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 : 뉴 게임

“···그건······.”
이 점을 지적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킴벌리가 다프니를 살려 보냈을 때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변명해야 할 순간이 찾아오자 말이 나오질 않았다.
‘물론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엘리가는 거짓말을 꿰뚫어 볼 텐데···’
하지만 다른 수를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학장의 통찰력이 이번에는 실패하기만을 바라야 하는 것인가.
킴벌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짐작이었습니다.”
“짐작?”
“엘리가 학장 당신께서는 이 아카데미에서 20년 이상 근무하셨습니다. 교사였던 시절도 있으실 테고, 그걸 가르친 제자도 있으셨겠죠.”
“그래서?”
“하지만 학장님 당신께서 직접 교편을 잡기를 그만둔 건 한참이나 지난 일입니다. 그런데 다프니는··· 그런 학장님과 같은 마술을 사용하더군요.”
“과연.”
엘리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 살았다!
킴벌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리가는 담담하게 고했다.
“너, 거짓말을 하고 있군.”
“예···?”
“네 말에는 근거도 설득력도 있어. 하지만 내 눈은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군. 과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느 쪽일까. 내 눈인가? 아니면 너인가.”
X됐다. X됐다. X됐다. X됐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뭐, 뭔가 방법이 없나?
어떻게 다른 변명이······.
“이번만은 살려주마.”
엘리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난 내게 거짓을 고하는 자를 용서치 않아. 하지만 네게는 빚이 있지.”
“빚··· 말입니까?”
킴벌리는 겨우 입술만 떼서 엘리가에게 되물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다프니의 목숨값이다. 너는 다프니를 죽일 수도 있었어. 그랬다면 애초에 나랑 대면할 필요도 없었겠지. 우리가 기생자들의 지하 시설에 대해 알 일도 없었을 테고.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사실이다.
다프니를 살려 보낸다는 건 엘리가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것과 같은 선택지였다.
당연히 킴벌리에겐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킴벌리는 자신의 선택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킴벌리는 한점 망설임도 없이 다프니를 살려 보내는 걸 택했다.
‘학생을 죽이는 건 애초부터 선택지조차 아니었어.’
다프니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겁박한 것조차 후회하고 있었다.
“···학생을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너는 학생을 아끼는군.”
“네.”
“미친놈.”
엘리가는 킴벌리를 매도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킴벌리를 비웃는 기색은 없었다.
“예전부터 일관적인 너의 그 광기가 네 목숨을 구했다. 내가 너를 일정 부분 신뢰해도 된다고 판단한 이유가 바로 그거니까. 네가 비록 불상의 경로로 나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말이지.”
광기.
킴벌리는 담담히 그 평가를 납득했다.
학생에게 애착 따위를 갖는 건 아카데미에서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킴벌리가 ‘예전부터’ 일관적이라는 말이었다.
‘그건 설마 셰인도··· 좋은 선생이었단 뜻인가?’
그러나 엘리가는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학생을 좋아한다니 이제 전공수업을 맡겨도 되겠군.”
“예!?”
별안간 나타난 소식에 킴벌리는 당황했다.
“아니, 저 그···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수교수가 전공수업을 하나도 담당하지 않는다니 어불성설이다. 바로 내일부터 넌 수업에 들어가게 될 거다.”
“바로 내일부터라니 도저히······.”
“그리고 지하 시설에 대해서는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내가 명령할 때까지 기생자에 관해서는 함구해라. 경거망동하지도 마라. 관련 사항에 관해 아는 네 학생의 입단속에 신경 쓰도록.”
엘리가는 자기 말만 재빨리 늘어놓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변명이나 거절 같은 건 듣기 싫다는 의지가 그 뒷모습에서 느껴졌다.
“······.”
‘묘하게 깜찍한 구석이 있으시군.’
슬슬 킴벌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생각보다 몸은 가볍게 움직여졌다.
‘치유기적 덕도 있겠지만··· 정말로 오랜만에 길게 잠들 수 있었지.’
킴벌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건물을 나섰다.
그 앞에는 유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
“유진.”
유진은 킴벌리에게 달려가서 그를 껴안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긴 했다.
하지만 유진은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괜찮냐.”
그러나 그렇게 묻는 킴벌리의 모습에, 유진은 그만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으윽···”
유진은 킴벌리에게 뛰어들어 그를 껴안았다.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휴. 놀랐네. 이 자식.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냐?”
“미안해요.”
유진은 얼굴을 묻은 채로 말했다.
가슴에 그 목소리가 울렸다.
“뭐가 미안해 인마. 마지막에 네가 날 구하러 왔잖아.”
