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 겟아웃 (2)

선언과 함께, 이번엔 사방에서 동시에 마력화살이 날아들었다.
무리의 대다수가 온몸에 구멍이 뚫려 우수수 쓰러졌다.
이제 숨이 붙어 있는 건 단 몇 명뿐이었다.
비제와 무리의 수장은 가까스로 큰 부상은 면했다.
아까부터 적 측에서 쏘고 있는 건 마력화살뿐이었다.
그 완성도는 놀랍지만, 그래봐야 태생은 초급 마술.
교수급의 실력자라면 대처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들을 괴롭히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저 미친놈 도대체 몇 명을 데려온 거야?’
비제는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저 그늘 아래 숨은 적이 도대체 몇 명인지 비제가 알 길은 없었다.
킴벌리의 동료를 다 해치운다 해도 승산이 있을까?
킴벌리는 그 라반을 죽인 놈이다.
그런 놈에게 이길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렇기에 도주를 선택했다.
하지만 도살자는 이 지옥 밑바닥까지 쫓아왔다.
당장이라도 비제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날아온 건 고작 마력화살뿐이었어. 하지만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무리의 수장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는 전투 이외의 방법을 선택했다.
“거래의 조건을 안다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
킴벌리는 그저 비스듬히 수장을 지켜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뱉은 말.
수장은 멈추지 않았다.
“안색이 좋지 않군요. 킴벌리 교수.”
“?”
“당신이 문약한 몸을 지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남은 목숨이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수장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까지 당신은 무능한 말단 교수에 불과했습니다. 라반을 죽일 힘을 손에 넣기 위해 목숨을 깎아낸 것 아닙니까?”
“······.”
킴벌리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에게 새 육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절차만 거치고··· 또, 몇 가지 정보만 제공한다면 말이죠.”
“정보?”
“어떤 경위로 이곳까지 도달한 건지, 그리고 당신에게 협력하고 있는 건 누구인지 말해야 할 겁니다.”
하핫.
협력이라.
킴벌리는 그들이 우스웠다.
‘협력은 무슨. 내 뒤엔 아무도 없어.’
수장이 킴벌리의 안색을 읽었듯, 킴벌리도 그의 언어에서 불안을 읽어냈다.
킴벌리가 두려워 떠는 그들의 속내가 보였다.
정말로 우스운 일이었다.
비제와 이 남자의 뒤에는 필시 거대한 조직이 있으리라.
이처럼 거대한 음모를 꾸민 자들이니까.
하지만 그런 자들이,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킴벌리의 힘과 배후를 두려워하고 있다니.
‘이렇게 멍청할 데가 있나······.’
“하하하······.”
“왜 웃습니까?”
“내가 두렵나?”
“···오만하군요. 킴벌리.”
수장의 건조한 목소리에 모멸감이 비쳤다.
“우리를 적으로 돌려서 당신에게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아니. 나는 이 일이 좋거든.”
“···?”
“난 애들이 좋아. 동생 생각도 나고··· 교사가 꿈이었거든. 학생들한테는 괜히 잘해주고 싶어져. 근데 이 세계는··· 애들한테 별로 친절한 곳은 아니더군.”
이 세계에서의 짧은 경험 끝에,
킴벌리는 깨달았다.
‘난 이 세계가 싫어.’
만화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살아갈 세계로서는 아주 최악이다.
학생에게도, 그리고 선생에게도.
“난 세상이 아이들에게 친절한 곳이길 바라. 받아 마땅한 사랑을 받고,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편한 침대에서 안심하고 잠들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빌어먹을 생존경쟁과, 살육전과, 친구의 처형식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됐으면 좋겠어.”
수장과 비제는 킴벌리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도살자 킴벌리는 설마 광인이었나?’
어쩌면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 셰인의 세계에서 킴벌리의 말은 광인의 넋두리였다.
그러나 킴벌리는 이 세계의 이방인이었고, 침략자였고, 침입자였다.
그는 이 세계의 사람이 되고자 했었다.
도살자가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선택의 때가 왔다.
오래도록 미뤄두었던 선택이었다.
그는 꿈이 있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기로 결정했다.
그의 상식이, 이 세계의 상식이 되도록 하는 것.
“난 이 세계를 새로 쓸 거야.”
그렇게 말하며 킴벌리는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세계에 너희가 살곳은 없어.”
그리고 반지가 빛을 발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법의 휘광이 시야를 감쌌다.
부대의 일제사격에 맞먹는 양의 마력화살이 쏟아졌다.
킴벌리의 무기는 오직 마력화살뿐이었으나, 셰인의 몸은 화살만이라면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었다.
수장과 비제는 화살을 피해 그늘로 숨어들었다.
