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에 도착한 이세계가 하드코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육형
작품등록일 :
2024.06.03 23:12
최근연재일 :
2024.07.02 15:28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966
추천수 :
9
글자수 :
112,839

작성
24.06.12 00:45
조회
37
추천
0
글자
13쪽

폭풍이 일어나는 날의 밤

DUMMY

다음 날 생각한 일들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로 마음 먹은 이후 언수 씨는 구역 내의 작업물들에 끈과 줄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목책의 방향이 틀어지는 지점마다 끄트머리가 휘어진 말뚝을 박았다. 세울 예정인 자리에는 얇은 줄들로 윤곽을 잡았다.

작업들 도중엔 길이를 수시로 확인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길이와 굵기는 제각각이지만 튼튼한 강도의 줄을 3개 만들어 가운데가 묶인 8자 형태로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

방의 동료들에게 부탁했던 내용을 확인해 보니,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짤막한 새끼줄을 제각각의 방법으로 소지하거나 중간중간 만들고 있었다.

현장 대부분에 넓이를 측정하기 위한 줄이 쳐졌는데 이는 언수 씨가 사전에 확인해볼 일이 있어 의도한 배치였다.


'제발 돼라. 제발.'


아무 줄이나 붙잡고 특기를 시도해 보자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연결된 줄이 스르륵 풀리는 것이 보였다. 연결 및 결속 도구 이용이라고 했던가. 이 정도로 큰 범위로 사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도박에 가까운 도전이었지만 성공한 셈이었기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침에 별도로 준비한 도면 하나를 들고 바로 현장 사무실로 향했다.이것은 언수 씨가 완전히 새로 준비한 설계도다. 얼핏 보기엔 통신선로 설계도 같은 모양새다. 케이블 말고 다른 것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 차이였지만.


"대규모 함정을 만들 수 있다고?"


현장사무실에서 밥을 먹던 리더급들은 매우 흥미가 동한다는 기색이다.


"산맥 통행로 부근을 위주로 작동하는 함정을 만들 겁니다."


언수 씨의 의견은 교도소로 들어오게 되는 인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통행로 쪽에 줄을 사용한 함정들을 만들어 두자는 것이다. 감시 인원들의 피로도 줄어들고 동행한 무장병력들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게 골자였다. 나라를 상대로 농성할 생각을 하는 놈들이 이 계획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진짜 대단한 놈이구만 당연히 만들어야지. 어떻게 설치들 할건진 당연히 생각을 해 뒀겠지?"


'알아듣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심기에 거슬릴 겁니다.'


도면을 만드는 것보다 알아듣기 쉽게 고치는 것이 더 큰 고역이었다. 그림들을 추가로 곁들이고 몇 단어로 끝날 걸 문장 단위로 길게 늘여서 한참 동안 설명을 하고 난 뒤에야 대부분 납득을 했다.


"어지간하면 밧줄과 고정핀 정도로 끝납니다만 분량이 많이 필요합니다."


"자재는 얼마든 가져다 써도 좋으니 시작이나 하라구."


혹시나 감시하겠다고 따라온다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잠깐 했지만 기우였다. 현장사무실부터 시작해서 작업현장의 감시들까지 이 놈들은 사람을 감시하지 작업을 감시하는게 아니었다. 산길에서 매복하고 있던 놈들도 피차 마찬가지라서 언수 씨를 포함해서 따라온 작업자들이 열심히 일만 하고 허튼 짓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내 본체만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같이 언수 씨가 극도로 혐오하는 모냥새들이지만 그 때문에 계획이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으니 되려 다행이었다.


"이건 함정이 아니군요."


언수 씨가 지정해서 따라온 비슷한 특기자 몇 명은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들을 챘다.


"그렇지요 이건 곧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혹시라도 놈들이 들을 수도 있으니 지금은 조심합시다."


산길에 함정(으로 위장한 것)을 설치하는 데에는 거의 하루의 대부분이 걸렸다. 함정이라기 보다는 거미줄에 가까운 모양새였고, 그 끄트머리는 교도소 쪽으로 내려와 작업현장 대부분에 연결되어 있었다. 설치된 줄들에 특기를 써 보니 여전히 작동했다.

반드시 조사해 두어야만 할 것이 또 있었기에 이번에는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근로자들 호위 역할로 따라왔던 전사들 중에서 복무를 정상적으로 마치고 전역한 사람이 있었다.


"혹시 군대에서 통용되는 암호나 부호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까."


"기억하고 있소만 군 외부에서 함부로 퍼뜨리고 다닐 만한 정보는 아닌데."


"우리 모두가 사는데 꼭 필요한 일입니다. 도와 주십시오."


계획을 세심히 설명하며 설득하자 이내 수긍하고 돕겠다고 했다. 언수 씨가 필요한 내용을 말하자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는 것이다.


"자네 참 대담하군. 내 상세히 알려주기는 하겠소만 아무래도 암호화된 내용들이다 보니 평범하게 전달하는 것보다는 몇 배는 어려울 거요."


