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 : 도미노 (1)

***
노릭은 말했다.
“학회에 정기 행사가 있어요.”
키가 노릭의 말을 받아서 이어갔다.
“진검으로 하는 공개 대련인데··· 보통은 회원들만 데리고 해요. 근데 가끔 회원이 아닌 학생도 초청할 때가 있어요. 아이린도 그렇게 몇 번 왔고요.”
“거기에 다프니가 나타났나?”
“맞아요. 그것만이라면 특이하게 안 봤을 거예요. 다프니는 대련에는 잘 나서지 않고 비제와 면담만 하고 가고는 했어요.”
키의 말을 듣고, 노릭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도 예비 육체 후보였던 걸까요?”
‘아니··· 그건 아닐 거야.’
킴벌리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모두에게 솔직하게 말하자고는 생각했지만, 그건 현재 일어난 현상에 관한 것뿐이었다.
학생들에게 다프니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이건 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건이었다.
‘그 녀석은 본과 학장의 끄나풀이니까···!’
라반을 도살한 나를 수교수로 만들어준 바로 그 여자.
본과 학장 엘리가 프로스트피어.
다프니는 바로 그녀의 첩자였다.
아카데미가 학생들에게 무기를 쥐여주고 살인 기술을 가르치면서도 성립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교직원들의 압도적인 실력에 기인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숫자는 교직원보다 훨씬 많지.’
그렇기에 아카데미는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반란을 계획할 경우를 염두에 두었다.
그것을 위한 안전장치 중 하나가 바로 다프니와 같은 아카데미 측의 첩자.
다프니는 그중에서도 엘리가의 직속이었다.
다프니를 건드리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안 그래도 나는 원작의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바꿨어. 그런데 훗날의 폭탄을 벌써 건드리게 되면··· 전개는 완전히 내 통제를 벗어나게 될 거야······.’
그때는 원작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를 건드려야만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빌어먹을 도화선이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거야···?’
킴벌리는 혼란스러워졌다.
원작에서 비제는 강신한 유진의 손에 허무하게 죽는다.
그걸로 비제의 서사는 끝.
하지만 킴벌리가 비제를 파고들면 들수록, 원작에선 나타나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분명히 이 밑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킴벌리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도미노를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무너뜨리고 말았는지도.’
***
이야기를 대충 수습한 뒤,
킴벌리는 아이들에게 전부 해산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때, 누군가 킴벌리를 불렀다.
“교수님···!”
유진이었다.
“뭐예요. 갑자기 돌아가라니··· 지금부터 다프니를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 그러니까 너희는 얌전히 기숙사에 숨어 있어라.”
“숨으라니 무슨 소리예요! 내가 돕겠다고 했잖아요! 교수님도 알았다면서요?”
“···일이 복잡해졌어. 윗선이 이 사건에 꼬여 있는 것 같아. 너희가 끼어들면 위험해.”
“교수님은 안 위험하고요?!”
그 말에 킴벌리는 움찔했다.
“교수님은 강하죠. 알아요! 그 라반의 머리를 터뜨려 버렸으니까. 수교수로 몇 단계 특진했으니까! 근데 그거 알아요? 지금 교수님은 말도 안 되게 약해 보여요.”
“······.”
“거울이라도 있으면 보여주고 싶네요. 나보고 그렇게 잔소리 했잖아요. 많이 자라면서요. 근데 교수님은 잠을 자기는 자는 거예요?”
“너희가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잘 시간 따위가······.”
킴벌리의 말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섬뜩한 기시감.
그가 하려던 말은 과거의 유진이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초조한 거 알아요.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이 상태로 싸우면 비제한테 이길 수 있긴 한 거예요? 일단 좀 쉬라고요! 뭐든지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도와줄 테니까···”
킴벌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유진이 하는 말도, 과거에 킴벌리가 유진을 설득한 말과 같은 내용이었으니까.
“······.”
하지만 여전히 킴벌리는 유진의 말 대로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학생들한테 일을 맡기고 나는 잠이나 잔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너희는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너희의 힘으로는··· 나도, 너희 자신도 도울 수 없어.’
그렇기에 킴벌리는 유진을 등지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또 어디 갑니까! 내 말 못 들었어요? 뭘 어쩌려고요!”
“어쩌긴 인마. 난 간다. 네가 도울 수 없는 일을 하러.”
