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하나쯤은

낮 시간에 피부로 느껴 본 기억으론 슬슬 강렬한 햇빛이 기세를 받기 시작하는 초여름이지만 한밤중의 들판은 서늘했다. 즉 더워서 땀이 날 일은 없을 일이고 등골과 관자놀이에서 굵직하게 흐르는 땀줄기들은 초긴장 상태에서의 식은땀이다. 언수 씨의 가슴팍과 뒷골 쪽 근육들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서 한껏 팽팽해져 있었고 호흡은 가늘고 무거웠다.
'그럴 듯한 설정 좀 생각해 놔요'
제일 먼저 이름이다. 본명은 수도에 보고서와 함께 날아갔을 테니 이 세계에서 본격적으로 쓸 다른 이름부터 만들어야 했다. 분명 취조실에 있던 사람들은 이언수라는 이름을 듣고선 이상한 이름이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그럼 흔하지는 않아도 한국인 세글자 이름 정도면 무난하지 않을까.
"전 이희성이라는 사람입니다"
"내 친구 이름이랑 비슷하구만"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비록 채용면접 프리패스 수준의 달변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정말 무난하고 개연성도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불주먹 남자는 언수 씨가 심사숙고해서 만들어낸 거짓 변명들을 한참 잠자코 듣더니 혀를 차고는 근처에 있던 그루터기에 걸터앉고 훈계조로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그 나이 되도록 대체 왜 그 모양으로 살아온 거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저는 농사 일 하느라고"
"그래 요즘 불거지고 있다는 유사백수 생활 해 왔구만. 아버지 땅에서 나름 농사일 하고 있으니 나 정도면 성실하게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했을테고 그렇게 살다가 계란 한판 채웠잖소. 서른이면 나보다 한참 어린 것 같으니 말 좀 편하게 해도 되겠지? 요즘 자네같은 사람들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나도 알고 있어. 그래도 젊은이는 지금이라도 정신 차렸으니 다행이네 그래. 그런데 얼마나 외진 동네면 방문상담사도 안 드나들었소? 아니 상담사까지 만날것도 없이 아버지가 간단한 적성검사도 안 해줬소?"
실제 나이를 7년이나 속인 것을 알았다면 다행이라는 부분을 했을까 안했을까.
"저는 아버지와.... 아버지와 딱히 이야기 하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불주먹 남자는 시선을 살짝 돌리고 헛기침을 하고는 눈을 두 번 깜빡이고선 어깨를 으쓱 하는 것이다.
"알았소 젊은이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어. 이것 보시오. 요즘 세상 말인데, 여러모로 참 살기 편해졌지만 나쁜 놈들 한심한 놈들 고약한 놈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이게 좋은 세상인지 나쁜 세상인지 헷갈리잖아. 요즘 많지는 않아도 자네같은 젊은이들도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란 말이오.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그걸 곧 잘못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는 거요.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아니고! 사회 통념상 그런 게 만연하다는 소리요. 의욕도 없고 패기도 없는 젊은이는..."
나이가 오십 줄 넘은 어르신들은 대개 이러시지. 언수 씨와 같은 적당한 담벼락 하나 마주치면 세상 진지해지시는 법이다. 수십여 분이라는 시간은 대개 짧은 시간으로 치부되지만 사람 한 명이 혼자서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듣는 입장에선 영겁에 가깝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한다.
"아무튼 그렇고 어디로 가는 길이었소? 그래 상경을 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수도 쪽이겠지?"
이번 것도 심각하진 않지만 나름 낭패였다. 수도에서 지명수배가 내려올 테니 최대한 먼 쪽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이 어르신의 선의 가득한 오지랖이 사람을 또 불안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만 전 고향 바깥 세상에 대한 구경을 좀 해보고 싶은데요. 견문도 넓히고 경험도..."
"모르는 소리! 젊은 사람이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행동해서야 어따 쓰겠소? 인생 경험하는데 수도보다 더 좋은 데가 어디 있겠느냔 말이오. 쇠뿔도 단김에 뽑는다고 상경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시원하게 올라가서 길거리에서 노숙도 하고 하루짜리 막일도 다 해보는 거지 거기서 거기인 촌동네 몇 군데 들쑤시고 다니면 뭐가 나온다고"
불주먹 어르신은 자신이 등록된 자경단 기관이 등록된 도시가 나름대로의 교통 서비스도 제공이 되는 곳이니 동행하기를 강력하게 권했다. 이렇게까지 밀어붙이기 시작한 어르신은 막을 수 없는데다가 거절할 만한 명확한 핑계도 없었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수 씨를 세상물정 모르는 애어른으로 규정해버린 듯 훈계조가 자욱하게 깔린 일장연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나마 다행인 건 이야기들에 집중하다 보면 중간중간 이쪽 세계의 유용한 정보들을 얻어 낼 수 있다는 점 정도였다.
