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강 : 리틀썬과 가시박힌 검 (1)

“미남······?”
“······.”
아이린은 푹 숙인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확실해. 걔가 미남 밝히는 건 예전부터 유명했으니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건지, 진짜 좋아하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만.”
킴벌리는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긴 해요.”
하지만 유진이 수긍해도 킴벌리는 계속 유진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
유진은 킴벌리의 의도를 짐작하고 자길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댔다.
‘누구, 저요? 저보고 하라고요? 진짜로?’
그리고 킴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따른 유진의 반응은 격렬했다.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요. 저는 이제 걔랑 학부도 다르고, 별로 친하지도 않고, 취향도 아니고···! 하여간 안 돼요!”
“아. 한 번만.”
“도대체 뭘 한 번만 해달라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하여튼 안 돼요!”
“아니 내가 훌륭한 미인계 작전이 생각났는데 네 얼굴만 빌려주면 돼!”
“아 진짜 싫어요 다른 사람 시켜요!”
“다른 사람?”
킴벌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린을 남장··· 아니, 내가 뭐라는 거야 잊어다오.”
“···하라면 할게.”
아이린이 말했다.
“걔는 나를 몰라. 아마도. ”
해준다니 참 고마운 소리였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현실성이 없었다.
아이린더러 계속 남장하고 지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니, 농담이었어. 미안하다.”
“······.”
‘다른 누군가를 생각해 내야 할 텐데······.’
그때, 단 한 명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노릭.
그 이름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킴벌리의 머릿속엔 순식간에 프루디 공략의 청사진이 그려졌다.
킴벌리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 깜짝이야. 뭐예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바로 가야겠다!”
“아니 일단 제가 거절하긴 했는데 그래도 린이 남장 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뭐 그렇게 궁하시면 하긴 할게요.”
유진이 그렇게 말했지만, 킴벌리는 손사래를 쳤다.
“됐어. 다른 플랜이 떠올랐다. 세 번째 학생은 우리한테 맡겨, 대신 너희는 네 번째 학생을 찾아줬으면 하는데······.”
“사샤 말이지.”
아이린이 말했다.
“···내가 말 걸어볼게.”
“좋아! 정말 고맙다. 그럼 나는 급하니까 빨리 가볼게!”
그런데 갑자기 아이린이 킴벌리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 숙인 채였다.
“···이거 전부 빚이니까.”
“응? 빚?”
“기억해 두라고.”
“어··· 알았다.”
그러고 나서야 아이린은 킴벌리를 놓아주었다.
킴벌리가 방을 나선 후에, 유진은 아이린에게 물어보았다.
“너 왜 그래 요즘? 방금 빚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또 뭐고.”
“···나중에 부탁해야 할 지도 모르니까.”
“뭐? 부탁? 뭔 소리래?”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고.”
“? 미쳤나 얘가 영문 모를 소리만 해. 제대로 말을 해봐.”
유진이 그렇게 자꾸 묻자 아이린이 드디어 폭발했다.
“···아아앗···! 몰라! 모른다고! 진짜 모르겠단 말이야! 모르겠으니까 이러는 거라고! 망할 유진 바보 포레스터! 유진 쓰레기 포레스터!!!”
아이린은 자신을 다그치는 유진을 퍽퍽 때렸다.
“아악! 아파! 악!”
***
킴벌리가 향한 곳은 검술학부의 대강당.
검술연구회가 연습실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비제의 죽음, 그리고 유진과의 순위전 패배 이후로도 노릭은 계속 검술연구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킴벌리는 살금살금 강당 한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무색하게, 그는 한 학생과 마주치고 말았다.
“······!”
“······!”
그러나 그 학생은 ‘와! 여기에 도살자 교수가 나타났다!’ 같은 말로 주의를 끌지는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키가 킴벌리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어. 그래. 오랜만이구나.”
“비제를 쓰러뜨리고··· 아이린을 구하신 모양이던데요.”
“응. 그랬지.”
“덕분에 우리는 지도교수를 잃었지만요.”
“······.”
킴벌리는 굳었다.
