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안에서 새던 바가지가 바깥에서도 샌다는 건 대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기에 애매하지만 언수 씨의 모습은 딱 그랬다.
이세계 전생되기 전에는 길어야 1년 버티면 다행인 신입들 채근하고 현장과 사무실 가리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따져대는 모습들은 거기나 여기나 똑같았다.
차이점이라면 여기선 작업현장을 통째로 간섭해야만 하는 완장이 팔뚝에 채워져 버린 것이다.
"존나 쓸모있는 놈이구만."
즉석에서 작업반장이 되면서 언수 씨는 교도소 보수작업에 대한 평면도니 도면이니 몇 장을 넘겨받았다. 내용들을 보니 군데군데에 가위표가 쳐져 있고 펜으로 박박 문질러 지운 부분들이 있다.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설계한 내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멋대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당연히 고친 놈들조차도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알 리가 없다.
'하여튼 어딜 가도 이런...'
하지만 언수 씨는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이런 주먹구구에 타협을 해야만 했다. 작업을 하기 위해 건축에 대해 아는 사람 몇 명과 논의가 필요하다고 요청하여 관련 전문가 두 명을 추려냈다. 반응은 언수 씨와 비슷했다.
"이런 걸 만든다고 우리에게 그 고생을 시켰던 겁니까."
"대신이라도 좀 말해 주십시오. 지금이라도 뜯어고쳐서 새로 해야 됩니다."
중학교 과학 과정만 제대로 밟았어도 탄식이 나올 법한 도면으로 둔갑해 있었으니 전문적으로 배워온 사람들이 보기엔 어련할까. 하지만 도면을 이 모양으로 개조해 놓은 수감자들은 넘겨주는 순간부터 이 내용들하고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다면 경칠 줄 알어, 라는 으름장을 기본으로 깔아 놓았고 언수 씨 역시 이것만큼은 해 내야만 했다.
"지금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합니다.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일단 눈에 보이는 부분만큼은 최대한 원하는 모양새로 지어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개조된 도면은 전쟁터 한복판에 설치된 요새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 토대나 알맹이는 비록 텅텅 비어서 빛 좋은 개살구같은 형태였지만... 이 상황 안에서 가능한 작업라인을 짰다. 그리고 당장 진행할 일들의 갈피가 잡혔다.
'이제 이 놈들의 우두머리를 만나 봐야만 해.'
이것들을 보고해야겠으니 주동자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거드름을 피우며 거절을 하는 것이다.
"형님께선 아무나 안 만나신다. 나한테 말하면 전달해주마."
기다렸다는 듯이 도면을 꺼내들어선 주절주절 작업 내용에 대해서 쏟아 냈더니 5분 정도는 알아듣는다는 듯이 고개까지 끄덕여대며 흠, 흠 소리를 내더니 십여 분을 넘자 머리를 긁적거리는 것이다.
"역시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서서 짧게 끝날 일이 아니지."
따라오라는 제스쳐를 하더니 작업현장에서 약간 떨어진 건물로 데려가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얼굴이랑 덩치로 리더급들 뽑아서 세워놓은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험상궂은 사람들 몇 명이 늘어앉아서 자기들끼리 꺼드럭거리고 있는 것이다. 언수 씨와 현장 감독을 맨 처음 본 덩치 하나가 반쪼가리 남은 먹던 사과를 냅다 던졌다. 현장 감독의 면상에 보기좋게 명중.
"왜 작업자 놈을 사무실에 데려와?"
얼굴에 늘러붙은 쪼가리들을 떼어내며 괜히 언수 씨를 노려보고 쒸익쒸익 대고 있다. 이내 멋적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하는 것이다.
"형님 좀 들어 보십시오. 이놈이 그 이희성이라는 놈입니다. 중요한 얘기를 한답니다."
작업반장을 시키게 된 경과를 먼저 전해들었던 리더급들은 흥미 있다는 듯이 모여들더니 언수 씨에게 살벌한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조폭이나 흉악범은 영화에서나 봐 왔는데 이세계 와서 이런 상황을 겪어 보게 된다니. 태연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어깨와 목에 긴장한 티가 나는 모습을 보고선 여기서기서 픽픽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그래 아가야 오줌 한번 시원하게 지리고 설명해 보자"
마른침을 삼키고는 둘러서 있던 테이블에 도면들을 펼쳐 놓았다.
"분명 표시해 두신 대로는 만들 겁니다. 하지만 그대로 진행하려면 부탁드릴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어디에 인원을 어떻게 투입할 것인지 정해진 자재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물론 언수 씨가 건축을 본격적으로 전공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 설명들은 먼저 상의한 기술자들이 풀어준 이야기들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그 놈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심기에 거슬릴 테니 대충 이렇게 해 주시면 됩니다'
그 말대로 대충 알아먹은 듯한 리더급 수감자들은 설명을 다 듣고 나서는 그럭저럭 마음에 든 듯 했다. 여기까지입니다. 하고 마무리를 지은 언수 씨가 쭈뼛쭈뼛 자리를 지키고 있자, 설명에 집중하던 사람 중 미역머리의 거한이 대뜸 도면을 집어드는 것이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는데 문제는 없다는 거지. 역시 잘 고쳤어. 혹시나 싶었는데 말야"
그럼 형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같은 소리를 내며 주변에서 금칠을 하고 있다. 살짝 우쭐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언수 씨에게 말을 걸었다.
"이희성이. 너 이희성이라고 했지. 여긴 뭐 하러 온 놈이냐?"
"그야 그냥 돈 필요해서 일하러 온 겁니다"
"재수도 지지리 없는 놈이구만."