“그게 도대체 뭔데요! 교수님이 그렇게 잘났어요? 도와주겠다잖아요. 내가 돕고 싶다고요!”
그러자 킴벌리는 유진을 향해 돌아섰다.
“교수님······.”
“교수가 궁상맞게 학생들 고사리손이나 빌리라고 월급 받는 줄 아냐?”
킴벌리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 말투는 애써 장난스러움을 가장하고 있었다.
“난 너네 도와주는 사람이야. 너네한테 도움받는 사람이 아니라. 알겠냐?”
킴벌리의 손이 유진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유진은 나지막이 항변했다.
“그런 거 누가 정했는데요.”
킴벌리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말했다.
“널 보면 동생 생각이 나.”
결국 킴벌리는 가고 말았다.
유진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유진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서 머리에 남은 킴벌리의 자취를 되새겼다.
차가운 손.
그 감촉을 떠올렸다.
그리고 킴벌리에게 끝끝내 하지 못한 질문을 떠올렸다.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유진은 궁금했다.
아마 모두가 궁금해했을 것이다.
킴벌리가 자신을 깎아가며 아이린을 찾으려는 이유가 뭔지.
유진을 지키려고 하고,
그들을 폐기에서 구해주려 하고,
또 이상적인 미래를 보여주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였는지.
유진은 죽도록 묻고 싶었다.
‘당신은 도살자고··· 우린 돼지잖아? 보통 그런 거잖아. 아카데미는···’
‘그런데도 왜 그렇게 우리한테 잘해주는데?’
‘그냥, 그러고 싶어서.’
아마 킴벌리라면 그렇게 대답했을 거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
도서관을 떠난 킴벌리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빨랐다.
벌써 그는 다프니의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다프니가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때, 그는 다프니의 뒷모습에 말을 걸었다.
“다프니 라이아데.”
“?”
다프니는 뒤를 돌아보았다.
석고로 조각된 듯한 무표정.
그녀는 경계하듯 주변을 살폈다.
“···도살자 교수.”
“비제는 어디 있지?”
“···?”
킴벌리의 돌발적인 질문에도, 여전히 다프니의 포커페이스는 건재했다.
하지만 킴벌리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떨렸다는 걸.
“···왜 그걸 나한테 묻지?”
“네가 엘리가의 끄나풀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비제가 벌이는 짓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지. 그러니까······.”
킴벌리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다프니의 몸이 도약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킴벌리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때 그녀가 쥔 건 허리춤의 장검이나 품에 숨긴 비수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마검사니까.
그녀의 검은 검집이 아니라 그녀의 언어에 깃들어 있다.
‘···발하라.’
하지만 그 판단은 실수였다.
그녀는 마력검이 아니라 품속의 비수를 꺼내 킴벌리를 찔렀어야 했다.
그녀는 손에 쥔 마력검으로 맹렬히 킴벌리의 심장을 쑤셨으나, 아무런 손맛이 없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감각이 없었다.
‘······?’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손에 검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영창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별안간 찾아온 고요가, 이 세계의 모든 소리를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
‘뭐지···?!’
다프니는 킴벌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겐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엔 광륜이 떠 있었다.
태양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그 빛의 고리만이, 이 침묵에 빠진 세계에서 홀로 존재를 과시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그러나 그녀가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킴벌리의 손이 그녀를 덮쳤다.
다프니는 머리부터 대리석 바닥에 처박혔다.
무시무시한 충격이 다프니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팔리트 특유의 덥수룩한 머리털도 뇌진탕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침묵의 신 비다르의 기적.
‘고요’ 앞에 다프니는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했다.
그녀가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은 건 단 수 초.
그녀가 일어났을 때 이미, 세계는 소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다프니는 입도 뻥끗 할 수 없었다.
“네 입 속에 뭐가 있는지 알겠나.”
“······.”
“마석이야. 네가 내 별명을 안다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겠지.”
다프니는 쉽게 이해했다.
‘···도살자 교수.’
킴벌리, 그는 라반을 도살한 남자였다.
그것도 먹인 마석을 폭파시켜서.
다프니의 입 속을 가득 채운 이물감.
그 입을 틀어막은 킴벌리의 손.
그녀의 머리가 폭발 직전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너는 내가 묻는 것에 대답만 하면 돼. 그러면 괜찮을 거야.”
