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에 도착한 이세계가 하드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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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형
작품등록일 :
2024.06.03 23:12
최근연재일 :
2024.07.0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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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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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코어로 시작하는 인생

DUMMY

이 쪽 세계에 날아오게 된 언수 씨가 느낀 감정은 두 가지가 얽혀 있었다.

기대감과 걱정이다.

이제 난 여기서 슬라임 잡기부터 시작해서 강해지고 결국 마왕까지 처치하면서 용사로 성공하는건가? 예쁜 엘프 여자친구는 덤이고?

그런데 용사 파티는 아까 봤지 않던가? 용사가 하나 뿐이라는 법 있나 내가 먼저 강해져서 마왕 선수치면 되는 것 아닌가?

방에 에어컨 그대로 켜두고 넘어왔는데 며칠동안 안 끄면 누진세 폭탄이 떨어질 텐데 어쩌지? 아니 내일 아침이면 나 무단결근 처리될텐데 그건 어쩌지? 전화 엄청나게 울릴텐데. 부재중 전화가 수십통은 쌓일텐데? 내일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쪽 세계는 편리한 스테이터스 호출 그런 것 없나? 아까 시도해 보니 그런 건 없는 것 같고 경험치나 레벨 같은 건?

그런 거 있는 웹소설 많고많던데 이쪽 세계는 불친절하네. 내 몸은 현실세계랑 그대론데. 힘이 세진 것 같지도 않고 초능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NPC나 다름 없잖아 판타지 세계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냐구.

엄마는 어떡하지. 하필이면 내일 생활비 보내줘야 하는 날인데 재수도 없지. 나 없어진 거 알면 난리가 날 텐데. 아마 나는 금방 실종신고 접수되겠지. 이언수 씨 퇴근 후 자택으로 귀가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이후 출근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다. 이세계로 사라졌을 지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 나 없으면 누가 기뻐하고 슬퍼해 줄


"선생님 많이 기다리셨죠"


끊임없이 이어지던 언수 씨의 생각들을 단칼에 잘라 버린 건 멀끔한 복장의 여자. 그러니까 판타지 세상 기준으로.

상의 맨 윗단추 쪽에 달린 브로치 하나 정도 제외하면 일체의 장식이랄 게 없는 블라우스와 무릎 쪽에서 멈춘 주름치마를 두른 여자는 척 보기에 언수 씨와는 동년배 혹은 두어 년도 낮은 연배처럼 보였다.


"여기 어떤 일로 오시게 된지는 경비병 분께 간략히 들으셨죠"


여자가 말하는 여기. 2층짜리 건물에 무장한 경비 몇 명이 더 돌아다니고 눈앞의 여자와 같은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은 더 많았다.

파출소와 동사무소가 합쳐진 시설같은 곳이겠지. 언수 씨를 (점잖게)연행한 경비는 조사할 것이 몇 가지 있으니 이 방에서 잠시 기다리라면서 맹물에 가까운 정체불명의 차와 견과류 한 줌을 테이블에 놔주고는 사라졌었다.


"조사 라는건 특별한 절차가 있는 겁니까"


"본래는 무장해제와 정신 검사가 있지만 앞에건 이미 하셨을 테고요, 뒤에건 평범하게 의사소통 가능하신 것 같으니 문제 없으세요. 몇 가지 대답만 더 해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물어보는 내용들은 요약하자면 언수 씨가 수상한 사람인가 아닌가에 대한 대화였고 불행히도 언수 씨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언수 씨는 눈치는 있었지만 임기응변은 영 꽝인 사람이었고 이세계에서 넘어왔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지만 출신지와 목적지, 신상에 대해서는 죄다 횡설수설이었다.

언수 씨가 즉석에서 지어낸 자신의 신상은 나이는 그대로, 고향에서 상경한 초보 모험가. 그리고 최근 사고로 머리에 충격을 받아 그것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직원의 표정에서 대놓고 새어나오는 미심쩍음을 감지한 감지한 언수 씨는 이거 잘못됐구나. 하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으랴.


"성실하게 대답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여기서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겠어요. 선생님 처우에 대해 전달해 드리려면 담당자분께 보고를 해야 하거든요. 오래는 안 걸려요"


"처우라니요. 이제 돌아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걸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언수 씨는 저쪽 세계에서 소위 말하는 개념이 탑재된 인간상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더 물고 늘어졌다간 나 진상같은 인간 되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능력 밖이라는 직원 물고 늘어져서 논란이 되는 진상들은 잊을 만 하면 인터넷에 박제되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세상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언수 씨는 신념을 고수하고 얌전히 있기를 택했지만 이 직원을 붙잡고 몇 마디라도 더 하는게 나았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직접 경험해본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에서도 보고 영화에서도 보고 학생 시절 수업시간에서도 듣고. 현실세계 대한민국의 가까운 과거에는 대공분실이라는 곳이 있었다는 걸 언수 씨는 알고 있다. 서른 일곱살이라는 나이는 그것의 악명을 실제로 체험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지만 언수 씨는 어처구니없게도 이세계에 넘어와서 비슷한 걸 체험하게 생겼다.


