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에 도착한 이세계가 하드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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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형
작품등록일 :
2024.06.03 23:12
최근연재일 :
2024.07.0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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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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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의 양면성

DUMMY

수도에서 높기로는 몇 손가락을 다투는 종탑이 있다.

솟아올라 있는 종탑을 지지하고 있는 지붕 역시 만만치 않은 높이다.

여기에 세 사람이 올라와 있다.

헨리와 야부 씨, 그리고 가재를 먹어치워 버린 여자.

그 여자는 걸터앉은 모양새로 일자형 망원경을 최대한 늘려서 보고 있었다.


"그렇게 있으면 좀 덜 합니까?"


"무리하지 마시고요. 그냥 바싹 엎드리세요."


엉덩이를 뒤로 애매하게 뺀 상태로 진땀을 흘리던 두 남자는 이내 시키는 대로 하고선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지붕에 올라온 이후로부터 그들의 불안정했던 호흡들이 그제서야 진정되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 여자는 이내 두 사람에게 보고 있는 광경들에 대해 세심하게 물어 보기 시작했다.


"폰테인 과일상회. 네 보이네요."


"희성 씨와 우리는 거기에서 헤어졌습니다."


지목해 준 장소에서 주변을 좀 더 둘러보니 망원경을 접었다.

미치겠네, 하는 외마디를 질겅질겅 씹어내던지듯 말했다.

그 모습들을 잠시 보던 야부 씨는 쭈뼛쭈뼛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소개도 없이 다짜고짜 따라오라니."


"아무 이름이나 만들어서 불러요."


"세상에."


여자는 언수 씨의 행방 외에는 일절 관심없다는 듯한 언행을 하고 있었다.

헨리와 야부 씨는 머릿속으로 아예 단정을 내려 놓고선 수근댔다.


"희성 씨와 무슨 사이일까요."


"알면서 물어봅니까."


"역시 그렇겠지요."


두 사람이 나름 소리죽여 말하는 대강의 내용이 그대로 귀에 스며들어 왔지만 고정된 시선은 풀리지 않았다.

수도 본성의 주변에는 행정기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그 건물 중의 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수 씨와 여자와의 관계를 제멋대로 예상하긴 했지만 의문스러운 점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다.

헨리 씨는 다가가며 그나저나, 하며 기척을 했다. 심각한 시선 그대로 헨리 씨를 향했다.


"그런데 희성 씨가 왜 좆됐다는 겁니까."


"그 사람 사상범으로 잡혀 갔을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여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찌르는 듯한 눈빛과 말투를 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아직 안 늦었어요. 난 필요한 거 다 물어 봤어요.

더 이상 인생 복잡해지기 싫으면 여기서 발 빼요."


당장 지붕 내려가서 오늘 일이랑 언수 씨에 대해 다 잊고 얌전히 돌아 가라는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잘못 펼친 사상범과 잘못 엮이면 인생이 피곤해 진다.

당신들이 언수 씨의 복잡한 사정에 엮여줄 이유가 있느냐고. 이 여자는 다소 냉랭하게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헨리와 야부라는 남자는 나름 싸나이였던 모양이다.


'우리 모두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그 때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은 가슴에 언수 씨를 이미 동료로 박아 놓은 상태였다.


"알았으니까 계속 말해 봐요."


"당신들 다시 봤어요. 제 이름은 제이미에요."


제이미는 언수 씨와 처음의 마을에서 이야기하고 무슨 사유로 잡혀 들어갈 죄목이 생긴 건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이희성이 본명이 아니었다니."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단시간에 요약을 했다.

엄청난 생략들이 발생했지만 헨리와 야부 씨는 그럭저럭 이해함과 동시에 경악했다.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습니까."


말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습격을 하겠는가 잠입을 하겠는가. 생각을 하고 나니 우울해졌다.

그러나 제이미는 그 말대로라는 듯이 긍정하는 것이다.


"맞아요. 뭐라든 해야죠."


그리고 윗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만한 수첩을 꺼냈다.


"그러려면 적합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요."


검지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 위쪽을 손에 물고 숨을 강하게 내쉬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졌다.





