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에 도착한 이세계가 하드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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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형
작품등록일 :
2024.06.03 23:12
최근연재일 :
2024.07.0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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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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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고생은 돈 받고 하는것

DUMMY

뻘줌한 표정으로 뒷정리를 다시 하고 알선소의 대기실로 돌아온 언수 씨는 바깥바람을 쐬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초여름의 대낮은 바람 한 점 없었고 이내 땀이 한 두 방울 흘러나왔지만 그럭저럭 기분은 나아졌다.


"왜 안돼는 거지"


혹시나 해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어 다시 시도해 보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특기가 누구나 하나라면 이게 정상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 날 꿈을 꾼 것도 아닌데 그건 특기 같은 게 아니었다는 말인가. 의문은 끝이 없었지만 명쾌한 답을 찾을 길은 없었고 당장은 눈앞의 문제들이 급하다.

눈 질끈 감고 머리 두어 번 흔들고. 많은 사람들이 잡념 떨쳐 낼 때 하는 행동이고 효과는 그럭저럭.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구직신청서에 써야 할 내용은 이름과 나이 등 원래 세상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주특기 란에서 잠깐 멈칫했는데 눈치 빠른 직원이 바로 캐치를 했다.


"방금 적성검사 하고 나오신 분이시죠. 어떤 거 나오셨어요."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더니 연결 및 결속 도구 이용이라고 기재하면 된다고 한다. 심지어 주특기 코드도 있고 정식명칭으로 규정된 이름이니 어딜 가도 그렇게 기재하면 다 통한다고도 했다.


'마음에 드네'


알맞게 똑 떨어지는 일처리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거지... 직원은 작성된 신청서를 받아 들고서 훑어보았다. 날짜별로 분류된 것처럼 보이는 칸막이들에서 전단을 몇 장 꺼내어 넘겨준다.


"단면은 마을 안이고 양면은 외지 근무처에요. 채용완료 보고가 아직 안 들어온 곳들 위주로 드렸지만 정확한 건 아니니 확인은 직접 하셔야 해요"


단면 구인지 4장과 양면 1장. 업종과 일당 약도가 필수로 기재되어 있고 자질구레한 영업 멘트가 나열된 전단들이지만 양면이 사용된 외지 근무처 외엔 볼 이유가 없어져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구직자 몇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언수 씨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그나마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떻게 잘 풀리십니까"


"영 시원찮아요. 한 달 넘게 뻔질나게 드나드는데 맞는 일도 없고 의욕도 안 생겨요"


저런 그러셨군요. 하면서 언수 씨는 받았던 외지 근무처 구인지를 보여 주었다.


"여기 좀 아시는 부분 있습니까"


-예홉 교소도 대규모 보강 및 보수작업. 건축/장비/도구 특기자 환영. 근무기간 따라 월/일급 정산지급 가능-

뒷면에는 약도가 아닌 도시 외부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구직자는 눈이 약간 크게 떠지고는 언수 씨를 바라보았다.


"이거 힘드실 텐데"


"그럴 테죠 하지만 저는 돈이 좀 필요합니다"


애초에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고 일당 좀 벌고 나면 금방 어디든 멀리 뜰 생각이지만 굳이 이야기 할 일은 아니었다.


"여긴 가는 것부터가 중노동이예요. 거의 나라 끄트머리에 있는 땅끝마을 산골인데 처자식은 어떻게 할 거요"


"슬프게도 없습니다만 제가 금방 올라온 촌놈이라 그런데 여기가 그렇게 먼 곳입니까"


"이렇게 큰 교도소는 혐오시설 중에서도 최고라 아무데나 못 지어요. 주민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밀리고 밀린 곳이 데빅 산맥 최북단이오. 그나마도 근처 항의가 빗발쳐서 나라에서 설득한다고 한참 난리가 났잖아요"


분명 출발하고 도착하는 것부터가 고생바가지 훤할 일이겠지만 나라에 중범죄자로 찍힌 판국에 오늘 눈에 띄나 내일 눈에 띄나 앉아서 벌벌 떠는 건 더 아니잖은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금새 자리를 뜨는 얼굴을 보고선 대화를 나누던 구직자는 안쓰러웠던 것이다.


"돈이 얼마나 급하길래 아무리 그래도 저길 제 발로 간다고"


교도소 보수작업은 임금은 컸지만 이동도 일도 힘들기에 지원자가 거의 없고 대부분 현지나 근처 충당인원들이지만 그마저도 턱없이 부족했기에 공고는 전국에 퍼져 있었다. 채용이 이미 끝나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면접관은 언수 씨의 주특기 시연을 보고 나선 악수를 권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선생같은 건실한 젊은이들이 굳은 일에 앞장서니 나라가 발전하는 것 아니겠소"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소린데'


익숙하지만 띠꺼운 기분도 잠깐이었고 필수사항들을 숙지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파견 행렬은 일주일에 두번인데 운좋게도 내일이었다. 도착까지 포기나 도중이탈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면 소액의 지원금도 지급을 한댄다. 마음 굳힌 이 시점에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호위 병력은 기본적으로 따라가지만 길 자체가 험하니 조심하시오."