전직 군인은 점과 선으로 만들어진 암호화 메시지를 만들어 주었고 그것을 외우는 것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방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한참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수감자들 사이에선 언수 씨를 거의 동생취급 하는 상황이었기에 깍두기가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이 천운이었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의 도움으로 외우던 암호를 비로소 다 했다, 싶은 생각이 들고 눈을 감자마자 빠져들듯 잠들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은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각 마을에서 차출한 인원들이 교도소 쪽으로 향하는 날이었기에 언수 씨는 산맥에 구축해 놓은 선들에 아침부터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챈 감시들의 지적을 받았다.


"뭐 해 지금 혹시 꾀부리냐?"


"죄송합니다. 몸상태가 약간 좋지 않아서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너가 이제 뭐 좀 된 것 같은가 보다."


바로 칼날이 바짝 선 질책이 날아와 꽂히자 더이상 한 곳에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신경이 두 군데로 동시에 쏠리면 자칫 일을 그르치게 된다. 산길에서 매복해 있는 놈들이 파견인원들을 자신보다 먼저 눈치채면 죄다 수포로 돌아가 버릴 일이었다.

시간은 이틀 전 자신이 도착했던 그 때인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고 놈들이 혹시라도 나보다 먼저 발견해 버린 거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 순간 또다시 손에 쥐어 본 줄에서 신호가 왔다.


'들어 왔구나!'


언수 씨가 산에 설치해 놓은 것은 사람의 기척을 줄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거대한 망이었다. 줄을 다루고 있을 때에만 알아차릴 수가 있기에 작업을 하는 척 수시로 체크를 했지만 마을의 차출자들이 산길에 들어선 이상 바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하필 그 순간에 또다시 감시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이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줄만 붙잡고 있다간 바로 의심을 사고 죄다 물거품이 된다.

지척에 있던 팀원이었던 헨리와 야부는 언수 씨의 급박한 표정을 보고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들 역시 사전에 공유한 계획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뭐라도 해야만 해.


"멍청한 새끼! 벽돌을 이 모양으로 쌓는 놈이 어디 있어?"


"네놈이 만들어놓은 작업대는 정상이냐? 장난감이라도 만들려고?"


볼륨만 큰 국어책 읽는 소리에 작위적인 대화였지만 두 사람은 아무튼 계속해서 소란을 이어나갔고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 바로 시선이 옮겨진 이쪽 지역의 감시가 특유의 쒸익대는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미안하고 고맙다 친구들. 지체 없이 간밤에 외워 둔 암호문을 산맥 입구쪽에 도달했을 사람들 쪽으로 신호해서 보냈다. 저 쪽에선 무심결에 밟은 밧줄들이 들썩이는 기현상을 목격할 것이다. 땅에 깔려 있는 몇 가닥의 줄기는 점과 선 모양으로 꿈틀대며 암호화된 다음 내용을 표현했다.


-지금 산맥에 들어 오신 분들께서는 급히 더이상의 진입을 멈추십시오. 교도소는 지금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점령된 상태입니다.

신호를 제대로 보셨다면 즉시 수도쪽에 보고하여 병력을 요청해 주십시오. 바로 뒤돌아 귀환해주시기만 한다면 이쪽에선 알 수 있으니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표식을 한 사람들은 겁박당해 있는 사람들이니 진압 도중에 눈에 띄어도 공격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정말 중요한 일이니 마지막 요청만큼은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분명 완벽하게 외웠다고 생각했건만 중간에 몇 번이나 버벅이고 나서야 제대로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메시지가 끝나고 나자 황급히 뒤돌아서 움직이는 신호가 느껴졌고 그제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뒤늦게야 확인한 헨리와 야부는 사이좋게도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은 상태가 되어 의료실 쪽에 실려 가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언수 씨와 눈이 마주치더니 엄지를 치켜 올리는 것이다.



"오늘 근처 차출자들 들어 오는 날 아니었나."


"그러게 말이다. 함정에 걸려 버둥대는 꼴들 보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겠구만."


오늘의 작업이 또다시 마무리되자 낮 시간 산길의 매복인원들이 잡담을 하며 내려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더 이상 차출자들이 교도소로 들어와 인질들이 늘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빠른 시일 내에 수도의 병력들이 몰려들어와 무방비의 폭도들을 진압하게 될 것이다. 남은 건 그 때까지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버티는 것 뿐.

헨리와 야부는 부러진 듯 해 보이는 부위들에 부목만 대강 붙인 채로 방 안에 널부러져 있었다. 언수 씨는 표정이 어두워져 그 둘을 각각 침대 위에 제대로 눕혔다.


"우리 아주 잘 했지요. 일도 잘 풀린 거고."


"물론입니다. 이제 저 놈들한테는 조만간 정의가 구현되는 거에요. 조금만 더 힘냅시다."


"그런데 이 상태론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겠는데요. 저 놈들이 일 못하게 된 사람들을 그냥 놔둘까요."


