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강 : 도미노 (2)

킴벌리의 마력화살이 자물쇠를 부쉈다.
촤라라라락-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문의 사슬이 풀렸다.
병기학부 3번 강의동 뒤편,
킴벌리와 다프니는 하수도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이런 데가 있었단 말이야?’
아카데미는 광대했지만, 킴벌리는 그 약도를 거의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하수도의 구조 따위가 약도에 쓰여있을 리 없지.
“···쯧.”
킴벌리는 혀를 찼다.
그는 마석 랜턴에 불을 켰다.
그리고 다프니에게 랜턴을 건네준 뒤, 마석 더미는 돌려받았다.
“······.”
다시 그들은 하수도의 그늘 아래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악취··· 아니 시취가 장난이 아니군.’
오물, 고인 물과 뭉쳐 덩어리진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했다.
‘폐기’의 냄새.
킴벌리에겐 단지 불쾌한 정도였지만, 감각이 예민한 팔리트에게는 참기 어려운 구토감을 유발했다.
으켁- 켁-
헛구역질하는 다프니의 머리털이 곤두서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하수도의 양 측면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성인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낮고 좁았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하수도의 모습에 괜히 실망했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좋았으련만.’
갈 길은 정해져 있고,
드넓은 하수도에서는 쪼랩 몬스터가 잔뜩 나오고,
몇 번이고 죽었다 살아나며 일직선으로 갈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여기서 레벨링 좀 하다가 설렁설렁 아카데미로 올라가서 다 때려잡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하···’
피로감, 위기감, 미지에 대한 두려움.
여학생을 협박해서 사지를 향해 앞세워야 하는 죄의식까지.
이 모든 건 현실이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걸었다.
다프니는 어느 갈림길에서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골목의 벽을 살폈다.
그녀는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럽게 킴벌리를 돌아보았다.
“······.”
“여긴가?”
“그런··· 것 같아.”
다프니는 방금 살펴본 벽을 가리켰다.
“이게 내가 한 표시가 맞다면···”
‘확신은 없는 모양이군.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이 주변에도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나?”
“···있어.”
“규모는?”
“뭐?”
“통로의 규모가 어느 정도가 되냐고 묻는 거다.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인지, 아니면 큰 물건도 옮길 수 있는 정도인지.”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지?”
다프니는 미심쩍은 듯 반문했다.
하지만 킴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차가운 눈으로 다프니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네게 그런 호기심 따위가 허용된다고 생각하나?’
다프니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몰라··· 여기에서 올라가면 정확히 지상에서 어떤 건물로 이어지는지도 모르겠어. 난 그냥 내가 남긴 표시랑 대체적인 방향만 따라서 이리로 온 거야.”
“그건 내가 대신 대답해 주마.”
“···?”
“우리 머리 위에는 아카데미 제3 광장이 있어. 교직원 전용 건물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지.”
“그걸 어떻게······.”
하수도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킴벌리는 계속 자신의 보폭과 걷는 방향을 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산을 바탕으로 이 위치가 지상의 어디쯤인지를 추정했다.
‘집중하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어.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 이런 집중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이젠 피곤해.’
킴벌리는 미간을 틀어쥐었다.
“···단 한 번만 다시 묻겠어. 이 주변에서 이어지는 큰 화물이 통과할 만한 통로는 어디지?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잠깐, 생각··· 생각을 해봐야 해.”
다프니는 서둘러 머리를 짜냈다.
그녀는 곧 결론을 냈다.
“···아마도 본과 건물. 위원회 대회당. 그 건물의 회랑 안쪽에서 이어질 거야.”
대회당.
킴벌리는 그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있을 리 없지.
이 세계에 처음 당도했을 때, 폐기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킴벌리는 대회당 쪽으로 향하는 하수도 골목을 건너다보았다.
‘좋아.’
갈 길은 정했다.
이제는 나아갈 뿐이다.
‘다만 후환은 제거해 둬야겠지.’
킴벌리는 다프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
끔찍한 적막.
그리고 어둠.
고요는 마석 랜턴의 불빛마저 집어삼켰다.
줄곧 졸졸거리던 하수도의 물소리도,
벽을 타고 흐르던 발소리의 공명도.
모두 침묵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빛은 단 하나.
등 뒤에서 비쳐오는 기적의 창백한 광채뿐이었다.
킴벌리의 광륜이 빛나고 있었다.
다프니는 필사적으로 목소릴 내려 했지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왜, 도대체 왜···!’