미역머리의 리더는 언수 씨에게 여러 가지를 캐물었는데 밖에서의 경력이나 주특기 등 이미 전달해 들었을 이야기들을 굳이 한번씩 더 물어보는 것이다. 언수 씨는 현장감독에게 했던 말들과 조금이라도 틀린 점이 없도록 집중하여 대답들을 신중하게 골랐다.
"형님 이 놈이 마음에 드시오?"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우리 일에 쓸모있는 놈이 하나쯤은 필요한 것 아니겠어."
그리고선 오늘 작업이 끝날 때까지 한번 하는 모양새 지켜본다는 겁을 또 주는 것이다. 도망치듯이 현장사무실을 빠져나오자 긴장이 확 풀렸다.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와 목근육이 풀려서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마음 놓고 있을 새가 없었다. 일단 놈들의 눈에 띄는 데까지는 성공 했고 분명 작업을 지켜본다고 했으니 오늘의 진행이 관건이었다.
언수 씨는 그날 역대급으로 뛰어다니며 작업자들을 채근하고 현장을 관리했다. 같은 근로자들조차 저 놈이 같이 끌려와서 벌벌 떨던 그 놈이 맞나.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발 밑의 흙이 완전히 안 보일 정도의 시간이 되어서야 작업을 멈추라는 지시들이 내려왔다.
다른 작업자들과 수감 구역으로 향하는 언수 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감자의 리더격들이 머무는 쪽으로 오라는 지시를 들었다.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따라 들어가는 와중에 언수 씨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존나 쓸모있는 놈이구만."
미역머리를 비롯한 리더급 수감자들은 작업이 끝나기 직전에 현장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진행된 일들을 보고선 썩 만족한 듯했다. 한 것도 없는 놈들이 들이부으며 마셔대는 것만큼은 기가 막혔다. 언수 씨 역시 피곤이 엄습하는 와중에 끊임없이 잔 들이키는게 고역이었지만 살아왔던 날들에 이런 일이 한 두번이랴.
"야, 내일 아침부터는 현장사무실로 들어오고 여기 있는 분들 다 형님이라고 불러."
"그렇다면 외람되지만 혹시 큰형님의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미역머리 리더의 이름은 생크라고 했고 술이 한바탕 들어가자 언수 씨를 끌어당기더니 대낮 때 무게 잡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기세로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우리는 말야 절대로 큰 소동을 일으키려는 건 아냐."
사람 자체가 단순한건지 벌써부터 언수 씨를 범죄자 동생으로 생각해 버린 듯했다. 그의 말로는 기본 형량이 수십년에 평균 무기징역인 자신들이 가장 원하는 건 자유이고 두번째는 돈이라는 것이다. 수도에 폭동 사실이 들어가기 전에 완벽하게 농성할 준비를 해 놓고선 안전한 석방과 돈을 요구할 계획이란다. 파견 근로자나 직원들은 그 때 필요한 인질이라고 했다.
'되겠냐 그게.'
욕설이 목구멍 가운데까지 걸렸지만 내놓으면 안 될 말이었기에 최대한 순회시켜 의견을 표했다.
"나라에서 거기에 쉽게 응할까요."
"지금 설마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나도 군인 출신이야 임마. 이 나라 군대 꼬라지가 어떤 지 알면 놀랄 걸."
생크는 지역 군부대에서 몇 년간 복무를 했는데 월급이 나오니 얼마간 얌전히 지내오긴 했지만 따분한데다 엉뚱한 똥군기에 시달리던 와중에 타고난 성품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고를 쳤다. 영내에서 상관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요약할 수 있는 사건을 자랑스럽고도 기나길게 떠드는데 언수 씨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놈들이 우리 형제들을 뭐 어떻게 할 수 있을거라고 보냐. 암 어림도 없지. 됐고 적셔라 얘들아."
놈들의 계획이 어떤 짓거리인지 대충 가락이 잡히게 되자 술이 그렇게 많이 들어왔는데도 취기가 슬슬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양심도 없고 조심성도 없고 치밀하지도 못한 놈들 같으니. 그러니까 나쁜 놈들은 어딜 가고 뭘 하든 나쁜 놈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점점 술이 떨어지고 제정신을 잃는 인원들이 하나 둘 생겨 갔다.
와중에 언수 씨의 계획과 결심들은 동시에 서고 있었다. 마시던 자리에서 있던 사람들이 죄다 나자빠지고 제정신인 사람이 언수 씨 하나만 남게 되자 슬그머니 근로자들이 수용된 방으로 돌아왔다. 헨리와 야부 씨는 잠에 들지 않고 있었다. 문을 지키던 예의 그 깍두기는 언수 씨를 보고는 새끼 출세했네, 하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헨리와 야부 씨는 언수 씨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었으나 방에 들어오자 적잖이 당황했다.
"이거 설마 술 냄새요."
"우리는 진짜로 걱정했는데."
약간 섭섭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니었다.
"내일 지푸라기를 작업 명목으로 대량 불출할건데 어깨에 두 바퀴 정도 감을 정도의 새끼줄 꼴 만큼만 따로 챙겨서 만드십시오.
두 분 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일하시는 분들한테도 다 전달해주셔야 합니다. 반드시입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짓입니까."
"의문스러우시겠지만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작업반장 지시라고 생각하고 도와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낮의 작업시간에 봤던 그 표정이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쉴새없이 작업 지시를 하던 그 표정. 은은한 기세에 슬그머니 눌린 두 사람은 그러기로 약속했다. 추가하듯 언수 씨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검은 명찰 하신 수감자 복장인 분들한테도 전해 주십시오. "
두 사람은 이미 그러기로 약속을 했지만 혼란은 더해졌다. 우리 뿐만이 아니라 수감자들까지 포함된 일이라니. 언수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교도소 두 번째 날의 밤이 지나고 날짜가 바뀌어 갔다.
- 작가의말
누군가에겐 일상이였을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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