"처음에는 분명 좋은 말로 할거야"


동네 상인처럼 생긴 아저씨와 동네 농부처럼 생긴 아저씨. 선량하게 생긴 아저씨 두 명이 의자에 결박되어 있는 언수 씨 맞은편에 앉아서 사용 용도가 짐작이 가질 않는 웬 잡동사니들을 주섬주섬 만지고 있었다. 짐작이 가는 건 종이랑 필기도구처럼 보이는 물건 뿐.


"너 이름이 이언수라고"


그래. 지하실로 한 층 내려오니까 말투가 바뀌어 있구나. 나름 허술한 차와 다과까지 제공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신원파악만 하면 되는 선량한 시민이었던 거지. 여러가지 질문을 하던 직원이 나가고 얼마 후 들어온 것은 경비병 두 명이었고 그들은 이번에는 억센 힘으로 언수 씨의 양 팔을 붙잡고는 지하실로 데리고 내려간 것.


"이름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뭐 됐어. 우리가 알고싶은 건 말야 뭐 별다른게 아니야. 너가 위험한 놈인지 아닌지 좀 자세히 알아보려 그러는거야."


언수 씨는 자기가 지금 뭘로 의심받고 있는지 짐작해 내야만 했다. 스파이? 간첩? 암살자? 그런데 이 세계가 그런거 딱히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면 어쩌지? 아니면 이 사람들은 경찰 같은거고 날 신원미상의 범죄자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래 평화로운 세상이건 혼란스러운 세상이건 범죄자는 어디에나 있는 거겠지? 범죄자로 갈까? 아니 잠깐만 그런데 엄벌주의가 강한 세계라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엄청 심한 곳이면 어쩌지? 아무리 그래도 아주 적게 훔친 좀도둑한테 엄청 큰 벌을 주진 않을 것 아닌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본 언수 씨는 이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 어설프게 숨기려고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전 여러 곳 떠돌아 다니면서 하루하루 먹을 음식 훔치러 다니는 하찮은 도둑놈인데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적당히

숨기려고 했지요. 하지만 맹세코 이 마을에선 나쁜 짓 하지 않았습니다.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눈앞의 두 사람 표정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


"아, 도둑놈이고 음식 훔치러 다니신다"


농부 인상인 쪽이 잡동사니 중에 널찍한 가죽을 둘둘 말더니 언수 씨의 머리를 후려쳤다. 몽둥이 보다는 커다란 따귀를 맞은 듯한 느낌이이다. 십여 년도 전에 군대 전역한 이후로 물리적으로 뭔가에 맞아 본 일이 있던가. 너무나도 생소한 느낌에 아픔보다는 커다란 두려움이 온몸을 덮쳐 왔다. 이제 시작인 거지. 본격적으로 실감이 왔다.


"이 새끼야, 요즘 쌀 한가마니가 얼만데 음식 도둑은...너 뭔데 이렇게 어설프지? 뭐 하는 놈인데 너"


"몸에 락픽 하나도 안 가지고 다니면서 무슨 도둑이야? 너 우릴 뭘로 보고 그런 소리 해"


그래 도둑놈은 꽝카드였구나. 내가 잘못 짚은 거지. 괜히 더 수상한 놈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제 와서 더 거창한 거짓말 해 봐야 이쪽 세상에 대한 지식도 없고 설정도 모르는 내가 뭘 더 지어날 수 있을까. 언수 씨는 될대로 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다른 차원 세계에서 온 사람입니다"


"뭔 소리야 이건 또"


언수 씨는 원래 살던 세계 그리고 자기가 뭘 하다 넘어왔는지 그리고 이쪽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도 이런 상황이 어이없고 당황스럽다는 말들을 막힘없이 술술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못할 건 뭔가. 뭔 말을 지어내든 거짓말은 금방 탄로나 버릴테고 현실세계 얘기가 엄청난 금기인 것도 아닐 건데 그냥 속시원히 말이나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오히려 다 쏟아내 버리니 후련했다. 정신병자 취급이나 당하면 다행일테고 또 거짓말한다면서 얻어맞으면 힘들어지겠지. 이세계로 넘어온 인생 참 기구하구나. 남들은, 아니 웹소설 속 운 좋은 놈들은 판타지 넘어가자마자 뭘 해도 대우받고 이세계 지식 퍼뜨리면 우오옷 대단해 같은 소리나 듣고 승승장구 하던데.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은 저 사람들은 지금껏 없던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변해 있다. 언수 씨로서는 더욱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흐으음 그래? 거짓말 치곤 이번엔 앞뒤가 좀 맞네?"


