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깨진 거울 (3)

방금전까지 기절해있었던 미영은 역전된 상황에 자신감이 생겼다.
만약 하늘에서 떨어진 강탈자의 원래 모습을 직접 보았다면 절대 그렇지 못했을 테지만 그녀의 눈은 달라진 두 민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곧바로 미영은 쓰러진 민수가 들고 있던 총을 겨누며 재혁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장님 신호만 주세요! 제가 뒤에 있으니까!”
분신도 아닌 상급 악마를 향해 고작 권총따위를 내미는 그녀의 용기가 대단하다 여겨질만 했지만 저대로라면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될께 뻔했다.
재혁은 손짓을 하며 저리 꺼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야 그냥 저기 짜져있어. 총도 못쏘는 사람이 뭔 삽질을 하려고.”
사장님의 팩트 폭력에 마음이 꺾인 미영은 쭈그린 표정으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사실 이해못할 태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정도 거리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맞출 자신은 없었으니까.
“소년의 영혼 반쪽이 위험해질텐데 그걸 원하시는 겁니까?”
“X까고 어차피 니가 여기서 튀면 없어질 반쪽이야. 한동안 역겨운 얼굴 안보면 나야 좋지.”
민수의 얼굴을 한 강탈자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곤 겨우 깨어나 고개를 든 진짜를 향해 물었다.
“틀린말은 아니군요··· 그렇다면 정민수씨. 나머지 반쪽까지 거래하시겠습니까? 완벽한 탈출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저들과 만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난 어떻게 해? 내 영혼은?”
“이미 판매된 상품에 대해서 답할 필요는 없겠네요. 전 단지 제안을 할 뿐 받아들이고 말고는 민수씨의 마음입니다.”
민수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재혁을 향해 물었다.
“진짜··· 저 사람 이름이 강탈자에요?”
‘저 사람’ 이라니··· 재혁은 아직까지도 순진한 민수의 질문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건지 아니면 아직 너무 어려 사태파악을 못하는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속삭이는 자, 뱀의 혀를 가진 악마 등 뭐 다른이름도 많을껄?”
“한가지는 확실하지. 저놈이랑 거래하면 밑천까지 다 털리는게 보통이거든. 괜히 강탈자라 불리는게 아니라고?”
이제서야 진실을 알게된 민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강탈자를 노려보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중하고 신사적인 척을 하며 거짓말로 그를 속인 존재를 나만의 친구라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나 답답하고 멍청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거절한다. 난 영혼없는 껍데기가 되고 싶지 않아! 네가 실패하면 내것을 내놔야 할꺼야!!”
강탈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순간 그가 차지한 민수의 눈이 파충류의 것처럼 갈라졌다. 게다가 혀는 뱀의 것처럼 늘어나 입술을 핥고 있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하는 수 없군요.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기도 자존심이 상하니···”
「스스스스···」
검은 안개가 강탈자의 뒤로부터 새어나오며 주변을 잠식했다.
그것은 단지 어두운 것 뿐만 아니라 불길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어 닿는 순간 험악한 일을 당할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 니들이 뭐 그렇지. 사실 기대도 안했다.”
전투를 예상하는 재혁의 말과는 반대로 손에 쥐고 있던 대검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의 묵주 하나만이 빈손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강탈자의 표정은 별로 기쁘지 않은 듯 일그러졌다.
“그 묵주··· 오랜만이군요. 그걸 무기로 쓰는 존재는 재혁님 뿐일 겁니다.”
사람 키만한 대검보다 고작 묵주 하나를 더 경계하는 강탈자의 모습. 잔뜩 경계하는 악마 때문에 기뻐보이는 재혁이었다.
“왜? 아픈기억이 떠올라? 악마한테도 PTSD가 오나보네. 같이 추억에 빠져 보자고.”
「슈슈슉!!」
대꾸도 없이 앞으로 달려나간 강탈자가 촉수로 변한 오른팔을 휘둘렀다. 빨판으로 보이는 겉에는 가시같은 이빨이 한가득이라 스치기만해도 살점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뻐억!」
몸을 뒤로 젖히며 촉수를 피한 재혁은 그대로 발을 뻗어 강탈자의 복부를 걷어 찼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악마는 수많은 촉수로 갈라진 왼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붙잡고, 부수려 했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강탈자의 왼 어깨가 얼마나 많은 힘이 실렸는지 짐작케 했다.
「치이익」
빛나는 묵주가 재혁의 손에 들린 채 휘둘러졌다.
채찍과 같은 형태로 악마의 목을 향해 쏟아지는 십자가는 이빨달린 촉수에 비해서는 초라해 보였지만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었다.