그 모습을 본 키가 쿡쿡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풋···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교수님이 좋은 분이라는 건 이제 노릭한테 들어서 알아요. 지도교수도 다른 분으로 구했고요. ”
‘노릭이 그랬다고? 이렇게 기쁠 데가.’
“어어··· 고맙다.”
“오늘도 노릭을 찾으러 오신 거겠죠?”
키는 금세 킴벌리의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
“그런데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저기···”
그녀는 강당 중심을 가리켰다.
그곳에 세워진 가설 연무대 위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노릭, 그리고 모르는 학생이 마주 서 있었다.
“음. 오늘은 이걸로 해볼까.”
모르는 학생은 단검과 한손검을 한 자루 씩 챙겨 들었다.
그것들은 모두 진검이었다.
노릭이 들고 있는 롱소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살 좀 해주세요. 회장님.”
노릭이 상대하는 건 검술연구회의 회장인 모양이었다.
회장이라니 3학년인 모양인데···
확실히 킴벌리가 아는 인물은 아니었다.
“네가 상대인데 그럴 수는 없지. 지면 회장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닐 거야.”
“하하. 엄살은.”
노릭과 회장은 잡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3보 거리에 마주 섰다.
둘의 자세와 움직임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노릭이야 자주 봤다지만, 회장의 검술은 처음 보는 것인데···
느낌이 묘했다.
“자, 개전!”
하지만 싸움이 시작하자마자 킴벌리는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건··· 아이린의 검술이잖아!?’
쉬이이익-!
회장의 단검이 노릭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손검으로 적을 견제하고, 단검으로 기회를 노린다.
회장의 공세는 명백히 아이린의 기술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노릭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파고들려는 회장의 움직임을 노릭은 몇 번이고 그 춤추는 듯한 검무로 흘려냈다.
연무대 위에 서 있는 것은 노릭과 회장이었지만, 싸우고 있는 것은 비제와 아이린의 검술이었다.
순식간에 수십 합을 겨룬 두 사람은 호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 지쳐 있는 건 노릭이었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번들거렸다.
그때, 회장이 말했다.
“노릭. 왜 기적을 쓰지 않지?”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요.”
“나한테는 괜찮아.”
“이건 다른 누가 아니라 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회장님에겐 괜찮아도, 저에겐 아니에요.”
“하핫, 그래?”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 말에 수긍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어진 힘겨루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질 텐데?”
까앙-!
굉음이 연무장 전체를 후려쳤다.
회장의 한손검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노릭의 일격을 쳐낸 것이었다.
그 한 방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다음 순간에는 회장의 단검이 노릭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회장은 푸근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그렇네요.”
노릭은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였다.
승부가 끝난 후 회장과 노릭은 킴벌리의 존재를 알아챈 듯, 이쪽으로 다가왔다.
먼저 악수를 청한 것은 회장이었다.
“반갑습니다. 킴벌리 교수님. 저는 요한이라고 합니다.”
요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유진과는 2학년 차이가 나니, 원작에서 얼굴을 비추지 못했을 만도 했다.
킴벌리는 요한이 건넨 악수를 받았다.
“그래. 내 소개는 따로 필요 없겠지?”
“물론이죠. 교수님의 명성은 이미 아카데미 안에 자자하니까요.”
“악명이라고 하지 않아 줘서 고맙군.”
“하핫. 아닙니다. 악명이라뇨··· 하지만 확실히, 교수님은 듣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처럼 보이시네요.”
킴벌리는 흠칫했다.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는 감정과 동시에, 속내가 꿰뚫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요한이 갑자기 말했다.
“아기돼지 삼형제가 있었는데, 넷째가 태어나자 전부 죽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엉···?”
“그 순간 아기돼지 사형제가 탄생했기 때문이지요. 하하하.”
“······.”
이해하는 데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요한은 호탕하게 웃었지만, 주변의 반응은 썰렁했다.
“어휴. 회장, 개소리 말고 회장 일이나 봐요.”
“아악. 그러면 노릭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악. 강녕하십시오!”
요한은 키의 등짝 스매시에 떠밀려 강당 저편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킴벌리와 노릭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저를 쓸 곳이 생기셨군요.”
“그래.”
강당에서 나온 두 사람은 잠시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노릭. 너는 프루디라는 학생을 아나?”