먼저 숨어 있는 킴벌리의 부하들을 처리하려는 심산이었다.
수장은 거칠게 장검의 칼집을 벗겼다.
그리고 어둠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그곳에 킴벌리의 부하 같은 건 없었다.
“···?”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푸른빛으로 명멸하는 몇 톨의 마석.
그리고 거기서 들려온···
킴벌리의 메아리뿐이었다.
천-
“!”
마석에서 발한 마력 화살이 수장의 어깨를 꿰뚫었다.
“천!”
그것은 마석을 이용한 원격 공격.
마석에의 마력주입은 그 주파수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
이를 이용해 빈 마석에 마력을 주입하며 단 1음절의 영창을 재생하고,
근처에 배치한 마석의 잔존 마력으로 마력화살을 발사한다.
비제와의 싸움을 위해 준비한 킴벌리만의 기술이었다.
‘이거면 단순한 마력화살로도 강자를 쓰러뜨릴 수 있어.’
연이은 시간차 공격에 수장은 무방비해졌다.
이어서 킴벌리가 돌진해 왔다.
수장은 황급히 장검을 휘둘렀지만, 그 칼날은 고작 킴벌리의 뺨을 스쳤을 뿐이었다.
이어서 쏘아진 킴벌리의 영거리 마력화살이 수장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으허억······!”
죽음의 비명이 차오르는 피의 조류 사이로 삼켜졌다.
그는 쓰러지고,
킴벌리는 그의 검을 주워들어 그 후드를 벗겼다.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뭐야 이건 또······.’
모르는 얼굴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에겐 얼굴이 없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은 엑스트라의 얼굴처럼,
그 안면에는 입과 납작한 콧구멍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정체에 경악할 시간은 없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투다···! 내게 와서 맞서! 비제 텔라문트!”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비제의 검이 킴벌리를 향해 그림자를 드리웠다.
킴벌리는 남아 있는 거의 모든 마석을 뿌리며 최후의 영창을 했다.
그의 영창을 재생하고, 반복하는 마석들의 음성은 마치 공명하는 코러스 같았다.
···천-!!!
마력의 화살비가 비제를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비제는 거의 모든 화살을 피해냈다.
그 공격을 읽은 것은 비제 안의 공포였다.
킴벌리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비제의 목숨을 살렸다.
여전히 비제는 몇 발의 화살을 맞고 말았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제발 죽어···!’
지척까지 다가온 비제의 칼날에 맞서 킴벌리도 검을 들었다.
그리고 비제에게 향했다.
그러나 킴벌리의 검은 보기 좋게 튕겨 나갔다.
회전하며 땅에 처박혔다.
“아, 이런.”
킴벌리의 외마디 탄식과 함께,
비제의 칼끝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킴벌리의 손가락을 잘라냈다.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킴벌리는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자신의 왼손 약지를 보았다.
거기엔 킴벌리의 몇 없는 무기가 있었다.
반지처럼 생긴 마술촉매.
죽은 라반의 물건이었다.
비제는 땅에 떨어진 그것을 무자비하게 밟아 부쉈다.
덩달아 킴벌리의 왼손 약지였던 것도 뭉개졌다.
“하··· 이겼어···! 이 몸이 라반의 도살자를 이겼다구!”
희열에 찬 비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킴벌리는 쓰러졌고, 비제는 아이처럼 폴짝대며 기뻐했다.
“이 미친 개백정 새끼가··· 여기까지 따라오는 게 정말 말이 돼? 진짜 넌더리가 난다. 징글징글하다 구···! 으윽······.”
비제는 이제야 고통을 느낀 듯 몸을 어루만졌다.
“게다가 감히··· 이 몸에 상처를 내? 도대체 구멍이··· 이게 몇 개야? 어떻게 할 거냐구···!”
비제의 몸에는 군데군데 마력화살이 꿰뚫고 지나간 자국이 새까맣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는 분을 못 이긴 듯 킴벌리의 오른손을 칼로 찔렀다.
그 손은 검에 꿰뚫려 땅에 못 박혔다.
“큭···!”
“아파? 너도 피를 흘리는구나···? 더럽게 창백해서 피 말고 다른 게 흐르는 줄 알았는데.”
쓰러진 킴벌리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제의 얼굴이 거의 한 뼘 거리로 킴벌리에게 다가왔다.
“하··· 뭐야. 이렇게 허무하게 질 거면 뭐 하러 그렇게 아득바득 쫓아온 거야? 세계를 다시 쓴다던가 하는 그 개소리가 진심은 아니지? 진짜 이유가 뭐야? 이 몸에 관심 있어? 아니면······.”
비제는 손끝으로 킴벌리의 턱을 훑었다.
“···아이린 드 모리에가 갖고 싶었던 거야?”
