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 : 리틀썬과 가시박힌 검 (4)

‘비제는 훌륭한 검사였지만, 노릭에게 있어서. 훌륭한 스승은 아니었어.’
‘당연한 일이지. 비제는 노릭을 제자로서 키운 게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젊음을 연장하기 위한 새로운 옷으로써 키운 거니까.’
그렇기에 지금의 노릭은 하나의 분재와 같았다.
가지를 꺾고, 성장을 억제하고, 형태를 제한했다.
비제의 목적은 단지 노릭이 자신의 대체품에 적합하도록 자신과 비슷하게 ‘조각’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노릭은 비제의 검술을 가지게 되고, 꽤 훌륭한 검사로서 자랐지. 하지만 노릭의 잠재력은 이 정도가 아닐 거야.’
그래서 킴벌리는 비제가 잡고 있던 노릭의 고삐를 놓아준 것이었다.
초원으로 돌아간 한 마리 군마처럼,
새장을 나온 새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게.
이제 노릭은 비제라는 족쇄를 벗어던지고 성장할 수 있게 됐다.
‘비제의 움직임을 따라 할 필요가 없으니 노릭의 검술을 훨씬 다채로움을 지니게 되겠지.’
‘그런데··· 벌써 기적마저 개선해 낼 줄이야.’
비제는 검술에 집착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당연히 노릭의 기적 사용을 억제했을 것이고, 그것이 노릭의 기적이 그토록 약한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킴벌리는 그 점도 지도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노릭은 스스로 자신의 기적을 개선하는 것에 성공했다.
기적을 응용해 프루디의 시야를 교란한 건 그런 성장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난 순수하게 제자의 성장에 기뻐할 수 없지?’
‘도대체 뭐가··· 날 두렵게 하는 거지?’
그 이유를 킴벌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노릭의 성장세는 이렇게나 가파르다.
하지만 그만큼 이른 시일 내에 한계를 맞이하게 되겠지.
킴벌리가 억제하고 있는 노릭의 ‘취향’에 의해서.
‘노릭은 고통을 사랑하는 존재야. 자신의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지. 지금까지는 내가 그걸 막고 있었어. 하지만 노릭이 진정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핏빛 길을 걷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딜레마였다.
노릭의 모든 족쇄를 전부 풀어준다면, 노릭이 어떤 존재가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킴벌리가 노릭을 제어하려 든다면, 노릭을 자신의 통제 아래서 키우려고 했던 비제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킴벌리가 그들에게 주어야 하는 건 자유인가, 통제인가.
아무리 교사라는 게 통제와 방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라지만, 그의 내면은 고작 초짜 교사 지망생에 불과했다.
‘모르겠어··· 내 뜻대로 아이들을 움직이는 게 옳은 건지.’
킴벌리는 자신이 두려웠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어 가는 그 과정이 두려웠다.
‘노릭······.’
킴벌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멀리 있는 노릭을 건너다보았다.
한편 노릭도 그런 킴벌리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교수님.”
킴벌리는 노릭에게 이상한 존재였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진정으로 마음이 따뜻한, 몇 안 되는 사람.
그건 비제를 둘러싼 사건에서도 느꼈던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킴벌리는 그를 걱정해 주었고, 조언해 주었고, 또 구해주었다.
어쩌면, 삶의 의미마저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노릭 역시 킴벌리를 두려워하며, 또한 그에게 매혹되고 있었다.
‘교수님은 혜성처럼 한 순간에 나타나셨죠.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모든 아카데미인의 마음을 빼앗았어요.’
‘그건 물론 교수님의 다정함 때문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모두를 매료하는 그 능력이, 모든 것이 교수님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하는 그 힘이 저는 무섭습니다.’
킴벌리는 라반을 도살해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비제를 제거해 자신의 악명을 모두에게 되새겼다.
그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강자는 탄생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노릭은 이제 알게 됐다.
킴벌리가 등장한 이후로 발생한 모든 이변은 그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고,
라반과 비제의 죽음은 그의 진정한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킴벌리가 꾸민 일들은 교묘하게 운명을 바꾸었다.
‘그렇게 유진이 나를 이기게 했고, 아이린을 구했고, 나를 손에 넣어서 이제는 프루디를 굴복시키려 해.’
그건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모든 관련 인물의 성격, 그로 인한 변인, 다른 이들은 모르는 잠재된 변수.
킴벌리는 모든 걸 파악했다.
그러니 킴벌리와 같은 시야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의 손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말이야.’
노릭은 자신이 쓰러뜨린 프루디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럴 리가 없어. 다음엔 다를 거야. 이번엔 연극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방심했을 뿐. 얼마든지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하지만 노릭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프루디가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그것은 프루디의 의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모든 건 킴벌리의 계획이었다.
설령 킴벌리가 다른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한들, 프루디는 킴벌리가 짠 판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일 뿐이었으리라.
유진, 아이린, 노릭과 마찬가지로···
‘교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까지 보고 계신 거죠? 어쩌면 교수님에 대한 이 두려움과··· 선망마저도 계획의 일부인가요?’
하지만 그렇게 물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킴벌리의 계획을 이행해야 할 때였다.
노릭은 프루디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프루디는 그 손을 그냥 쳐내버렸다.
“됐어요.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그래?”
프루디는 툭툭 털고 일어났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연무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연무대 아래서는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루디가 졌잖아···”
“···노릭 저 녀석 약한 거 아니었어? 이번에는 꽤···”
“···아니, 리틀썬이 약해진 거겠지···”
그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프루디를 찔렀다.