붙잡은 다리를 놓고 급하게 몸을 뺀 강탈자의 모습. 살짝 스친 목에는 불에 그을린듯한 상처가 남았고 살이타는 소리가 났다.
장난처럼 묵주를 빙빙 돌리는 재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드러난 악마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있던 미영과 민수는 말도 안되는 싸움에 놀라 그저 바라보며 서있었다.
「사아아아···」
목에 난 상처를 혓바닥으로 핥는 강탈자의 모습은 괴물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수많은 촉수들이 어둠속으로 뿌리내리는 기괴한 광경은 뭐라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어둠이 체육관을 가득 채우고, 사방에서 울려는 꿈틀거리는 소리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재혁을 제외한 둘은 공포심에 짖눌려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암흑속에서 홀로 빛나는 작은 묵주.
검은 코트의 남자는 사라지고 빛을 감싼 손만 보일 정도로 악의 가득한 어둠이었다.
「쑤우우욱」
재혁의 근처 어둠속에서 각기 다른 민수가 촉수를 품은채 솟아 올랐다.
미묘하게 다른 모습의 괴물들은 더이상 민수라고 부르기 어려웠지만 그들이 걷는 방향은 모두 같았다.
어둠속 유일한 빛. 묵주를 쥔 재혁이 있는 곳이었다.
그 순간, 체육관을 비추던 유일한 빛이 꺼지고 오직 암흑만이 세상을 감쌌다. 그러나 재혁을 향한 괴물들의 공격은 오히려 빠르고 거세져 몸에 닿기 일보직전이었다.
「푸드득」 / 「콰아아앙!」
수십가닥의 날카로운 촉수가 재혁이 있던 자리를 덥쳤지만 남은 것은 어둠에 파뭍힌 새의 깃털뿐. 목적을 잃은 괴물들은 서로 꼬인 팔을 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깜깜한건 나도 익숙하거든.”
「뻐어억!」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커다란 빛에 잠시 눈이 먼 강탈자는 재혁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
악마의 얼굴에 새겨진 둥근 상처들은 신성한 묵주에 의한 것이었으나 너무나도 파괴적이라 마치 산탄총에 맞은 것만 같았다.
다급해진 상황을 반영하듯 암흑속에서 셀수도 없이 많은 촉수들이 재혁을 향해 화살처럼 파고들었다.
가만히 있었다간 산채로 꼬치구이가 될정도로 위험해 보였으나 한번의 타격 이후 움직이지 않는 재혁은 공격을 예상한걸 넘어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푸드득」
다시한번 들려오는 새의 날개짓 소리.
강탈자 역시 대비하고 있었기에 날카로운 이빨을 등뒤로 휘둘렀다. 민수의 얼굴을 한 악마의 표정에선 두번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까지 느껴졌다.
「투콰아아앙!」
촉수에 달린 거대한 송곳니가 두꺼운 코트를 두부자르듯 짖눌러 버렸다. 그의 코트가 그저 평범한 옷에 불과했던지 아니면 악마의 힘이 너무 강한건지 알수는 없었지만 만약 저지경이 되고도 멀쩡히 일어선다면 재혁또한 사람이라 부르기는 어려우리라.
「찌이이익!」
바닥을 관통한 강탈자의 촉수가 거칠게 재혁의 옷을 반으로 찢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저 가죽쪼가리뿐, 피도 살점도 없었다.
「부우웅!」
강탈자는 자신의 등 뒤로 몰아치는 거친 바람을 느꼈다.
뒤돌 시간조차 사치라 생각한 악마는 교복의 상의를 찢으며 등으로 촉수를 쏘아냈다. 고슴도치가 잔뜩 가시를 세운것처럼 악마의 뒷모습도 비슷하게 변했다.
재혁이 묵주를 감싼 주먹을 뻗는다해도 촉수로 가려진 본체까지는 해하지 못할거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악마의 뒤를 덮치는건 주먹도 묵주도 아니었다.
「콰아앙!」
재혁은 대검의 검면으로 강탈자의 등을 내리쳤다.
검대한 검에 깔린 악마는 그대로 바닥에 눌려버렸고 사방으로 조각난 촉수들 때문에 압착기에 던져진 오징어 마냥 흉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어느샌가 대검은 사라지고 무너진 강탈자의 위로 재혁이 올라섰다.
바닥과 한몸이 되어버린듯한 뒤통수를 뽑아낸 그는 그대로 악마의 목을 꺾어 하늘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기괴한 모습으로 제압당한 강탈자는 여전히 살벌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옛 생각이 나게 해주지.”
「쾅! 쾅! 쾅! 쾅!...」
재혁의 주먹이 악마의 머리를 강타할 때마다 체육관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듯 흔들렸고 칠흑같던 어둠역시 조금씩 밝아졌다.
