는 사실도 모르는데 말이야.”
유진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확실히 이상하긴 해요. 몸을 그렇게 휙휙 바꿀 수 있다면 교수님을 피해 다닐 이유도 없는데요.”
“그래 비제의 육체 강탈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닌 거야. 어쩌면··· 인위적인 연구의 결과일 수도 있지. 비제는 그냥 평범한 인간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더 많은 게 설명이 된다.
애초에 원작에서는 비제가 몸을 빼앗는 방법이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원작이 넌지시 던져준 암시.
비제의 신체 강탈에 관한 단 하나의 진실은···
‘그게 길고 지난한 절차를 동반한다는 점이지.’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어. 그리고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비제의 신체 강탈이 괴물의 능력이 아니라 기술의 산물이라면······.”
“그 시술을 위한 공간. 비제는 거기 숨어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단숨에 침체되어 있던 분위기가 희망적으로 바뀌었다.
“그래 분명히 있을 거다. 이 아카데미의 어딘가에 말이지.”
“근데 그 어딘가가 어딘데요.”
“그건 지금부터 찾아야지.”
“?”
“?”
유진의 얼굴에 돌던 화색이 다시 가셨다.
“뭐야. 결국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아니야. 우리에게 시간이 아직 있고 비제가 아카데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 충분해.”
“그러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아!”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일단 학회부터 가보죠. 어제 경기 전에 아이린이 그랬어요. 검술연구회에서 영입 제의를 받아서 몇 번 가줬다고요. 검술연구회는 비제가 담당하는 학회 맞죠?”
“뭐야! 그런 걸 알고 있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지!”
“저도 순위전 직전에 들었다고요. 하여간 좋은 생각이죠?”
확실히.
덕분에 훨씬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좋아. 바로 비제의 교수실로 가자.”
“아니 교수실이 아니고 학회라고요. 학회. 노망이 드셨나··· 이 아저씨.”
“알아 인마. 제대로 들었어.”
“그러면 왜 교수실로 가는데요?”
참, 당연한 걸 묻는구만.
“아직 수업 시간이잖아. 방과 후에나 학회에 출석할 수 있는데, 그때까지 망부석처럼 기다리기만 할 거냐? 회원들을 직접 찾아가야지.”
“아! 학회 명부라도 찾으려고요?”
“그것도 있지만, 비제가 직접 쓴 자료가 필요해. 좋은 게 떠올랐거든.”
유진과 킴벌리는 일단 그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유진은 킴벌리를 뒤따라 걸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킴벌리는 여전히 초조해 보였다.
발걸음이 빨랐다.
‘교수님···’
킴벌리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유진에게 제안한 건 계약이었다.
유진은 성적을 위해 킴벌리를 이용하고,
킴벌리는 실적을 위해 유진을 이용하는 계약.
아마 아이린도 같은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처음에 유진은 이 계약을 의심했다.
킴벌리를 믿을 수 없었으니까.
‘정말로 이게 서로의 이익을 위한 계약일까? 킴벌리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교수님의 진의 같은 건 알지 못해.’
그렇지만 유진은 이제 킴벌리를 의심하고 있지는 않았다.
의문은 있었지만, 그 감정은 더이상 의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기대였다.
필사적으로 아이린을 찾으려는 킴벌리.
순위전을 위해 몇 중의 계획을 세운 킴벌리.
맞춤 시험지를 만들기 위해 항상 눈 밑이 그늘진 킴벌리.
적을 알게 하고, 밥을 사주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삶의 의미마저 준 그가, 그 교수가 품은 감정이 자신과 같기를 바라는 기대.
이제는 유진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낼 차례였다.
킴벌리에게 품은 그 감정.
그것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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