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한 여름밤의 꿈 (3)

「투닥투닥!」
슈리는 어제 놀아주지 않은 댓가를 치루라는 듯이 미영의 얼굴을 향해 냥냥펀치를 날렸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 방을 비춘 햇살때문인지 고양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영은 감은 눈을 떳다.
“우리 뚱냥이 엄마 보고 시퍼쪄요?”
화풀이를 하는 슈리의 앞발을 잡고 하얀 똥배를 향해 얼굴을 비벼대던 미영은 어제 겪은 충격적인 기억이 떠오르자 거칠게 커튼을 닫았다.
언제나처럼 청소가 필요해보이는 방. 멀리 도망가 아랫도리를 그루밍하는 고양이.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평소와 다를바가 없었지만 검은 명함과 저장된 전화번호가 미영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 몰라!!!··· 아무것도 하기싫어!”
하루정도는 괜찮겠지··· 미영은 오늘 침대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녀의 자취방에서 멀지않은 어두운 뒷 골목.
검은 코트의 남자는 쓰레기통옆에 무엇인가를 발로 밟으며 으깨는 중이었다.
구름한점 없는 맑은 날이었으나 다닥다닥 붙은 건물사이의 골목은 여전히 어두워 마치 남자의 코트가 주변으로 퍼져 나간 것 처럼 느껴졌다.
「끼에에에···」
소리가 잦아들고 비릿한 무언가가 그의 옆으로 흘러내렸다.
신발을 털어낸 남자는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반대쪽 벽을 향해 발을 문질렀다.
“열하나···”
그가 발에 묻어 있던 것들을 닦아낸 후 골목을 떠나려 할 무렵.
「크르르르르···」
열심히 닦은 군화의 위로 끈적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자 개의 대가리를 한 괴물이 이빨을 드러내며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 발톱을 박아넣은 짐승은 아래를 향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했다. 남자의 신발을 새로 더럽힌게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열둘···”
「캬아아아앙!」
괴물이 엄청난 속도로 남자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
과거 백조생활을 떠올리며 하루를 충실히(?) 보낸 미영은 다음날 아침, 냉장고를 열면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하루역시 어제와 같으리라··· 라는 마음을 품었던 것도 잠시. 미영의 휴식을 빛내줄 일용할 양식이 부족했다.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이 다 떨어졌다··· 여름에 그거없이 어떻게 하루종일 드라마를 보냐고.’
결국 미영은 자취방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편한 복장으로 모자를 쓴채 터벅터벅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으로 가는길. 거리를 걷는 미영의 생각은 온통 어제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 여름 대한민국의 햇살은 뜨거웠으나 우울해진 그녀의 마음을 데우지는 못했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던 신내림 이라는 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걸까? 회사는 어떻게 다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암울한 상상만 한가득 떠올랐기에 결국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르.」
‘받지마라··· 받지마··· 차라리 받지마··· 제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퇴마 사무소 이영입니다.”
‘시팔!’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듣고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놓이게 하는 정중한 대답. 약간 나이가 있어보이는 남성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가벼우면서도 듣기 편했다.
마치 예전 대학수업때 학생들을 모두 잠들게 했던 조금 연세가 있는 교양 과목 교수님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이전에 그녀를 기절하게 만든 싸가지없고 딱딱한 톤이 아니었다.
「뚝」
너무나도 다른 괴리감에 당황해버린 미영은 전화를 끊은 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오··· 정신차려 그냥 목소리잖아!!!’
머리는 별거 아니라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 한여름이었지만 솜털이 곤두섯고 핸드폰을 쥔 손은 사정없이 떨렸다.
그녀는 불안감을 달래줄 묘약을 찾기 위해 달렸다. 눈앞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평일 오후 아무도 없는 놀이터.
미영은 그늘진 나무옆의 벤치에 앉았다. 입에는 메론 맛의 아이스크림을 문채로.
‘하··· 나 원래 이렇게 겁쟁이가 아닌데 왜이러지. 자꾸 걸을때마다 소름이 쫙쫙 돋는게··· 하아···’
‘다시··· 전화할까? 뭐라고하지? 그 검은코트 입은 미친놈 아세요?’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입을 적시자 미영의 두려움도 조금 가시는 듯 했다. 그녀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냥 있었다.
[쭈뼛!]
갑자기 주차장에서 느꼈던 그 불길한 감각이 미영을 관통했다.
무엇인가가 나를 향해 달려들때 느꼈던 그것.
소름돋는 공포감에 짓눌려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 느낀 그녀는 휴대폰의 통화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 순간.
「저벅.저벅」
묵직한 발소리. 검은 코트의 남자가 눈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미영이 백화점에서 본 그모습 그대로.
한여름 무더위가 아이스크림을 녹이며 그녀의 손을 적셨다. 하지만 미영은 남자가 지척에 다가올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때문인지 아니면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항복인지 알수가 없었다.
「털썩!」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은 코트의 남자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미영은 돌이 된듯 꼿꼿하게 굳은 채였다.
“맛있냐?”
미영을 기절하게 만들었던 싸가지없는 목소리.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지만 뭐라 대꾸해야하는지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 씨벌.”