지금껏 프루디를 즐겁게 해주던 그 관심이 지금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는 잇따른 패배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붙잡아 줄 수 있는 건 노릭뿐이었다.
“프루디.”
“······.”
“상심하지 말라는 말 같은 건 할 생각 없어.”
“······.”
“넌 네가 강하다고 믿었겠지.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강한 자는 화려한 기적을 쓰는 자가 아니라, 연무대 위에서 이긴 자야.”
“그러니까 선배가 나보다 세다··· 그런 소리라도 하고 싶은 거?”
프루디의 충혈된 눈동자가 노릭을 째려보았다.
노릭은 그런 프루디를 비웃으며 일갈했다.
“알긴 아는구나. 그래. 그 건방진 리틀썬은··· 페어 기피 1순위였던 떨거지 노릭 빈프리드보다도 약해.”
“다시 해! 너 같은 건··· 너 따위는···!”
프루디는 노릭의 면전에 삿대질하며 외쳤다.
그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고, 그녀의 털은 곤두서 있었으며, 그녀의 눈동자는 불타고 있었다.
그러고도 발산되지 못한 노기가 전류가 되어 주변을 그을렸다.
하지만 노릭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래. 원한다면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밟아줄게. 프루디 셰퍼드 위스퍼벨. 천 번, 만 번 싸워도. 넌 날 이기지 못할 거야.”
“너어······!”
“인정할게. 네가 지닌 힘의 크기는 분명 막대해. 하지만 넌 너의 한계도 모르고, 적에 관해서도 몰라. 그런데 누굴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거지?”
“이겨왔어! 얼마든지 이겨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렇게 따낸 이명이야. 리틀썬이라고. 지상에 임한 태양이야!”
이제 프루디는 체면도 뭣도 잊은 채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그건 투정처럼 보였다.
“애처럼 굴지 마. 아직도 네가 예과에서 하던 소꿉놀이가 그냥 통할 거라고 생각해? 날 포함해서 여기 있는 애들 다 똑같이 너처럼 약자를 짓밟고 처절하게 기어 올라온 녀석들이야.”
노릭의 말에 연무대 밑의 학생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건방지게 강한 체나 하고 있으면 네가 다음 약자가 될 텐데?”
“······.”
프루디는 더이상 노릭의 말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자신 안의 분노를 억누르는 것도 역부족이었다.
단 한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 자리의 모두를 벼락으로 지져버리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프루디는 그냥 자리를 피해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패배와 추태는 이미 모두의 인상에 깊게 남아, 이후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
바로 그날, 수업이 끝난 뒤부터 프루디의 유명세는 더욱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하지만 당연히도, 그 유명세의 의미는 질 나쁜 것이었다.
“···하 그 약골 2학년한테도 졌다며? 리틀썬도 갈 데까지 갔네···”
“···리틀썬? 웃기고 있네. 별명 바꾸라고 해. 뭔가 더 멍청한 별명 없냐?···”
“···쟤 예비 폐기물이잖아. 자기는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고 우쭐대더니···”
조롱의 목소리는 연무장을 떠나서도 이어졌다.
물론 프루디를 옹호하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닥쳐봐! 애가 울상인데···”
“···괜찮아. 프루디···”
“···그래, 뭐 운이 안 좋은 하루도 있는 거지···”
그녀의 친구들은 열심히 프루디를 위로해 주었다.
프루디는 애써 자신을 신경 써주는 친구들에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 위로가 프루디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를 위로해? 너희 같은 게? 나를···?’
친구라고는 했지만, 프루디는 그들을 자신과 대등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돌봐주고, 관심을 나눠주고, 사랑해 줘야 하는 존재.
그녀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태양을 필요로 하듯이.
하지만 지금 그 관계는 역전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프루디를 위로했고, 품고 보듬어 주려 했다.
그건 프루디의 우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는 태양이야. 나는 홀로 오롯이 존재해. 다른 누군가의 빛도, 양분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냥 날 우러러보란 말이야! 도대체 어째서······.’
단 두 번의 패배일 뿐이었다.
그것으로 프루디는 여기까지 추락했다.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난 3년간 줄곧 리틀썬이라는 영광된 존재로서 자신을 증명해 왔다.
그게 단 하루 동안 일어난 패배로 모조리 무너지게 할 수는 없다!
“···안 되겠어.”
프루디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섰다.
친구들은 당황하며 갑자기 일어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렇게 날 계속 올려다보게 해줄게.’
“프루디···?”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친구들이 프루디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친구들의 손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햇살처럼 미소 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나 잠깐 해야 할 게 생겨서, 가야겠어. 다음 수업 때 보자!”
프루디의 미소는 완벽했다.
활기차게 뛰어가는 뒷모습도, 역시 완벽했다.
침울해 있어야 할 그녀가 그런 식으로 구는 건 친구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루디는 그렇게 했다.
‘누가 뭐라든 나는 완벽한 존재여야 하니까!’
그녀는 연습장으로 뛰어갔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뛰어넘기 위해서.
그 순간 프루디 위스퍼벨이라는 호수의 저 밑바닥에서, 작은 씨앗 하나가 싹을 틔웠다.
킴벌리와 노릭이 심은 씨앗.
그것은 벌써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수면을 향해 뻗고 있었고,
얼마 안 가 호수가 비추는 구름의 저편까지 가닿을 것이다.
킴벌리는 그 씨앗의 성장을 예고하고, 또 이렇게 이름 붙였다.
승부욕.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