“······.”
“꺄핫! 뭐야! 진짜야?!”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 웃기네. 진짜로 웃겨. 그렇게 잘난 척하며 떠들더니··· 결국엔 그런 이유였어? 하핫!”
비제는 폭소했다.
그는 두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실제적 승리감과 정신적 승리감.
하지만 킴벌리는 담담했다.
“당연하잖아. 네 수업에 수강생이 0명이면 좋겠냐?”
“또 같잖은 미친 소리를······.”
“네놈도 교수 아닌가? 그런데도 모르는 거냐? 네가 네 변태 같은 검술이나 물고 빨면서 몸이나 갈아치우라고 월급 받는 줄 알아?”
그렇게 묻는 킴벌리의 눈빛은 여전히 비제를 비웃고 있었다.
‘네가 졌잖아! 이 몸이 이겼고! 근데 이 개망나니 새끼는 뭐가 잘나서 나불대는 거야···!’
“네가 이 몸에게 설교나 늘어놓을 입장이라고 생각해?!”
“왜? 아닌 거 같나? 넌 네가 교수인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교수는 연구자이기 이전에 교육자다. 학생 없이 교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건 교수가 아니라 학위 이수자라고 부르지.”
비제는 부아가 치밀었다.
더이상 참기 힘들었다.
“···추한 개백정 따위가. 네 목숨이 누구 소관인지 잊어버렸어?”
비제는 킴벌리의 손을 찌른 검을 비틀었다.
“아아악···”
“너 따위가 이 몸을 가르치려 들어? 네가 무슨 자격이 있는데? 응? 너 따위가··· 너 따위가···!! 뭐가 교수고 뭐가 학생이라는 거야!? 웃기지 마···! 너도 결국 남의 몸을 탐내는 늙다리에 지나지 않아!”
킴벌리의 손은 순식간에 헤진 걸레짝만도 못한 꼴이 되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킴벌리를 파고들었다.
이 정도로 강렬한 고통은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었다.
현실에서의 킴벌리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이하게도,
의식의 표층에서 아픔을 느끼는 킴벌리가 있는가 하면···
한발 물러나 모든 것을 조감하듯 지켜보는 내면의 킴벌리가 있었다.
그것은 셰인도, 킴벌리도 아닌 김시언이었다.
‘자격? 그래··· 내게 자격 같은 건 없지.’
김시언이 중얼댔다.
‘나도 비제나 다를 게 없으니까.’
김시언은 셰인의 몸을 빼앗았다.
그리고 킴벌리가 되었다.
빙의란 그런 거니까.
김시언은 그 사실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만화 속의 엑스트라 등장인물 셰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미하게 죽을 예정인 엑스트라의 인격보다 나 자신이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김시언은 빙의 전에 원작자가 말한 대로 되고 있었다.
‘과몰입’하고 있었다.
모두를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셰인의 삶을 빼앗은 자신이 오만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김시언은 남의 몸을 빼앗았다.
비제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하고 후회한들, 김시언의 영혼에 각인된 그 진실이 지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깨달은 순간에야 비로소 킴벌리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비제를 죽일 자격을.
“······.”
“···넌 약해. 이 몸은 진작에 네 약점 같은 건 파악했다구. 너, 쓸 수 있는 마술은 마력화살뿐인 거지? 마석을 써서 무슨 꾀를 부렸는진 모르겠지만, 이제 이 몸에게는 안 통해. 멍청한 라반한테는 통했을지 몰라도···!”
킴벌리는 순순히 수긍했다.
“잘 아네. 난 약하지. 그래서 이제 남은 수가 얼마 없어.”
“하핫···! 그럼 그렇지!”
킴벌리의 패배선언에 비제는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그 말을 씹고, 또 곱씹던 비제의 뇌리에···
자그마한 위화감이 스쳤다.
‘···얼마 없다고?’
그때, 무언가가 비제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
비제는 간발의 차로 몸을 틀어 직격을 면했다.
그는 습격자를 피해 몇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습격의 상흔을 내려다보았다.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다.
갈빗대도 몇 개 나간 것 같았다.
그는 밑바닥부터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아악···! 또 뭐야······!”
비제는 새로 나타난 적에게 칼끝을 향했다.
그곳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스승을 일으켜 세웠다.
“아악··· 아프니까 살살해.”
“바라는 것도 많네. 나 아니었으면 교수가 아니라 그냥 학위 이수자 될 뻔했으면서.”
“그래, 고맙다. 고마워.”
킴벌리는 아이린의 어깨를 붙잡고 일어섰다.
비제는 경악했다.
“도대체 언제······!”
“내가 뭐라 그랬어? 난 교수야. 교수는 학생 빼면 시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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