"고향에서 짓던 농사는 얼마나 크게 하고 있었소"
"소박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점잔 빼는거지. 어차피 털고 상경했으면서 뭘 겸손하게 그러시오"
이쪽 세계에서의 농사는 손대면 어지간하면 망할 일은 없지만 크게 성공할 가능성은 그보다 더 희박한 시뻘건 레드오션같은 업종이었다. 나라 대부분의 땅덩어리가 넓은데다 비옥하고 기후 변동의 균형이 좋아서 널리 퍼져있는 농업지식만 준수하고 시작한다면 거의 대풍작을 거둔다고 했다. 대부분의 농작물이 쏟아져나오다 못해 썩어넘치는 세상이다 보니 중소규모 농장따윈 안하느니만 못한 사업이라는 거구만. 그러니까 이 어르신은 내가 예의상 입에 발린 겸손 떤다고 생각을 하신 거고. 역시 아는 게 힘이었다.
이런 걸 미리 알았다면 음식 훔치던 도둑이라는 거짓말 같은 건 안 했을 것 아닌가.
"거의 다 왔는데, 도착하면 일단 자고 내일 아침에 알선소에서 적성검사부터 하시오"
"상경은 수도로 할 건데 벌써부터 일자리를 구해 놔야 합니까"
"여기서 취직하라는 게 아니라 주특기에 대해서 파악을 하라는 거요"
도착한 마을은 과연 처음 도착했던 동네보단 규모가 확실히 컸다. 물론 날은 많이 어두워졌기에 밤영업을 하는 골목 업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죄다 어두컴컴해져 있었고 불주먹 어르신은 내일 들르라고 당부받은 알선소와 추천하는 숙박 업소, 그리고 자신이 주로 시간을 보낸다는 자경단 건물 위치 정도를 안내해주고는 드디어 자리를 떴다.
다시 혼자 남게 된 언수 씨는 추천받은 숙박 업소를 찾아 나섰고 도착한 곳의 문 앞에 서서야 아차 싶었다. 가진 돈이 없는 것이다. 세상이 풍요로우면 무엇 하는가 내 손아귀로 쌀 한톨 넣을 정당한 방법이 없는데. 어르신은 상경한 부농 아들이니 여비는 두둑히 챙겨 다닌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다급한 마음에 헤어졌던 장소로 황급히 돌아가 하룻밤 만이라도 어떻게든 둘러대어 신세를 져 볼 생각으로 한참을 찾아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초여름인게 천운이구나"
마을 곳곳에는 크고 작은 거적대기로 몸을 감싸고 적당히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것이다. 한 명 한명이 이언수 씨고 이희성 씨였다. 내 나이 스물 한 살 군생활 당시 초소근무 했을 때 이후로 야외에서 잠을 청해 본 일이 있었던가. 내일 아침 감기는 좀 들 수 있을지언정 얼어죽지 않고 하루 지낼 수 있다는 데에 안도해야 한다니 이걸 기뻐해야 할 일인지. 내일 아침 불주먹 어르신을 다시 만나려면 몸에 내려앉을 서리는 미리 확실하게 없애 놓아야겠지.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려는 와중에도 골목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좋은 밤들 되시오 친구들.
'그런데, 너무 가까이 와서 자려는 것 아닌가'
골목에 동시에 나타난 네 사람중 한 명이 코까지 골며 잘 자던 노숙자 한 명에게 사커킥을 전력으로 날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꺼져 쓰레기들아"
빈민가 골목에서는 순식간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고 혼비백산하여 일어난 노숙자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언수 씨 역시 어안이 벙벙하여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도망치는 모습들을 벌레 보듯이 구경하던 사람 중 한명에게 가로막혔다.
"너 이언수지"
안타깝게도 임기응변 능력 빵점에 눈치 백단인 언수 씨.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놈들이구나. 그러나 표정은 당혹스러웠고 입술과 턱은 바들바들 떨렸다. 원래대로면 바로 튀어나왔어야 할 그 대답. 억울하고 뻔뻔하다는 듯이 했어야 할 아무것도 아닌 그 대답이 너무 늦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사람 잘 못 봤다는 소리 하는데 왜 고민을 해 이 새끼야"
"정말입니다. 저는 이희성이라는 사람인데요 고향에서 상경하는 길입니다"
눈앞이 잠깐 흐릿해지더니 얼굴에 흙의 감촉이 느껴지고 등짝이 화끈거렸다. 이어서 아랫배에 강렬한 충격이 전해져 왔고 숨을 쉬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아우우"
분명 꺼내주었던 직원은 보고가 수도까지 올라가는 데 며칠은 걸린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빨라도 너무 빠르다. 게다가 나를 쥐어패고 있는 이 녀석들은 전혀
국가 소속의 요원이나 군인같은 차림새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동네 양아치들이 아닌가. 이런 녀석들이 대체 나를 어떻게 찾아내서 습격을 한 거지. 밟히고 채이면서 하는 생각들은 정리가 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야 조심해. 이놈도 잘하는게 있을 거 아냐. 이렇게 쳐맞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망칠 수도 있어"
"아, 나 방금 소름 돋았어. 큰일 날 뻔했네"
놈들은 튼튼한 밧줄을 꺼내더니 이내 언수 씨를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특기가 언제 튀어 나올지 경계를 하고 있지만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언수 씨에게 여전히 그런 건 없었다. 불과 내일이면 나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능력이란 걸 찾아서 어떻게든 써먹을 수도 있는 거였는데. 잘 하는 거. 내가 잘 한다고 자랑할 만한 재능이 있긴 했던가. 운동은 젬병에 공부는 평균 미만이고 깡다구가 세거나 겁대가리가 없는 것도 아니야. 그저 먹고살려고 아득바득 지내오다 보니 눈칫밥만 늘고 사람들 짜증나게 하는 노하우만 늘었지. 조금이라도 더 낫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 품고 살았지만 세상엔 마음대로 풀리는 일들이 얼마 없었다.
