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사필귀정

갑옷의 거한들은 복사해서 붙여넣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체구가 거대했다.
교도소를 점거했던 녀석들 중에서도 덩치가 가장 큰 녀석쯤 되어야 간신히 비교가 될 정도였다.
투구는 숨쉬는 구멍만 뚫려 있는 수준이라 표정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것도 무시무시했다. 무표정으로 눈에 띄는 수감자들을 짓밟고 들어 메치고 두들겨 패고 있었다.
등짝에는 제각각 메이스, 대검, 장창 등의 무기가 장착되어 있었는데 꺼내서 쓰지조차 않았다. 내려치는 거대한 건틀릿에 두 방 이상 저항하는 죄수가 없었다.
생크의 머리를 한 손으로 집어올렸던 거한은 그를 저 멀리 집어던지더니 이내 언수 씨를 내려다보고는 무릎 한 쪽을 구부려 다가오는 것이다.
"자네가 이희성이라는 사람이군."
살벌한 외형에 어울리는 중저음의 정중한 목소리였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언수 씨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근처의 벽에 등을 기대는 모양새로 앉혀 두고는 다시 움직이는 것이었다.
"일은 금방 끝날 것이니 잠깐만 기다리시오."
언수 씨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려 주변을 먼저 둘러 보았다. 새끼줄. 내가 모두에게 분명 전달을 부탁했을 텐데. 다들 제대로 착용 했을까.
몇 사람, 대부분의 사람. 그리고 검은 명찰들. 확인한 언수 씨는 전진하려는 거한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좌측어깨 위쪽매듭, 좌측어깨 위쪽매듭입니다."
"분명 그런 전달이 있었지. 책임지고 구별할테니 안심하시오."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가던 수감자들은 발악이라도 하듯 제각각의 자질구레한 특기를 내질렀는데 갑옷의 거한들은 특기에 대한 대처마저도 살벌했다.
한 명 한 명이 불주먹 레딩 씨의 상위호환이었다. 오로지 싸우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특기자들을 모아 놓은 듯했다.
백여 명 쯤 되어 보이던 그들은 왼쪽 어깨에 새끼줄을 동여매고 위쪽에 매듭을 지은 사람들은 칼같이 구분하여 손대지 않았다.
반면에 폭동에 참여했던 수감자들은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찾아내어 반죽음을 만들었다.
쓸데없이 숨는 것을 시도한 몇몇 수감자들 때문에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어 십여 분 정도가 걸려 상황은 거의 정리되었다.
진압 행동이 종료되었다고 판단한 거한들은 다시 한번 현장을 돌면서 혼란해하거나 패닉에 빠져 있는 근로자와 직원들, 고용된 용병들을 하나하나 부축해 내며 넓은 쪽으로 인도했다.
반대쪽에선 몸 성한 자가 거의 없는 수감자들을 포박하여 또 한 쪽에 몰아 넣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안도한 사람들 사이에선 곧 웅성웅성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목소리들이었다.
"저 사람들이 수도 진압군인가 보다."
"우린 이제 산 거야."
진압군 중 한 명이 건물 내부에서 명단 하나를 들고 나와 수감자들의 명단을 확인했다. 처음에 언수 씨를 부축했던 사람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감자들을 몰아 넣은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언수 씨 역시 몸을 추스려 해방된 사람들 사이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확인하고 제일 먼저 튀어나온건 헨리와 야부 씨다.
여러 군데 부러져서 불편한 사람들 맞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달려 와서는 부둥켜안고 울먹이는 것이다.
"희성 씨 멀쩡한 거죠."
"남 걱정할 때도 아니면서."
그리고 무리 사이로 향하려 하자 진압된 수감자 무리 쪽에서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희성아 이희성. 여기 좀 봐 다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얼굴 반쪽이 부어오른채로 결박당해 있는 미역머리 생크가 언수 씨를 부르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대체 뭘...
가까이 가 보니 무언가를 주저리주저리 지껄이고 있다.
"내가 감투도 씌워 주고 편하게 봐 줬는데 모른 척 할 수 없는 거잖아.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다오. 우리 사이 형님 동생 사이잖냐."