말도 안 돼. 이게 된다고.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것도 잠시 언수 씨는 밀려오는 희망을 감지했다. 살려면 이것 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놈들한텐 이게 통한다.


"거짓말 아닙니다. 들어 주신다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농부 인상과 상인 인상은 작게 말하는 소리가 언수 씨의 귀에 절대로 들리지 않을 거리만큼 떨어져서 무언가 잠깐 수근거리더니, 살벌했던 표정을 풀고는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아니야 됐어. 일단 네놈이 늘어놓은 소리들은 잘 기억해 뒀고 말이야. 오늘은 우리 업무 시간도 끝나 가니깐 돌아가 봐야겠거든. 물론 너는 오늘 했던 이야기들 내일 좀 더

상세하게 해야 할거야. 미리 말해두지만 내일 할 이야기랑 오늘 한 이야기 중에 안 조금이라도 안 맞는 내용 있으면 각오해야 될 걸"



감옥과 허름한 여관방의 중간 퀄리티 쯤 되어 보이는 골방에 갇힌 언수 씨는 비로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라는 걸 가질 수 있었다. 언수 씨를 취조하던 두 사람은 내일 아침에 날이 밝는대로 찾아온다고 예고를 했다. 조악한 거짓말은 씨알도 안 먹히던 녀석들이 이세계에서 왔다는 소리에는 왜 유의미한 반응을 한 거지.

졸음이 몰려왔지만 막막한 현재 처지와 앞으로의 상황들을 생각하려면 무작정 잠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수 씨는 몸을 일으켜 허리에 손도 짚고 생각에 빠지려 들었다.

그리고 생각 좀 하려던 언수 씨의 의도는 신경 거슬리는 소음으로 실패했다. 투닥 투닥 투닥. 흙바닥을 넓은 면적으로 두들기는 소리. 일정한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나는 소리. 분명 동물이나 인간이 자연적으로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다. 좁은 데다가 철근 굵기 정도의 창살 네 줄기를 세로로 박아넣은 창문 쪽에서 나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 좀 봐요"


처음 듣는 목소리가 아니다. 튕겨나가듯이 창문 쪽으로 다가간 언수 씨는 창살 쪽으로 최대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신 낮에 얘기했던 직원이잖아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듣고 빨리 단답형으로 대답만 해요. 여기서 나갈 거에요 말 거에요"


이세계 넘어오자마자 의심 받고 취조실 끌려 가더니 이번엔 탈옥이라니. 하지만 이 여자는 생각할 겨를이라는 건 없다는 듯 다그치듯 말하고 있었다. 언수 씨는 떠밀리듯 대답했다.


"나가야죠"


"하나만 더요. 그 사람들한테 어디서 왔는지 다 얘기했다면서요"


"네?.....네"


하필이면 창살이 얼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위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짜증이 확 몰려온다는 표정을 짓는게 눈에 보였다.


"아저씨 좆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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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산 넘어 산이니 첩첩산중 24.07.02 25 0 12쪽
20 모두는 하나를 위해 24.06.23 19 0 11쪽
19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 24.06.20 25 0 12쪽
18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죠 24.06.19 23 0 12쪽
17 두 사람은 나락페어 24.06.18 30 0 11쪽
16 위험한 초대 24.06.17 34 0 12쪽
15 깨어지지 않는 것 24.06.16 32 0 12쪽
14 하얀 도화지 24.06.15 28 0 11쪽
13 순수함의 양면성 24.06.14 43 0 11쪽
12 혼이 담긴 구라 24.06.13 37 0 13쪽
11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 24.06.13 29 0 12쪽
10 세상만사 사필귀정 24.06.12 30 0 12쪽
9 폭풍이 일어나는 날의 밤 24.06.12 36 0 13쪽
8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24.06.11 41 0 11쪽
7 누군가는 해야하잖아 24.06.10 49 0 13쪽
6 젊어서 고생은 돈 받고 하는것 24.06.09 48 0 12쪽
5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24.06.08 57 1 13쪽
4 누구나 하나쯤은 24.06.07 63 2 15쪽
3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4 24.06.06 78 2 14쪽
» 하드코어로 시작하는 인생 24.06.05 85 1 12쪽
1 언수 씨의 어느 날 +2 24.06.04 130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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