놀이터의 입구로 처음보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분명 미영과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백화점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직원이나 손님들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무표정으로 둘을 향해 포위하듯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미영을 소름끼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두려움. 그것은 익히 격어알던 그 감정이였다.
‘이 남자때문이 아니었다고···!!??’
미영의 시선이 옆에 앉은 그에게 미치자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작은 명함이었지만 이전에 받았던 것과는 달랐다.
아무 배경도 없는 명함에는 붉은 글씨의 전화번호 하나만이 적혀 있었다. 반대쪽에는 날개와 바퀴 그림 그것이 끝이였다.
“집에 뛰어가서 짐싸고 글로 전화해. 빨리, 시간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손목을 풀면서 군중을 향해 걸어갔다.
“간보지 말고 한꺼번에 좀 와라. 거기 할매? 니가 대장이지?”
「끼에에에엑!」 / 「크랴랴랴략!」
놀이터는 순식간에 괴성으로 가득찼다.
미영의 눈에는 남자를 둘러싼 사람들이 희미한 안개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짐승의 울음소리와 안개가 퍼질수록 그녀의 마음속 참고 있었던 공포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곳을 벗어나야했다. 지금 당장!
「투카앙!」 / 「탕!」
총인지 대포소리인지 모를 것들이 놀이터에서 울려 퍼졌다.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미영은 자취방을 향해 내달렸다.
「삑삑삑삐~ 띠링.」 「삑삑삑삐~ 띠링.」
떨리는 손은 잊어버릴리 없는 비밀번호 하나 누르는것도 힘들게 만들었다.
숨을 가다듬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의 눈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대문 앞에 붙어있는 작은 사각형의 무언가.
마치 부적처럼 보이는 그것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비빈 미영은 자세하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다시 본 대문 앞에는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오늘 겪는 이상한일이 이거 한가지뿐이랴. 급한것은 대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최대한 신중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삑삐~ 띠리리리.」
미영은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캐리어에 짐을 쑤셔 담았다.
속옷과 옷들 그리고 신발 몇개. 더이상 담을게 떠오르지 않을때 제일먼저 챙겨야했던것이 생각났다.
「매오옹~」
엄마의 행동거지에 겁을먹은 슈리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동장을 꺼내온 미영은 슈리를 달래가며 꺼내려했지만 평소에도 병원이라면 극혐하던 고양이가 말을 들을리가 없었다.
“제발··· 슈리아 제발 엄마가 빌게 빨리 시간없어··· 제발···”
시간은 촉박했고 마음은 급했다. 하지만 8년을 함께지낸 가족을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는 그녀에게 없었다.
미영은 슈리가 제일 좋아하는 마른간식을 꺼내 이동장에 쑤셔 넣었다. 향긋한 냄새가 유혹하기 시작하자 조금 앞으로 앞발을 내민 그 순간.
「덜커덩!」
무슨 힘이 솓았는지 미영은 침대를 들어 뒤집어 버렸고, 그대로 놀란 슈리를 간식과 함께 이동장으로 밀어 넣었다.
침대가 더블 사이즈라는 것과 위에 놓인 잡다한 장식품의 무게까지 감안하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녀는 그런걸 인식할 여유조차 없이 방을 뛰쳐 나왔다.
미영은 무작정 큰거리를 향해 내달리며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뚜르르르.」
“엔젤 윙입니다.”
“헉.! 헉.! 여기 명함으로 전화하면 데리러올거라고..!”
“네 잠시만요. ······. 확인되었습니다 고객님. 기사분을 보내드리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네! 헉! 빨ㄹ.. 빨리요!”
“정면으로 이동하시면 사거리가 나오시죠? 거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저희 서비스를 이용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고객님. 좋은하루 되세요.”
친절한 안내원의 설명대로 미영은 사거리를 향해 달렸다. 동의한적도 없는데 어떻게 위치추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상황에서는 차라리 감사할만한 일이었다.
사거리에 도착한 그녀는 지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게도 평일 낯 사거리의 도로에는 아무 사람도 차량도 없었다. 승차감이 형편없었는지 슈리의 짜증난 매옹거림만이 그녀가 들을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빵빵!」
휑한 도로의 반대편에서 검은 택시가 나타났다. 미영이 손을 흔들자 택시는 깜빡이를 키면서 다가왔다.
「캬르르르르..」
놀이터에서 들은 불길한 소리.
미영이 뒤를 돌아보자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침을 흘리며 괴상한 소리를 내는 어르신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살짝 고개를 돌린 머리가 무표정과 더해져 기괴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탁탁탁탁!!!!」
정신이 나간것 같아 보이는 할머니가 갑자기 미영을 향해 전력질주 했다.
여전히 변함없는 서늘한 표정, 젊은이 못지 않은 자세로 뛰는 할머니는 순식간에 달려와 그녀의 머리를 잡아채려 손을 뻗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에 미영이 질끈 눈을 감아버린 그때.
「콰앙!」
할머니는 무언가에 치여 날아가 꽃집 정문을 부수며 처박혔다. 박살난채 휘날리는 장미꽃들이 급박한 상황에 모순을 더해주고 있었다.
「덜컥.」
멋들어진 정복과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택시에서 내리며 말했다.
“저런건 보험이안되는데··· 타세요. 택시 부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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