“교수님이··· 진심이라는 걸 믿지 못했어요.”
“뭔 진심?”
“우리한테 잘해준 거요. 도와주고, 구해주고, 꿈을 준 거요. 그게 다 교수님이 진심으로 한 일이란 거. 그걸 믿지 못했어요.”
“무슨 진심이야. 일이니까 하는 거지.”
“괜히 쑥스러워서 그렇게 말하는 거 다 알아요··· 이젠 안다고요.”
“아니. 내 세상에서는 선생이 애들한테 잘해주는 게 상식이거든.”
그러자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것참 멋진 꿈이네요.”
유진은 그를 등지고 홱 돌아서 버렸다.
그의 가슴팍은 조금 젖어 있었다.
‘짜식.’
그는 유진의 어깨를 툭 쳤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아이린 얘는 어딨어?”
“기숙사에 있겠죠? 같이 교수님 보러 가자고 했는데 자기는 안 되겠다던데요.”
“아쉬운걸. 아이린한테 고맙다는 말은 해둬야 하는데.”
“교수님이 걜 비제한테서 구했잖아요? 걔가 오히려 고마워해야죠.”
“아이린은 비제랑 싸울 때 날 도와줬어. 날 지하에서 업고 올라온 것도 그 녀석이고. 고초가 많았을 텐데···”
“그럼, 뭐 기숙사에 가볼래요?”
킴벌리는 고개를 저었다.
더이상 학생 기숙사에 쳐들어갔다간 이번에야말로 한 소리 듣게 될 것이다.
그 엘리가 학장한테!
“···아니야. 아쉽게 됐지만, 아이린하고의 회포는 나중에 풀지 뭐.”
대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교원 기숙사였다.
기숙사 테라스의 고위 교원 전용의 레스토랑.
킴벌리는 망설임 없이 그 빈 자리에 앉아버렸다.
“너도 와서 앉아.”
“뭐··· 포장해서 먹고 그런다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인마. 이 위대한 킴벌리 수교수님께서는 그런 짜치는 짓 따윈 안 하신다.”
“와. 슬슬 권력을 쓰는 법을 터득하신 거예요?”
“모든 아카데미 사람이 내가 비제를 해치운 줄로만 알 텐데, 누가 이 권세에 도전하겠어?”
“실제로 교수님이 했잖아요?”
그렇게 유진은 되물었다.
이 눈치 없는 자식···!
“쉿···! 인마, 그건 기밀이라고! 공식적으로 난 아무 짓도 안 한 거야. 아무 증거도 없으니까.”
“아··· 그런 거구나.”
그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웨이터가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킴벌리 교수님.”
“오늘 가장 괜찮은 코스로 2인분. 당연히 식기도 두 벌씩. 전부 내가 먹을 테니 옆에 이 녀석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웨이터의 인사도 무시한 채, 킴벌리는 건성으로 주문을 했다.
하지만 그 난해한 주문에 웨이터는 망설이지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물론입니다. 교수님. 곧 전채를 내어오겠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흔쾌히 주문을 받들고 사라졌다.
나온 음식은 당연히도 최고였다.
두 사람은 모든 식사를 마친 뒤에, 잡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킴벌리는 대뜸 물었다.
“너. 아이린 좋아하지?”
“예에···? 제가? 린을요? 도대체 어딜 봐서요···?”
“아닌 척하기는. 이 선생님은 척 보면 척이야.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괜히 시비 거는 남자애를 내가 한두 번 본 줄 알아?”
“네에···?”
“내가 뭐 너희 연애 사업에 참견할 생각은 없다만, 연애는 학업에 커다란 변수가 될 수 있어요··· 조심하도록 해.”
“······.”
푸핫-
크흐흐하핫-
잠자코 듣고 있던 유진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배를 잡고 주변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웃겨 인마? 어른이 진지하게 상담해 주시는데.”
“아··· 진짜 웃기네. 린이 예쁘긴 하죠. 근데 저한텐 절대 아니에요.”
유진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진짜로 아닌 건가···?
‘애칭으로 부르고, 서로 어디 다니는지도 알고, 밥도 같이 먹자고 하는 거 보면 진심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냥 친구로서의 정이었던 건가?’
“그 옛날에 차였거든요.”
“으엉···?”
모르는 정보의 등장에 킴벌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진과 아이린의 옛날이야기?
이거 놓칠 수 없다.
“예과 시절에는 린이 예쁘고 하니까 고백도 많이 받았어요. 근데 걔 성격에 연애 따위를 생각이나 하겠어요? 너나 할 것 없이 모조리 차였죠. 그때 저도 차였고요.”