마을을 뜰 계획은 잘 풀렸지만 잠자코 시간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지로 나가는 근로자들에게 제공되는 숙소로 가보니 면적에 비해서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다목적으로 쓰는 로비 같은 곳인지 바쁘게 움직이며 잡일을 하는 직원도 있고 호위로 보이는 무장한 사람들도 보였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많은 건 곧 마을을 떠날 근로자들이었다. 언수 씨는 적당히 사람들이 모여서 잡담을 하는 무리 몇 군데를 골라서 돌아다녔다.


"혹시 예홉 교도소 가는 분들이십니까"


"거긴 저쪽이오"


지목된 곳을 보니 예닐곱 명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특별히 뭔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가까이 가 보니 그쪽에서 먼저 반응을 보인다.


"당신도 교도소 작업 가시오"


"맞습니다. 조금 앉아도 될까요"


"당연하지 같이 이야기나 합시다"


들어보니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도착하고 나서도 같은 조로 편성될 확률이 높았기에 미리 얼굴이라도 알아두는 중인 자리였다. 누가 시키거나 주도한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자기소개가 돌았다. 언수 씨 포함해서 세 명은 근로자였고 나머진 교도소까지 동행할 병력이었다. 그 사람들은 무기와 옷이 제각각이었다.


"교도소 보수작업이면 범죄자들과 마주칠 일도 생기는 것 아닐까요"


"예홉은 범죄자 수질만큼이나 통제도 빡세게 하니 문제 생길 일은 없겠죠. 다만 눈 마주치거나 욕먹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냥 못 보고 못 들은 체 하는게 상책이요. 조금이라도 반응해서 심기 꼬였다간 얼굴 외우고 나중에 해코지할 수도 있으니"


"선량한 사람이 왜 범죄자 눈치를 봐야하는지 원"


"별 수 있나 막가는건 그놈들인데. 똥이 무서우면 피해야지"


이윽고 이야기는 작업 쪽으로 넘어가고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왕년 이야기로 넘어가고... 이세계로 넘어오고 나서 비로소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떠들고 마셔보는 분위기에 언수 씨는 빠르게 스며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 않도록 입조심 입조심. 술자리 끝날 때까지 필름간수 잘하는 기술은 어디서나 유용했다.



잘 관리되고 있는 왕도가 끝나는 길에서 행렬은 분리작업을 시작했다. 말 두마리가 끌어가는 널찍한 수레에 두 줄로 앉아 가던 교도소행 인원들은 여기서 내려야 했다.

이어지는 도로의 모양새와 관리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분리되는 이 기점은 총 이동거리의 절반 조금 넘게 왔다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몬스터 짐승 출몰지역인데 나타난다고 해서 크게 동요하지 마시고요 자리 고수하는게 중요합니다."


인솔 책임을 맡은듯한 관리의 안내로는 몬스터나 짐승들의 숫자건 세기건 호위병력들이 충분히 감당해 낼 수준이 되니 걱정하지 말고 목적지까지의 체력관리가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데빅 산맥은 눈앞을 가리는 수풀과 나무는 울창한데 그게 자라나는 땅은 울퉁불퉁한 바위산이라는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한두 시간쯤 올라오자 조그만 신음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알면서도 따라온거니 어디 불평도 못하겠구만"


저 멀리 교도소 건물들의 윤곽이 보일 때는 해가 어둑어둑 저물어 갈 때쯤이었다. 인솔 관리는 수시로 망원경을 꺼내들어 교도소 쪽을 바라보고 이어서 지도를 들여다보는 일들 반복했다. 근로자들끼리는 여기쯤이면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산길이라 길이 배배 꼬였나 보구만. 하면서 되는대로 잡담을 했다. 관리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기슭 아래쪽의 교도소의 풍경이 조금 더 가까워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윤곽이 아주 작은 벌레들 크기 정도로 보일 때쯤이었다. 망원경과 지도를 한 번 더 본 관리는 전원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여러분.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반대쪽으로 돌아갑시다."


관리는 침착하게 말하긴 했지만 호위를 맡은 전사 중 한명은 찌렁쩌렁한 소리로 고함을 쳤다.


"전부 웅크리고 숙여!"