"제가 어떻게든 할테니 오늘은 걱정 마시고 주무십시오."




그 날은 제대로 잘 수 없는 날이었다.

교도소 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이후 서너 시간 쯤 지나자 구역 곳곳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다니는 몽둥이를 든 수감자들은 하나같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얼굴로 철문들을 따고 다니며 호통을 치는 것이다.


"죄다 일어나서 튀어 나와!"


어찌나 다급하게 몰아붙였는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인원들이 깨어나 작업 구역에 모였다. 한밤중인데도 작업 구역의 처참한 모습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언수 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벌써 이렇게 되다니'


수감자 몇 명이 근처 횃불에 불을 올리자 광경이 더욱 환하게 보였다. 오늘 작업해 놓았던 목책이니 텐트 등 지시받아서 작업한 것들이 죄다 무너져 내려앉아 있는 것이었다.

곧 미역머리 생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이희성이 이리 나와라."


언수 씨는 최대한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연기하며 앞으로 나섰지만 생크는 특별한 질책으로 긴 말을 하지는 않았고 즉시 솥뚜껑만한 주먹을 내뻗는 것이다. 눈 앞이 번쩍하고 다리가 풀리니 멱살이 잡혀 몸이 절로 올라갔다. 다음으로 배에 충격이 오더니 숨이 확 막혔다. 그제서야 귀에 뭔가 말이 들려오는 것이다.


"네가 우릴 다 엿먹인 거지."


애초에 이 녀석들이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 줄 의리도 이유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언수 씨와 도면을 봤던 기술자들은 적당히 겉모습만 며칠 유지될 만큼 작업을 허술하게 해 놓을 생각이었다. 애초에 고쳐놓은 도면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물건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눈 앞에 있는 놈들이 그런 걸 꼼꼼하게 고려할 일은 만무했고 공기는 그저 살벌해져 갈 뿐이었다.


"됐고 너 포함해서 작업 책임졌던 놈들 다 튀어 나와라. 너네는 살려 둘 수가 없다."


"당신들이 그렇게 만들라고 시킨거잖수."


아래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귀를 의심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이 일제히 언수 씨에게 쏠렸다. 누워서 배를 부여잡고 있었지만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제대로 된 도면을 안 주니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리가 없는 거 아뇨. 맨땅에서 콩날 거라는 기대라도 한 거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우람차게 꺾는 소리를 한 세트 내더니 주변에서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낚아 채고는 흡사 스윙 포즈 같은 걸 잡는 것이다. 팔을 치켜올리니 눈앞에 생크가 신고 있는 가죽 신발이 보였다. 녀석의 가죽 신발은 냄새가 참 고약했다.


"됐어 다 들어가서 자라고 해. 이거면 충분해."


이놈들은 결국 얼마 후에 진압당하긴 하겠지만 결국 나는 태어난 고향이 아닌 전생한 세상에서 죽는구나. 기구하기도 하지. 엄마도 보고싶고 아빠도 보고싶고.

여기 와서 처음으로 먹어 본 그 맛대가리 없던 콩밥 생각이 났다.


몽둥이 내려치는 것 치고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살짝 눈을 떠 올려다 보았다.

눈에 보인 건 횃불 빛이 반사되어 시뻘겋게 빛나는 전신 갑주와 몸을 대각으로 가로지르는 머리 둘 달린 호랑이 무늬 휘장이었다.

그 갑옷을 입은 거한은 생크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부동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갑옷은 한 두명이 아니었다.






작가의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서른일곱에 도착한 이세계가 하드코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 산 넘어 산이니 첩첩산중 24.07.02 26 0 12쪽
20 모두는 하나를 위해 24.06.23 20 0 11쪽
19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 24.06.20 26 0 12쪽
18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죠 24.06.19 24 0 12쪽
17 두 사람은 나락페어 24.06.18 31 0 11쪽
16 위험한 초대 24.06.17 35 0 12쪽
15 깨어지지 않는 것 24.06.16 33 0 12쪽
14 하얀 도화지 24.06.15 29 0 11쪽
13 순수함의 양면성 24.06.14 45 0 11쪽
12 혼이 담긴 구라 24.06.13 38 0 13쪽
11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 24.06.13 30 0 12쪽
10 세상만사 사필귀정 24.06.12 31 0 12쪽
» 폭풍이 일어나는 날의 밤 24.06.12 38 0 13쪽
8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24.06.11 43 0 11쪽
7 누군가는 해야하잖아 24.06.10 50 0 13쪽
6 젊어서 고생은 돈 받고 하는것 24.06.09 49 0 12쪽
5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24.06.08 58 1 13쪽
4 누구나 하나쯤은 24.06.07 64 2 15쪽
3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4 24.06.06 80 2 14쪽
2 하드코어로 시작하는 인생 24.06.05 86 1 12쪽
1 언수 씨의 어느 날 +2 24.06.04 131 3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