“프루디 위스퍼벨 양. 알고 있어요. 후배니까요. 저와는 정반대의 성향이라 꽤 인상적인 아이였죠.”
정반대의 성향. 맞는 말이다.
프루디는 그 행동양식도 기적도 화려하기 짝이 없다.
노릭과는 일만 광년 정도의 거리가 있다.
‘하여간 안다면 훨씬 이야기를 진행하기 쉽지.’
“내가 맡는 이번 전공수업에 그 녀석도 들어 있어. 네가 걔와 페어를 짜줘야겠다.”
“으음.”
“어렵겠나?”
“아뇨.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조금 의외여서요.”
“의외라니?”
“교수님의 첫 의뢰는 조금 다른 일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학생에게는 맡길 수 없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요.”
그건 킴벌리가 예고한 것이었다.
킴벌리가 걸어야 할 핏빛 길.
거기에 노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쓰고 버릴 검이라고도 했다.
정말로 언젠가는 노릭에게 그런 일을 맡겨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킴벌리는 자신이 했던 이야기들을 부정하고 있었다.
노릭도 그의 제자다.
잔혹한 일에만 엮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쓰고 버릴 것처럼 다루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 진심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킴벌리는 다른 구실을 댔다.
“···너는 아직 피를 묻히기에는 너무 무뎌.”
“제 검술이··· 무디다는 말씀인가요.”
“방금, 요한과의 대결에서 너는 패배했지.”
“······.”
“안다. 요한은 3학년이고 검술연구회의 회장이야. 네가 그에게 진 건 자책할 일이 아니야. 하지만,”
킴벌리는 멈춰서서 노릭을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서 싸운 건 너와 요한이 아니었어. 내 말이 틀렸나?”
“···아뇨. 맞는 말씀이에요. 요한 회장은 몇 번 본 적도 없는 드 모리에 양의 검술을 모방해 사용했죠. 저를 손대중 했습니다.”
킴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너 자신으로 임하지 않은 건 너도 마찬가지지. 노릭.”
“···네?”
“그 자리에서 싸운 건 네가 아니야. 비제였다. 네가 쓴 건 비제의 움직임이잖아?”
노릭은 부정하지 못했다.
비제와 노릭의 체형은 비슷하다.
그리고 꽤 긴 시간 사제관계였으니, 노릭의 몸에 비제의 검술은 꽤 익숙해졌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비제는 쓰레기였지만, 어쨌든 소드마스터였어. 그런데 너는 그 움직임을 따라 하며 싸움에 응용하고 있지. 그게 잘 될 턱이 없어.”
“······.”
검술을 비롯한 모든 학문의 기본은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는 것.
하지만 그런 체계적인 발돋움을 건너뛰고 소드마스터인 비제의 움직임을 따라 하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육체의 부하를 유발하지.’
킴벌리는 노릭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 팔목을 붙잡고 소매를 걷었다.
“···교수님!”
새파란 멍이 온 팔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만져진 팔의 감촉도 말이 아니었다.
노릭의 근육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난 검술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네가 아직도 비제의 그림자에 살고 있다는 건 알아.”
“그건······.”
“그게 네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니냐?”
노릭은 그걸 부정하지 못했다.
그는 괴로운 듯했다.
“역시, 교수님께서는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벗어나라. 그래야 너는 더 높은 차원으로 답보할 수 있어.”
그것이 원작 지식과 현재까지의 관찰을 토대로 킴벌리가 낸 결론이었다.
어쩌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킴벌리는 검술에는 문외한이니까.
하지만, 노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는 아직 준비된 검이 아니에요. 비제라는 칼집에서 빠져나오지조차 못했죠.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교수님께서는 저를 부르신 거겠죠?”
“······.”
“제가 해야 할 일이 뭐죠?”
드디어 본론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본론이라는 게···
“···사실, 그게 말이지······.”
“?”
킴벌리는 다음 말을 앞두고 침을 꿀꺽 삼켰다.
“···미인계다.”
- 작가의말
이 부분은 전개가 느려 14시와 16시에 걸쳐 두 편이 올라갑니다.
맛있게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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