킴벌리의 목소리는 자상했다.
그 탓에 다프니는 착각하고 말았다.
‘아직 인정에 호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빈틈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다프니는 대답에 뜸을 들였다.
하지만 킴벌리는 더이상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킴벌리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네가 숨기고 있던 단검은 내가 챙겼어. 저항할 생각은 하지 마. 내가 너에게 또 한 번 여지를 줄 거라고도 생각하지 말고.”
다프니는 그녀의 입 안에서 열기가 치솟는 걸 느꼈다.
과부하 된 마력의 열기였다.
그 온도의 공감각적인 연쇄반응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영상을 재연했다.
산산조각 나며 사방에 파편을 튀기는 머리.
그 섬뜩한 이미지가 뇌리를 스쳤다.
결국 한계를 넘은 공포심이 다프니의 성벽 같던 무표정을 무너뜨렸다.
“읍··· 으으읍······!”
‘안돼! 살려줘. 안돼······.’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젓다가, 이내 킴벌리의 질문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질문이 뭐든 대답하겠다는 뜻이었다.
“···좋아.”
킴벌리는 다프니의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눈물은 뜨거웠다.
공포와 모멸감, 당혹스러움의 온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다프니는 학생이다.
이런 짓까진 하고 싶지 않았건만.
킴벌리는 씁쓸해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말했다.
“그럼, 받아쓰기를 시작해 볼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러나 그 다정함은 다프니에게 무저갱의 암흑과 같은 공포를 선사하고 있었다.
단 몇 분 뒤.
킴벌리는 다프니에게서 메모를 건네받았다.
거기에 다프니가 아는 걸 전부 적게 했다.
킴벌리는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뱉어도 좋아.”
킴벌리가 손을 떼자 다프니가 입 속의 마석들을 토해냈다.
타액에 젖은 푸른 돌들이 희미한 빛을 발했다.
“케엑··· 켁······.”
“그러니까 엘리가 학장은 내가 비제를 사냥감으로 삼은 걸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지. 맞니?”
다프니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비제가 날 피해 도망칠 걸 염두에 두고 너를 붙였고··· 넌 하수도로 도망친 비제를 쫓다가 놓쳤다.”
“맞아··· 맞아요···”
하수도.
‘이제야 비제의 행방을 알아냈어.’
하지만 킴벌리는 그곳의 구조도 규모도 알지 못했다.
원작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기어코 날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겠다. 이겁니까? 망할 원작자···!’
“좋아. 잘 알아들었다.”
킴벌리는 메모를 허공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단 1음절의 짧은 영창과 함께, 킴벌리의 손끝에서 마력의 푸른 빛이 발했다.
“천.”
마력화살이 메모를 꿰뚫으며 천장에 박혔고, 폭발했다.
‘마력화살, 예과 1학년도 쓰는 공격 마술의 기초.’
그것은 비제를 죽이기 위해 수련한 킴벌리 최초의 마술이었다.
‘음. 잘 타는군.’
마력의 불꽃에 산산조각난 메모의 파편이 불타 흩날렸다.
킴벌리는 내리는 불똥의 파편을 맞으며 다프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그럼 앞장서라.”
“앞장서라니··· 무슨 뜻이야.”
“네가 비제를 놓친 그 지점까지 날 안내해. 그 뒤에 풀어주마.”
그러면서 킴벌리는 다프니가 방금 뱉은 마석 더미를 그러모았다.
그리고 다프니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
“······.”
다프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손에 쥔 마석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타액의 온도인지, 과부하의 전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뭐라 항의하고 싶었지만,
킴벌리의 표정을 읽고는 그 의지를 잃고 말았다.
‘라반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명령에 따라라.’
그녀는 순순히 손에 마석을 든 채로 킴벌리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킴벌리는 다프니를 따라 걷는 동안 생각에 빠졌다.
‘하수도···? 그런 데로 날 데려가서 뭘 어쩔 셈이지?’
원작자가 옆에 있었더라면 따져 묻고 싶었다.
‘원작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를 공략하는 게 빙의의 기본이라더니··· 원작 지식이고 나발이고 아무 쓰잘 데가 없게 됐잖습니까. 이거.’
그 오갈 데 없는 불만과 함께, 킴벌리는 다프니가 안내하는 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하수도.
그 미지의 암흑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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