몬스터도 아니고 산짐승도 아니었다. 날아든 것은 화살과 투창이었다. 반응이 느렸던 관리는 관자놀이에 화살이 꽂힌 채로 쓰러지고 호위중 한 명이 가슴팍에 투창을 맞고 쓰러지더니 금방 멈췄다. 남은 호위들이 근로자들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서로 거리를 좁히자는 손짓을 보냈다.


'어디서 쏜 거야?'


허리를 잔뜩 수그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저씨 빨리 이쪽으로 와요, 라는 외침을 듣고 오리걸음으로 이동하면서도 최대한 주변의 숲을 주의 깊게 둘러보던 언수 씨의 시야에 뭔가가 잡혔는데 낡았지만 튼튼한 재질의 단색 셔츠와 바지를 입은 사람의 모습. 이어서 똑같은 차림새의 사람들이 둘러보던 시선 곳곳에 보였다.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가서 뭉친 언수 씨는 어디선가 커다란 방패를 만들어내어 전면을 막고 있는 호위에게 다가와 본 것들을 말했다.


"수감자들이 공격한 것 같은데요"


"탈옥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렇다기에는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근로자와 호위 일행이 최대한 뭉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와중에 2차 공격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이내 숲 속에서 언수 씨가 본 복장과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이 정도의 인원이 탈옥했다면 이미 교도소 차원에서 대규모 수색을 하고 있는게 정상이겠지만 산맥에 올라오는 도중에 그런 소동은 전혀 없었다. 서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 설마, 설마 하면서 가능성 높은 그 경우의 수를 예상하는 와중에 일행 앞으로 수감자 복장 한 명이 나서서 소리쳤다.


"방패 없애"


순순히 말을 듣지 않자 똑같은 소리를 욕설 섞어서 한 번 더 외치고, 남은 호위들은 눈짓 교환을 한 번 하고는 근로자들에게 나지막히 가만히 있으시오 라고 일렀다. 방패가 사라지자 수감자는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걸 힐끗 확인하더니 호위 중 한 명이 품속에서 아주 느린 동작으로 어딜 보나 폭발물로 보이는 물건을 꺼내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언수 씨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가가 그 손을 부여잡았다.


"뭐 하는 짓이오?"


촌각을 다루는 사태에 계획이 방해받은 호위는 짜증이 확 몰려왔는지 손을 거칠게 뿌리쳤지만 언수 씨는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다 죽습니다"


이게 옳았든 틀렸든 다가오던 수감자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선택의 여지는 없어졌고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일행은 그저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좋아 아주 현명한 놈들이로군. 허튼 수작 하지 않으면 당장은 목숨 보전할 수 있을거야. 여기 운 없는 두놈은 얼른 치워버리고 여기 있는 놈들은 분류해서 데려가"


우르르 몰려온 수감자들은 어림잡아도 이십 명 정도는 되어 보였고 죄다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행에서 호위 병력과 근로자가 각각 누구냐 묻고 두 무리를 떼어내서 다른 방향으로 데려갔다.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물음표 한번만 더 나왔다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언수 씨의 질문에 살이 엄청나게 찐 거한 수용자 하나가 몽둥이를 얼굴에 들이대며 친절하게 대답해 주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무의미한 질문이긴 했다. 금방 알 수 있었으니.

아무튼 일행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완전히 어두워질 때쯤 교도소 정문에 도착하게 되었다. 근무복에 모자 착용한 직원의 모습은 없었고 정문과 감시탑에서 인상 구기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수감자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작가의말

잘하는 게 있으면 공짜로 해주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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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에 도착한 이세계가 하드코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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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산 넘어 산이니 첩첩산중 24.07.02 26 0 12쪽
20 모두는 하나를 위해 24.06.23 20 0 11쪽
19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 24.06.20 26 0 12쪽
18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죠 24.06.19 25 0 12쪽
17 두 사람은 나락페어 24.06.18 31 0 11쪽
16 위험한 초대 24.06.17 35 0 12쪽
15 깨어지지 않는 것 24.06.16 33 0 12쪽
14 하얀 도화지 24.06.15 30 0 11쪽
13 순수함의 양면성 24.06.14 45 0 11쪽
12 혼이 담긴 구라 24.06.13 38 0 13쪽
11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 24.06.13 30 0 12쪽
10 세상만사 사필귀정 24.06.12 31 0 12쪽
9 폭풍이 일어나는 날의 밤 24.06.12 38 0 13쪽
8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24.06.11 43 0 11쪽
7 누군가는 해야하잖아 24.06.10 51 0 13쪽
» 젊어서 고생은 돈 받고 하는것 24.06.09 50 0 12쪽
5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24.06.08 58 1 13쪽
4 누구나 하나쯤은 24.06.07 64 2 15쪽
3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4 24.06.06 80 2 14쪽
2 하드코어로 시작하는 인생 24.06.05 86 1 12쪽
1 언수 씨의 어느 날 +2 24.06.04 134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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