수긍한다는 듯이 언수 씨는 약간 뒤쪽에서 무언가 일처리를 하고 있는 진압군 쪽으로 다가갔다. 생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이내 달려 다가오는 언수 씨를 보고는 일이 뭔가 잘 풀렸나 싶었지만 지척까지 왔는데도 멈추지를 않는 것이다.
가속도 받은 그 상태로 몸을 던져 날아차기를 날렸다. 생크의 코뼈는 이때 주저앉았다.
"너랑 나랑은 이런 사이다. 좆빵새야."
힘조절도 안하고 지저분하게 들이박은 날아차기는 꼴이 우습게 되었다. 언수 씨는 등 뒤로 생크를 깔고 누운 모양새로 자빠졌다. 그렇지만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등 밑에 깔린 생크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팔꿈치로 내리치고 머리를 뒤로 들이박으면서 내리치고. 숫제 허리를 크게 들어올려서 궁둥이로 내리찍었다.
처음에 언수 씨를 챙겨주었던 그 진압군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엄있게 천천히 다가와서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언수 씨를 제지했다.
팔을 붙잡아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뒤엔 한 쪽 발로 사커킥을 계속해서 날리는 행동을 멈추라고 말로 제지했다. 말이 떨어진 이후에도 두 번 더 실행하는 모습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았다.
미묘하게 평안해진 듯한 언수 씨의 표정을 살핀 진압군은 이내 주의 사항을 일렀다.
"불필요한 사적제재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뒤엉킨 언수 씨와 생크의 모습이 분리되고 나서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고 혼란에 빠져 있던 옆쪽의 사람들은 뒤늦게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환호성은 길게 이어졌다. 진압군은 딱히 환호성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주 길게 이어졌다.
그날 밤 수감자가 아닌 사람들은 제대로 된 직원 숙소에 모여서 잤다.
다음 날 아침 잠이 깨어 하나 둘 나온 사람들은 죄수들을 호송하기 위한 교통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일을 하고 있던 군인들. 진압 작업을 했던 갑옷 거한의 병력들은 갑옷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잠도 자지 않고 뒷처리들을 한 듯 했지만 피곤한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나 움직임이 지난 밤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다.
절뚝거리며 나온 야부 씨와 언수 씨는 멀찍이서 흥미롭다는 듯 광경들을 구경했다.
"저 정도는 되어야 수도에서 군인생활 하는거네요."
"그러게요 완전 터미네이터네."
"터미 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긴장이 어지간히 풀리긴 풀린 듯 했다. 진압군은 풀려난 사람들에게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무너진 잔해들을 수습하고 복구 불가능해 보이는 시설들을 해체했다. 거기에 도착한 호송행렬에 수감자들을 몰아넣는 작업까지 일사천리였다.
계속 구경이나 하겠다는 야부 씨를 뒤로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숙소 경비를 하던 군인 하나가 힐끔 쳐다보더니 놀랍게도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이희성 씨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어젯 밤에도 그렇고 어째서 자신을 알고 있는 건가 싶어서 무작정 물어보았다.
신호를 받고 돌아갔던 차출자 일행은 바로 수도로 긴급속보를 보냈다. 진위 확인을 위해 신호 내용을 분석해보니 연결 및 결속 도구 이용 특기자가 분명히 명단에 있었고 날짜조차 일치했기에 수도에서 즉시 병력을 파견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냥 단순히 경과일 뿐이고, 지체없이 일을 실행시킨 언수 씨의 소문은 별개로 퍼졌다.
"용기와 지혜는 군인 이전에 남자의 덕목인 법이죠."
민간 근로자가 감시를 속여서 수도에 도움을 요청할 계획을 실행시키고 피아식별 대책까지 짜서 어려웠을 밤중의 진압 작업에 쓸데없는 희생까지 줄였다.
리스펙트가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희성 씨 모르는 사람 우리 부대 중에는 없습니다."
감개가 무량하고 어깨가 들썩거릴 충동이 일었지만 최대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원래 용무를 전했다.
"궁금한 것도 있고 처지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것저것 여쭈어 볼 담당자분이 계시진 않습니까."
"마침 대장님께서도 희성 씨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모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쪽의 동료에게 가 보십시오."