언수 씨는 왕녀의 예쁜 이야기들을 잠시 넋을 잃고 듣고 있었다.


"일단은 여기까지에요."


들고 읽던 노트를 탁 소리나게 덮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이 없는 것이다.

언수 씨는 눈치가 백단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생각과 말을 지어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냥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아주 좋은 이야기입니다 왕녀님."


"진심으로요?"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생생하고도 감동적입니다. 말씀 중에 나온 꽃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웹소설의 댓글에도 비슷한 말을 쓴 적이 있었다.

언수 씨는 댓글을 잘 달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에는 감상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쁜 스토리에 배경 묘사를 잘 하던 작가였는데 언수 씨가 유일하게 끝까지 따라갔던 작품이었다.

구멍문이 머리 위에 위치하여 표정은 살필 수가 없었지만 언수 씨는 분명히 들었다.

어린아이의 기쁨에 찬 짧은 웃음이다.

왜 아주 짧게 웃고 다시 숨을 가다듬는지는 모르지만 왕녀의 감정 표현이란 그래야만 하는 거겠지.


"이것은 제가 만든 것들 중에서도... 스스로가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에요."


"대단하십니다 왕녀님. 만든 이야기가 더 있으신 모양이로군요."


"하지만 우리 수상은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방금 했던 이야기는 언수 씨보다 먼저 수상에게도 했던 적이 있는데 들은 체 만 체 하면서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수상은 국정에 바빠 창작의 즐거움을 누릴 새가 없는 듯 하군요. 왕녀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헤아리셔야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만든 다른 이야기를 할 때엔 수상도 매우 즐거워하며 오랜 시간 들어줘요."


내가 잘못 짚었구나. 그래도 그 로보트 같은 수상이 어린 왕녀가 만든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 줄 줄도 안다니 의외였다.

심지어 즐거워했다니. 무슨 줄거리였을까.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동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인도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또다시 동심으로 빠져 들어갈 기대를 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 언수 씨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태운 배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모험을 떠난 선원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정체불명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끔찍한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묘사와 전개가 어린아이가 창작한 이야기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정교하면서도 잔혹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질 때 쯤에 돼서야 뒷 이야기가 끊겼다.


"이것도 일단은 여기까지 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언수 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백단까지 쌓아 올린 눈치라는 녀석을 사용해야만 했다.


"훌륭하긴 합니다만 만드신 이야기들 사이의 온도차가.... 온도차가 크군요..."


첫 번째 이야기 이후와는 달리 눈에 띄게 횡설수설하는 언수 씨를 보며 왕녀는 약간 어리둥절하였다.


"혹시 어딘가가 불편하신 건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 시간 이전에도 수상과 대면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답니다.

단순 피로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갈 테니 쉬도록 하세요.

하지만 다음 시간부터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본분을 잘 해 주시길 기대할게요."


"왕녀님, 죄송합니다만 이야기꾼은 저를 말씀하신 거겠지요."


왕녀는 물러가기 직전 한 가지를 더 알려 주었다.

맥사르 수상이 자신을 이야기꾼이라 소개시켜 주며 만나 볼 것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그를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아 보십시오."


오늘은 공교롭게도 왕녀가 만들어 낸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의 두 가지 이야기만 들었다.

이 다음부터는 언수 씨의 차례인 것이다. 부담감이 느껴졌지만 생각은 미리 해 두어야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었다. 전생 전의 이야기를 직접 요구하는 것으론 모자랐던 것일까.

비록 지어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듣고 가 놓고선 다음은 왕녀를 오게 하다니.


"왕녀님께서 만드신 것. 그리고 그가 이야기 해 줄 것들 모두 말이지요."


심지어 이번엔 서로간에 이야기를 주고받아 보란다.

수상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면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이야기를 수상이 즐거워 하며 들었다는 그 광경.

그 광경을 상상하니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쉽사리 상상이 되질 않는다.

전생 전 세상에서조차 대부분의 독자라면 손사래를 칠 정도의 깊고도 어두운 묘사였다.

그런 공포물을, 그것도 열 살이 조금 넘을 듯한 어린아이가 만든 이야기를 즐겁다는 듯이 오랜 시간 집중한다니.

