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수 씨의 어느 날

어느덧 시계 앞자리에 표시된 숫자가 23이 되어 있다.
하루가 끝나 가고 있다는 말이다.
드러누워서 웹소설 페이지 넘기고 있기에 최적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런 걸 써제끼면서도 돈벌고 밥먹고 사네"
문장만 놓고 보면 약간의 불쾌감까지 느껴질 법한 냉소적인 대사이긴 한데... 올해 서른 일곱살 이언수 씨는 나름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스크롤을 내리면서 한 말이다. 누군가 옆에서 보고 있었다면 어이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안 있어 스크롤 내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연재 분량이 끝난 듯하다.
"다음화 결제를 해 말어"
곁눈질로 시계를 살짝 보니 23뒤에 붙은 숫자가 50에 가까워져 있다.
그걸 본 언수 씨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시키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오늘은 이만 자자, 하는 생각을 실천한 셈이다.
내일을 생각하니 또 기분이 나빠져 온다. 그런데도 눈을 감으니 엄습해 오는 피로가 불쾌감을 순식간에 덮어 버린다.
언수 씨는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렸다.
"개자식들"
이것은 마무리 멘트였다. 생략된 앞부분에는 장황한 육두문자들이 늘어서 있지만 굳이 두 번 상기할 만큼 큰 의미가 있는 말들은 아니었고 언수 씨는 개자식들, 을 마무리로 입을 깔끔하게 다물고는 남은 귀갓길을 주행하는데 집중했지만 머릿 속에는 계속해서 오늘의 일들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언수 씨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왜 그래요 또"
"진짜 그건 아닌데요. 나중에 문제 생긴다니깐. 아무튼 내가 아는 대로 할게요."
"미치겠네 매번"
내가 꽉 막힌 건 아닌가 싶다가도 다시 조목조목 따져보면 역시 이게 맞다. 그런데 이놈들은 뭐든지 대충대충 설렁설렁.
늘 이런 식이니 많은 사람이 언수 씨를 멀리한다. 퇴근 후에 자연스럽게 한 잔 권유할 사람도 생기질 않는다.
"개자식들"
그리고선 어제 잠들기 전에 잠깐 했던 고민에 대한 결정이 났다.
다음화가 궁금하다. 결제 해야지.
안쓰럽게도 언수 씨는 다음화 분량을 보고 기분이 언짢아졌다.
"아니나다를까 또 이런 전개로 가네"
결제한 분량의 전개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다음화에 대한 미련이 자연스럽게 사라진 언수 씨는 웹소설 페이지를 종료하고 시간 죽일 때 사용하는 두번째 방법을 꺼내들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필터링 거치지 않은 자기 생각을 쏟아내는 것.
여기서는 내 욕에 맞장구 쳐주는 녀석도 많고 그 반대인 녀석도 많다. 그런 일들이 실시간으로 일어난다. 어지간한 웹소설이나 게임보다 더 재밌다. 도무지 끊을 수가 없다.
"요즘 작가놈들은 죄다 돈미새들이야"
"쟤는 왜 또 화가 잔뜩 났냐"
"틀린 말은 아니지"
"네놈이 작가들 다 먹여살리는 것도 아닌 주제에 틀린 말은 무슨"
"니 윗글에 올라온 야짤이나 봐라"
"윗놈 개같은놈아 귀신짤이잖아 죽고싶냐"
늘 그렇듯 바로 진흙탕이 되어 버린다. 한심한 놈들. 그리고 한심한 나.
언수 씨는 이어서 다른 녀석이 싸질러 놓은 필터링 거치지 않은 글들을 찾아 나섰다.
"이 글을 클릭하면 이세계로 보내드립니다"
또 시작이로구나 이 자식. 어라 어째서 나 눈물이? 이거 달아주면 되는 거겠지. 적당히 맞장구 쳐 줄 생각이었던 언수 씨였다.
제일 먼저 느껴진 감각은 그윽한 시골의 복합적인 향기.
정겹고도 구릿한 익숙한 시골의 향기. 이상하다 방구석에서 왜 이런 냄새가 나지. 이유는 1초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방구석이 아니라 시골에 있었으니까.
당장 눈앞에 축사가 있고 맨송맨송한 들판이 있고 후줄그레한 사람 몇 명이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걸어다니고 있으니, 어떻게 봐도 시골이다.
언수 씨는 불과 십여 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걸 읽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황 판단이 빨랐던 건 다행이었다.
저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 그리고 건물들의 모양새.
확신을 해 버린 것은 좀 더 먼 쪽에 있던 건물의 팻말에 걸려 있는 INN 이라는 글자였다.
나는 이세계에 떨어진거구나. 여기 판타지 세계구나. 낚시글이 진짜였다니. 이거 꿈 치고는 꽤나 생생하구만. 여러 생각들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간결했다.
"말도 안 돼"
등에서 식은 땀 한 줄기가 흘렀다. 진정하자구 이언수. 이게 뭔 상황인지 침착하게 짚어보자. 그래 제일 가능성 높은건 난 인터넷에서 낚시글 클릭하다가 피곤해서 곯아떨어져 버린 거야. 이건 대단히 선명한 꿈속인거고 적당히 판타지 세계를 만끽하다 보면 잠이 깰거고 현실세계로 돌아가겠지. 임시방편으로 결론을 내리자 언수 씨는 약간 진정이 된 듯했다.
아무리 봐도 꿈이 아니다. 꿈이라는게 이렇게 길고 생생할 리가 없다. 지금까지 언수 씨가 꿔온 꿈 중에 이런 건 없었다.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코입과 선명한 얼굴 그리고 에누리 없이 들어오는 시골 냄새와 소음들. 언수 씨는 방금 전 소위 말하는 용사 파티라는 것까지 목격을 해버렸다.
아주 어린 놈들이었다. 파티에 서른이 넘어 보이는 놈이 없었다. 스크롤 넘기던 웹소설에서 줄기차게 봐오던 묘사다. 동시에 언수 씨가 가장 싫어하는 설정이다.
세상을 지키는 어린애들이라니. 언수 씨는 어린 시절 전세계에서 히트했던 서구권 쪽의 대작 판타지 장편소설을 즐겨 읽었고 그게 언수 씨의 세상으로 굳어져 있었다. 판타지라는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넘어온 게 이런 세상인데. 언수 씨는 적은 나이가 아니었고 들이닥친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그럭저럭 익숙한 어른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이야기 좀 하겠소"
언젠가 민원을 보러 갔을 때 마주했던 공무원 같은 말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마을 경비 두 명이 서 있었다. 얼굴 부분이 훤하게 뚫린 투구에 가슴팍만 가린 갑옷에 창과 허리에 찬 단검. 전부 손질이 잘 되어 있다.
"무슨 일이신지요"
"마을 한복판에 못 보던 자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그게 당신이라는군. 행색을 보아하니 수상한 자는 아닌 것 같은데 협조 좀 부탁드리겠소"
그래, 진짜로 내가 알던 그런 세계랑은 온도차가 좀 있구나. 처음보는 외부인한테 이렇게 친절한 공무원같은 경비병이라니.
두 명의 경비병 사이에서 딱히 포박도 없이 제 발로 따라가면서 언수 씨는 최우선적인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일단 여기서 살아 남아야겠구나.
이 사람들을 따라서 도착할 곳에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 작가의말
언수 씨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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