그런데도, 내일 있을 거지같은 일들을 상상하면서도 잠에 들 수 있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다 묶었다. 이제 놈이 뭘 하든지 걱정 없어"
"잠깐만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대충 짐작은 합니다. 제가 입을 잘못 놀린 건 압니다만 그게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그래그래 순진한 놈들은 보통 그렇게들 알고 있지. 그치만 말야 넌 그렇게 끌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에 쓰일 수 있단 말야."
역시 짐작대로 이 놈들은 나랏일하고는 관계가 없는 놈들이었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니. 이런 녀석들이 아닌 밤중에 사람 납치해서 결박하고는 데려가서 한다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 뻔한 것 아닌가.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자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딱 네 마디를 소리친 이후 언수 씨는 몇 대를 더 얻어맞고는 입까지 틀어막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이 장소에서 볼 일은 끝난 듯, 네 명중 덩치가 가장 큰 사람이 언수 씨를 어깨에 들쳐 메고는 앞서는 일행을 뒤따라 골목을 뜨려 했다. 제발 여기서 풀려났으면. 여기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될 텐데.
털푸덕! 땅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일행은 동시에 덩치 쪽을 뒤돌아 보았다. 언수 씨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야 이새끼야 제대로 안 짊어져?"
"아니야 이상해 이 자식 좀 보라구!"
덩치는 매우 짜증이 난 표정으로 뒷목을 부여잡고선 땅에 떨어진 언수 씨를 턱으로 가리켰다. 결박하고 있던 밧줄이 지푸라기 한 올 남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언수 씨의 눈 앞에 나타나는 순간부터 한마디도 없이 행동만 하던 대머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래 이 놈은 이게 특기구만. 야 너희들 저 녀석한테 물건이나 무기 뺏기지 마라 새로 사려면 아까워진다"
네 명중 두 명이 재빠르게 움직여서 아직 땅에 나뒹굴고 있던 상태의 언수 씨의 뒤쪽으로 움직였고 사방으로 포위한 형태를 만들었다.
"제기랄 사물이동이라니. 그치만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야. 엄청 피곤한 특기는 아니야"
"몸 성히 데려갈 수 없게 된 게 이놈한텐 오히려 불행이지"
도끼 하나와 나이프 세 자루가 언수 씨의 사지를 동시에 노리고 들어왔다. 두 명은 팔 두 명은 다리. 심지어 왼쪽과 오른쪽까지 각각 노리고 들어온 것을 보면 늘 이런 일을 할 때에 사전 전담을 해 두는 모양이다. 네 개의 무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정확한 부위로 날아들었고 허공을 갈랐다.
끔찍한 고통을 예상하고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언수 씨는 벌써 잘려나가서 감각이 없는 건가, 싶었는데 여전히 제대로 붙어 있는 팔을 보고 안도했다. 팔을 뚫고 들어온 모양새의 도끼날은 눈동자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고 무음의 비명을 질렀다. 날은 곧 눈앞에서 거두어 졌다.
"사물이동이라며?"
"통과잖아?"
"조용히들 해!"
대머리가 호통을 치고는 나이프를 검집에 쑤셔 넣자 다른 일행들도 똑같이 행동했고, 이내 싸늘한 표정이 되었다.
"이 놈 보통 방법으로는 못 데려간다. 두 개를 썼다는 건 세 개, 네 개를 쓸 수도 있단 거라고. 무슨 뜻인지 알지?"
대머리의 온 몸이 서서히 검어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덩치는 양쪽 눈이 새햐얘지더니 스파크가 튀어올랐고, 마른 체구는 양손으로 바닥의 흙을 한 줌 퍼올리자 몇 개의 구체가 되더니 손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키가 제일 작지만 다부진 체구의 남자만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언수 씨의 눈에는 다 보였다. 시야에서 사라진 직후에 반투명한 형태가 된 대머리는 아주 느린 속도로 반원을 그리며 뒤쪽으로 움직이는 것. 덩치의 눈 쪽에서 주기적으로 집중되는 전류의 흐름. 마른 체구의 손 위에 떠다니는 흙 구체의 밀도와 성분, 외관상으론 특별한 변화가 없는 남자가 무슨 특기를 가졌는지.
도망쳐서 없던 일로 해 버리는 것은 이미 물건너 간 일이었고 언수 씨는 여전히 이 상황이 두려웠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한테는 나도 모르는 힘이 있다. 특기라는 게, 분명히 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그건 명백하게 나를 도와주고 있다. 나도 모르는 내 특기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
- 작가의말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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