대체 뭐 하는 놈이란 말인가?



석양이 지나가자 밤하늘에 짙은 파란색과 보라색이 뒤섞였다.

발에 쪽지를 묶은 채로 날아가던 올빼미에 안광이 켜졌다.

잘 훈련받은 올빼미는 내려앉아야 할 곳을 정확하게 찾았다.

어느 마을의 어귀에 모닥불이 타고 있었고 제각각인 체형의 남자 네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왔구나 울 애기."


"우웩."


올빼미는 가장 덩치가 큰 체구의 남자의 손에 내려앉아서는 발에서 쪽지가 풀리자마자 눈을 감으며 머리를 디미는 것이다.

덩치 큰 남자는 쪽지를 옆자리에 있던 마른 남자에게 넘기고는 올빼미와 노는데 금새 정신이 팔렸다.


"어이쿠 세상에."


고의적으로 과장된 몸짓을 하자 덩치를 제외한 두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이번엔 뭐냐? 또 납치냐? 보수는 얼마냐?"


옆자리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오자 마른 남자는 그 쪽으로 쪽지를 넘겼다.


"누님이시오."


두건 속의 얼굴은 화색이 돔과 동시에 약간의 긴장이 섞인 그런 표정이다.

쪽지를 건네 받은 남자는 앞의 둘과는 달리 내용을 주의 깊게 읽었다.

그리고는 점점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다.


"아니 누님! 이게 대체 무슨...아이구! 아..."


튕겨오르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만 휘청거리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작은 키의 남자가 모닥불 너머로 껑충 뛰어오르더니 휘청대는 남자를 붙잡았다.


"아직 아물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런대."


괴로운 표정을 짓는 남자를 다시 자리에 앉혀 놓고선 자신도 쪽지를 읽었다.


-4인조들

저번 일에 봤던 이언수 기억하지

이번에는 빼 와야 한다

장소는 수도 감금실

날짜는 급함

준비 최대한 빨리 해서 오도록

약속장소는 늘 거기

보수는 하는 거 봐서


작은 키는 쪽지를 구깃구깃 뭉쳐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 가운데 한참동안 앓는 소리를 내던 남자의 고통이 잦아든 듯 했다.

이내 답답하다는 듯이 두건을 풀어 버린다.

잘 깎여진 대머리가 드러났다.


"도대체 이언수라는 놈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지?"


얼마 전 언수 씨를 납치하려다가 된통 깨지고 도망쳤던 그 4인조였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잡아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번엔 잡힌 걸 빼 가지고 오라니.

하지만 누님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뒤지기 싫으면 해 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작가의말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이다. 문제는 이들이 커서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게 하느냐이다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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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에 도착한 이세계가 하드코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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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산 넘어 산이니 첩첩산중 24.07.02 26 0 12쪽
20 모두는 하나를 위해 24.06.23 20 0 11쪽
19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 24.06.20 26 0 12쪽
18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죠 24.06.19 24 0 12쪽
17 두 사람은 나락페어 24.06.18 31 0 11쪽
16 위험한 초대 24.06.17 35 0 12쪽
15 깨어지지 않는 것 24.06.16 33 0 12쪽
14 하얀 도화지 24.06.15 29 0 11쪽
» 순수함의 양면성 24.06.14 45 0 11쪽
12 혼이 담긴 구라 24.06.13 38 0 13쪽
11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 24.06.13 30 0 12쪽
10 세상만사 사필귀정 24.06.12 31 0 12쪽
9 폭풍이 일어나는 날의 밤 24.06.12 37 0 13쪽
8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24.06.11 43 0 11쪽
7 누군가는 해야하잖아 24.06.10 50 0 13쪽
6 젊어서 고생은 돈 받고 하는것 24.06.09 49 0 12쪽
5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24.06.08 58 1 13쪽
4 누구나 하나쯤은 24.06.07 64 2 15쪽
3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4 24.06.06 79 2 14쪽
2 하드코어로 시작하는 인생 24.06.05 86 1 12쪽
1 언수 씨의 어느 날 +2 24.06.04 131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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