마침내 미영과 민수도 무자비한 폭력을 쏟아내는 재혁을 찾아낼수 있었다. 어둠도, 촉수도 사라진 지금 누가 악마고 누가 사람인지 구별하기 힘들정도였다.
“끼..끼끼끼끼끽···킥!”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강탈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음성은 다름아닌 웃음이었다.
소름끼치는 악마의 웃음소리는 한참동안이나 주먹질을 당하는 와중에도 멈출줄을 몰랐다.
잠시 후 재혁은 짜부러진 강탈자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들리는 웃음은 입을 막아버리고 싶을정도로 거슬렸으나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무너진 얼굴에 입이라곤 보이지 않았으니 강제로 막을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재혁님. 저는 절대 손해를 보지 않아요.”
강탈자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쳐났고 재혁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찢어진 코트만 휘적거렸다. 승자와 패자가 확실해 보이는데도 그의 모습은 전혀 이긴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만 마무리를 지으시죠. 오랫만에 뵈서 즐거웠습니다 문지기님.”
주변에 다 들릴 정도로 깊은 한숨을 쉰 재혁은 걸레가된 코트를 던져버리고 강탈자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는 대검이 들려있었다.
“예언이 시작되었습니다. 곧 다시뵙죠.”
「뿌드드득」
재혁의 검이 강탈자의 몸을 꿰뚫고 바닥을 헤집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악마의 마지막은 신비했지만 그걸보는 재혁의 표정은 빈말로라도 전혀 좋아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자기 할말만 하고 떠나버린 강탈자의 흔적을 노려본채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끄으으으···.!!”
갑자기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느낀 민수는 숨을 헐떡이며 그자리에 쓰러졌다.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재혁, 손에는 여전히 검이 들려있었다.
미영은 자신을 창고로 날려버린 사람이 누군지 알면서도 후배를 감싸기 위해 달려갔다.
“누나··· 너무.. 너무 아파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민수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었다. 미영은 혹시나 몰라 자신이 쏜 흔적을 살펴보았으나 소년의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사장님··· 도와주세요···”
아무것도 할수없었던 미영은 재혁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미 민수의 영혼 반쪽은 악마에게 넘어가버린 상황.
두 사람 모두 민수가 겪은 끔찍한 일에대해 알게됐고, 안타까워 했으나 재혁의 힘으로도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는··· 이제 죽나요···?”
재혁은 마지막을 직감하는 민수를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차갑고 인간미없는 무표정에 미영은 화가나고 답답할 지경이었다.
“아니 넌 안죽어. 다시 시작할 뿐.”
“다시··· 그럼 쟤들을 또 만나야하는 거에요···?”
“그럴리가. 기회는 너뿐이야 저것들은 다 지옥으로 갈꺼다.”
그제서야 미소짓는 두 사람.
미영은 이 상황에서 웃는 둘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삶보다 더 귀한 가치가 어디있겠는가? 해야할일을 마쳤다는듯 후련해보이는 민수가 불쌍할 뿐이었다.
“하지만 기회일 뿐이야. 네가 판 반쪽때문에 영원히 자신과 싸워야 할꺼다.”
“누나랑 아저씨를 먼저 만났다면··· 저도 달라졌을까요···?”
“다시 보게 될꺼야. 영원한건 너만이 아니니까.”
고통에 일그러졌던 민수의 표정은 어느샌가 평온하게 바뀌어 있었고 미영은 계속해서 소년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은 세사람 모두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재혁은 왼손 중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민수에게 끼웠다.
여려겹의 끈을 감아 놓은것 같아 보이는 모양의 반지는 주인의 손에선 검은색이었으나 민수에게 끼워지자 붉은색으로 빛났다.
“즐거운 상상을 해. 긴 여행이 될꺼다.”
“엄마··· 엄마가 보고싶어요···”
「화아아아」
눈부신 빛이 민수의 몸을 감쌋고 잠시 후에 남은것은 주인 잃은 반지 뿐이었다.
체육관 어디에도 소년이 있었다는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파괴의 흔적도, 핏자국도 모두 사라져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진 것처럼 느껴졌다.
“흐··· 흐어어어엉··· 흐으어어엉···”
그제서야 미영은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후배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서러움, 조금만 더 빨리 왔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마음을 아프게했다.
반지를 끌어 안은 그녀는 한참동안 혼자 떠난 민수의 마지막을 눈물로 배웅했다.
「드르르륵」
학교가 원래대로 돌아왔는지 체육관의 문이 열리며 풍성한 흰 수염의 외국인이 나타났다.
평범한 양복을 입은 푸른눈의 노인은 재혁에게 작게 목례한 후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의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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