몸 안의 마력도 다프니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이게··· 도살자 교수의 능력인 거야?’
그녀는 킴벌리에게 잡힐 때부터 이 순간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다가올 운명을 막을 수 있는 힘까지 있는 건 아니었다.
다프니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든 저항을 포기했다.
어차피 엘리가의 첩자로서 끝을 맞이하나, 이렇게 죽으나 다를 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 써먹었으면 버려지는 거다.
‘결국 이렇게······.’
이제 킴벌리는 다프니를 죽일 것이다.
이 일이 엘리가에게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다프니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두 번째 어둠을 맞이했다.
곧 세 번째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눈을 뜨고 불이 켜져도 끝나지 않을 영원한 어둠이.
다프니는 필사적으로 몸의 떨림을 막으며···
그 순간을 기다렸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프니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손에 들린 랜턴.
그 랜턴에서 다시 빛이 나고 있었다.
색이 돌아왔고,
소리도 돌아왔다.
그러나 킴벌리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
약 기운이 가시자,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먼저 깨어나고,
몸이 뒤따랐다.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눈을 뜬 뒤에는 고향의 침대에 누워 있고, 아버지가 그녀의 단잠을 깨우지는 않을까···
허황된 기대가 그녀를 떨리게 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곳은 낯선 천장.
시체 냄새가 나는 아카데미의 어딘가였다.
“후우······.”
알고 있었다.
기대 따윈 무의미하다는 거.
이미 옛날에 아버지는 죽었고, 아이린은 이 세상의 변방까지 쫓겨났다.
이곳은 도축장이다.
무사히 졸업해서 제국의 영광스러운 사관이 되는 미래 따윈 애초에 꿈꾼 적도 없었다.
누군가 영웅처럼 나타나 아이린을 구해주리라는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바보 같이···’
지금 아이린이 바라는 건 하나뿐이었다.
“야··· 나 화장실 좀 가자.”
아이린은 비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비제는 시야의 구석에서 무언가 기판 같은 걸 조작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어항 같은 게 있었다.
사람만 한 물고기여도 몇 마리는 들어갈 것 같았다.
비제는 돌아선 채로 말했다.
“조금 기다려. 어차피 좀 있으면 싸기 싫어도 싸야 할 테니까.”
“뭔 소리야··· 네가 나 대신 싸주기라도 할 거냐?”
“그건 아니고, 널 약으로 다시 재운 다음에 몸에 전류를 흘려서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킬 거거든? 그러면 네 몸은 온몸의 배설물 및 노폐물을 깔끔하게 뱉은 뒤에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는 거지. 일종의 초기화라고나 할까.”
비제는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끔찍한 소리를 쏟아냈다.
아이린은 경악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모르지. 이 몸은 네가 아니니까. 적어도 아직은 말이야.”
비제는 특유의 미소를 흘렸다.
“앞으로 네가 겪을 절차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 줄까? 쓸데없는 짓이지만, 이 몸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못 할 거 없지.”
그는 눈앞의 수조를 쿵쿵 두드렸다.
“이 몸은 너의 아름다운 몸을 초기화시킨 뒤에 이 수조에 너를 넣을 거야.”
“뭔데··· 변태새끼 마냥 박제라도 하고 싶은 거냐?”
“아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는 이 몸의 미래가 될 거라구. 이해가 안 되면 바꿔 말해줄까? 너는 ‘이 몸’이 될 예정이야.”
그는 결박된 아이린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아이린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몸은 네가 아주 마음에 들어. 사랑스러운 이 몸의 미래, 아이린 노튼 드 모리에. 하지만 네 정신은 네 몸만큼 고상하지 못하지.”
“이 엿같은 손 치워···!”
“그래. 그렇게 금방 험한 말을 입에 담고 말이야. 네 몸은 네 추잡한 영혼을 담기엔 너무 아까워. 그래서 이 몸이 좀 써주기로 했지.”
아이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몸을 쓴다니, 몸을 갈아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못 들어주겠네···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만 떠벌이는지 모르겠는데? 내 뇌를 네 걸로 갈아 끼우기라도 할 거냐?”
“아아~ 바로 그거야.”
“하?”
“이 수조에 널 넣어서 너의 돼지 뇌에 깃든 쓰레기 영혼을 태워버릴 거거든. 그 뒤엔··· 그 아름다운 육체와 근육에 새겨진 검술의 흔적만이 남겠지.”
“···잠깐, 진심이야?”