킴벌리로서도 그런 광경이 상상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 드센 아이린이 평범한 연애를 하는 것도 웃긴 일이니까.
“뭐, 재미로 고백했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저는 남보다 린을 더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던 거죠. 결과는 뭐 그렇게 됐지만.”
“그럼 지금도 마음은 있는 거 아니냐? 역시 내가 맞췄잖아?”
“하하. 그때도 평범한 연애 감정이 아니었는걸요. 차인 뒤로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지금 린이 저한테 사귀자고 해도 제가 거절할걸요?”
“허어···”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허무한 내막에 킴벌리는 약간 실망했다.
유진은 디저트까지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연애 같은 걸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지금 죽고 사는 문제가 눈앞에 있는데 꿈도 못 꾸죠. 그런 거. 그리고······.”
“?”
“이젠 중요한 게 생겼어요. 연애나··· 다른 사람들, 그 바보 같은 게보다 훨씬 소중한 거요.”
킴벌리는 그게 유진의 꿈이라고 짐작했다.
유진이 그리는 새로운 미래, 혹은 세상의 형태.
···아닌가?
“하여간 잘됐다. 앞으로도 그걸 잃지 말아라.”
“말 안 하셔도 그럴 생각이에요.”
유진은 킴벌리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
다음 날.
킴벌리는 본과 건물의 복도를 서둘러 걷고 있었다.
걷는 중에도 그는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비제의 사건은 끝났다지만, 킴벌리가 해결해야 할 일은 아직도 몇 개나 있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
그리고 새로 생겨난 과제.
‘으음··· 유진과 아이린의 폐기 문제는 이제 대충 일단락 됐어. 아이린의 성적은 아직 문제지만, 그 부분은 엘리가가 납치를 참작해 주겠다고 했고······.’
‘남은 문제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남은 두 명의 특별반 학생이지.’
아직도 킴벌리는 그 두 사람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사안.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접촉해야만 했다.
그런 고민에 골몰하던 차, 킴벌리는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아이린이었다.
“엇.”
“오. 아이린. 이런 데서 만나다니.”
“···어.”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식사라도 대접해 주려고 했······.”
“······!”
“···는데.”
아이린은 갑자기 말도 없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야. 왜 저래.”
처음에는 얼어붙어 있는 것 같더니, 갑자기 달아나 버리다니.
‘혹시 아직 어디가 아픈가?’
그럴 만도 했다.
비제와의 싸움도 얼마 지나지 않았고, 킴벌리를 끌고 올라오느라 그 고생을 했으니···
그런데 곧이어 아이린은 킴벌리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마치 부메랑처럼.
“······.”
“아이린···?”
그녀는 말도 없이 다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킴벌리는 허리를 굽혀 아이린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 순간 아이린은 고개를 들었다.
“미안.”
“뭐가? 아··· 너도 유진이랑 같은 말을 하려고 하는구나? 안다. 알아. 선생님은 다 알······.”
“하지만 당신을 지하에서 끌고 올라온 건 나야. 언젠가 그 빚은 꼭 받을 거라고.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얼굴은 새빨갰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야, 너 역시 어디 아픈 게······.”
라고 말하려던 순간, 아이린은 다시 도망쳐 버렸다.
“갔다가··· 왔다가··· 이제는 또 다시 갔다가··· 도대체 뭐지.”
영문 모를 일이었지만, 곧이어 킴벌리는 납득했다.
‘으음~ 그게 부끄러운 거구나. 그 지하에서 올라올 때, 나한테 했던 말들 때문에~ 그래서 나를 피하는 거구나~’
정신을 잃은 줄 알았겠지만 사실 킴벌리는 다 듣고 있었다.
“녀석. 부끄러워하기는.”
그리고 킴벌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이린과의 회포도 언젠가 풀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킴벌리의 첫 전공 강의.
그는 벌써 그 문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살피고,
머리의 가르마까지 훑은 뒤에···
그는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웅성대는 소리가 문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킴벌리가 꿈꿔왔던 광경이었다.
빙의 이전의 그가 끝내 이루지 못한 꿈.
“와.”
그곳은 사제학부 제1 강의당.
2층에 걸친 학생석에 수십 명의 학생이 그의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더욱 킴벌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눈에 띈 단 한 명의 학생.
‘너는······.’
프루디 위스퍼벨.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세 번째 특별반 학생이었다.
- 작가의말
이번 화는 1장의 에필로그이자 2장의 프롤로그입니다.
앞으로는 15시에 등록할 예정입니다.
개시 시간이 들쭉날쭉하여 혼선을 드린 점 죄송합니다.
같은 시간에 동시 연재하는 새 작품이 있습니다.
'출동! 회빙환 단속반'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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