지목된 군인에게 말을 걸어 따라가 보니 예의 그 현장 사무실을 지휘본부로 쓰고 있었다.
더 이상 무력 쓸 일이 없다고 판단을 했는지 모두 투구를 벗은 모양새였는데, 한 명 한 명의 인상이 아라고른이고 에다드 스타크였다. 얼마 전에 수감자들 모여 있을 때랑은 다른 분위기로 압도되는 장소였다.
"이희성 씨 아니오."
가장 먼저 발견한 군인이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세상 진지한 시선들이 쏠리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한 사람씩 악수를 권하고 있다.
이 사람들 전생 전 세상으로 치면 어떤 지위일까. 소위 중위 대위쯤 될까. 아니야 그렇다기엔 나이가 좀 있어 보여. 중령 대령쯤일까. 설마 스타는 아니겠지.
영양가 없는 추측들을 하는 사이에 악수 한 바퀴가 돌았다.
"전달 듣고 오신 거요."
이 목소리는 그 날 밤 자신을 부축해 주고 생크를 쥐어패던 걸 '제지' 해 준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아라고른 인상이었다.
이런 자리에선 어떻게 해야 하더라... 관등성명, 관등성명인데 군인이 아니니 자기소개 느낌으로 해야 할지 싶었다. 최대한 절도 있는 느낌으로다가.
"교도소 작업자 이희성입니다."
"나는 진압군 중대장 헤밍턴이오."
교도소를 점령한 폭도들의 진압을 신속하게 할 수 있던 건 명백히 언수 씨의 덕분이라고 했다.
때문에 감사패 증정이니 보상이니 하는 예정들이 있으니 수도까지 동행해 달라는 것이다.
영 께름칙하긴 했다. 죄질 고약한 사상범에서 한순간에 유공자라니.
가짜 이름과 설정도 만들고 요 며칠간 일부러 수염도 깎지 않았다. 인상착의가 같이 올라갔을 테니 최대한 전생 직후와 다르게 보이려고 나름 짱구를 굴린 셈이다.
뭣보다 이 상황에서 분위기가, 그리고 거절할 합당한 핑계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당장 이언수라는 정체를 들키지는 않지 않을까... 그리고 군사작전에 공을 세운 민간 근로자를 도망 중인 사상범이라고 쉽게 추측하지는 않겠지?
"알겠습니다. 따라가도록 하지요. 그리고 저 역시 궁금한 점이 있어서 찾아온 건데요."
일단은 수감자들과 근로자들에 대해서였다. 사람들의 처우는 딱히 복잡해질 일은 없었다.
수감자들은 수도에 일시적으로 이송했다가 전국으로 나눠서 이감한다고 했다. 한 번 뭉쳐서 들고일어난 전력이 있으니 예홉 교도소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다시 오는 사람은 극소수일 거라고 한다.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은 원하면 귀환시켜주거나 계속 머무르면서 복구 작업에 고용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하나만 더요. 신호를 받은 사람들 돌아간 뒤로 기껏해야 반나절인데 어떻게 이리 빨리 오신 겁니까."
그러자 헤밍턴 대장의 표정이 싸악 바뀌면서 단호해지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군사 기밀이오. 그럼 우리도 회의를 계속해야 하니 희성 씨는 슬슬 돌아가 주시겠소."
우리는 행군 속도가 빠릅니다. 말들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지역 곳곳에 주둔군이 있습니다. 같은 말이 아니었다. 군사 기밀이었다.
더 이상 캐묻거나 궁금한 기색을 하면 안된다는 본능적인 감이 왔다.
언수 씨가 사무실을 나가자 회의 중이던 군인들은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말을 이어갔다.
"눈치도 빠른 사람입니다. 행동력이나 용기도 그렇고 어딜 봐도 그냥 평범한 근로자가 아닌 걸로 보입니다."
"아직 확실한 건 그 무엇도 없소. 긴장 풀지들 말고 예의주시 하시오."
언수 씨는 자신을 둘러싸고 또 다른 의혹이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을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만큼은 영 께름칙했다. 대체 저만한 병력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도달한 것일까. 심지어 굳이 군사기밀이라며 말을 아끼다니.
- 작가의말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텔레비전이 욕은 안 가르쳐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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