“이 몸은 항상 진심이야. 특히 너에게는 말이지.”
그리고 비제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검지를 치켜들었다.
“아! 그리고 네 영혼을 불살라버리기 전에 남겨야 할 게 하나 있어.”
“네년은 도대체······.”
“너의 그 검술. 어디서 난 거야?”
“···!”
비제는 아이린의 턱을 사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건 아이린 자체가 아니었다.
아이린의 껍데기, 그리고 그 몸에 체화된 검술.
그가 관심이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말할 것 같아?”
아이린은 오기를 부렸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담백했다.
“뭐, 말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대충 알 것 같으니까.”
“너 따위가 어떻게······.”
“넌 귀족의 성을 가졌지.”
아이린은 흠칫했다.
“너의 성 ‘드 모리에’ 그냥 모리에에서 왔다는 뜻이지. 하지만 모리에는 그냥 동네 이름이 아니야. 한 지방의 이름이지. 지방의 이름을 성으로 사용하는 자는 단 두 부류에 불과해.”
“······.”
“이방인이거나, 귀족이지. 근데 넌 제국민인 것 같으니··· 하핫! 그 얼굴을 보니, 이 몸이 맞췄나 보네!”
비제의 광포한 웃음이 이 어두운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드 모리에··· 아아, 드 모리에! 네 이름을 검술서에서 본 것도 같아. 분명 고명한 무인 가문이겠지. 아니, 이었던 건가? 가문이 몰락했나? 아니면 너만 버려진 거야?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구지? 이 몸은 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그는 막무가네로 아이린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닥쳐. 내가 아니라 내 몸과 검술에 관해 알고 싶은 거겠지.”
아이린은 저항하고, 부정하고, 침묵했지만 비제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질문에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건 단지 게임이었다.
아이린의 정신을 태워버리기 전에 즐기는 한순간의 놀이.
승리감을 즐기는 것이었다.
“아까 잠들기 전에 아버지를 되뇌던데. 아빠가 가르쳐주셨나? 아빠가 너에게 그 검술을 주고, 싫증이 나서 너를 버려버린 거야? 너를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나?”
“아니야···”
“널 제 손으로 죽이는 대신 이 도살장으로 던져버린 거야? 그런 거지?”
“아니라고···!”
아이린의 충혈된 눈이 비제를 쏘아보았다.
“얼마나 버림받은 게 억울했으면··· 어우. 그렇게 보지 마. 눈빛으로 사람도 죽이겠네. 이 몸은 널 버린 네 아버지가 아니라구.”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아아. 이렇게 예쁜 아이가 이런 표독스러운 성격으로 변하게 만들다니. 하여간 부모라는 것들은··· 쯧쯧······.”
“더 말하면 죽여버릴 거야! 알았어?!”
하지만 아이린이 아무리 악을 써도 비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부모들은 자식을 자기 인생의 연장선처럼 생각하지. 자기 철학을 가르치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주고,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만들어. 자식의 몸을 빼앗지 못하는 대신, 자식을 자기 분신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자기의 젊은 시절이 그리워서 말이야. 부모의 자식 사랑이란 건 애처로운 자기애에 지나지 않아.”
그는 아이린을 마주 보았다.
“이런 말을 하는 이 몸이 증오스러워? 죽도록 미운 거야? 이 몸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 아니야··· 그래서는 안 되지.”
“닥쳐······.”
“널 친히 이 몸 앞으로 대령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네 부모야. 아카데미라는 지옥에 널 처넣었잖아? 분명 네 대체품을 찾은 거겠지. 어떻게 해도 네 젊음을 빼앗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거나.”
“······.”
“네 몸을 빼앗을 방법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으냐. 네 부모와 이 몸의 차이는 그것 하나뿐이야. 어쩌면 이 몸이 네겐 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비제는 마치 아이린의 모멸감을 읽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이린이 고통스러워 할수록 그의 조롱은 더 거세졌다.
“자, 날 아빠라고 불러도 좋아. 하하핫!”
“···죽어버려.”
아이린의 목소리에 이전과 같은 기세는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악을 쓴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바로 그 점이 비제의 모욕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아이린의 모멸감을 자극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이.
‘킴벌리는 안 와. 알고 있었잖아. 뭘 기대한 거야···?’
기대도,
그동안의 고락도,
유진도, 킴벌리도, 아이린 자신도.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타닥-
‘···방금.’
그 무의미한 독백 속에서,
아이린은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작가의말
오늘부터 22시에 연재회차가 등록됩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