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지지 않는 것

처음에는 숫자.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 그 다음에는 널리 퍼진 처형 방법.
그것들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살벌한 낱말들이 된다.
쓰는 사람에 따라서 효과는 배가 되기도 한다.
머리에 굵직한 흉터 한 줄기가 있는 험상굳은 사람이 그걸 쉴새없이 내뱉었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내뱉는 단어들은 선량한 사내 두 명을 석상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뭘 봐! 아니 내가 대체 왜....아!"
"머머리야 힘내자 할수있다!"
손을 움직여 만들고 있는 것은 밧줄이었다.
평범하게 지푸라기를 꼬아서 만드는 밧줄이 아니다.
꼬아서 만드는 중간중간, 바늘과 실을 박아 넣고 있다.
줄의 강도를 높이려는 개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없는데 형님께서 제일 잘하시니 별 수 있소?"
"주둥아리 닫지 못해!"
마른 남자는 손바닥을 허공에 향하며 과장되게 으쓱, 주둥아리를 닫았다.
"머머리야 이제 다 돼가는 거 같은데 얼마나 걸려?"
"누님, 이름 부르기 귀찮으시면 적어도 첫째라고 하십시오.
일반인들도 있는데 창피하게 뭡니까?"
"알았어 알았어. 얼마나 남았느냐고."
"한 시간 안이면 끝납니다."
밧줄이 완성되면 그들은 즉시 즉시 행동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계획은 심플하지만 만만치 않은데, 제작한 밧줄을 감금된 언수 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윽고 밧줄 세 묶음이 완성되었다.
'목표를 방 가운데로 하고 힘 풀기...'
쉽지가 않다. 역시 이미지 트레이닝 만으로는 원하는 그림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온갖 방법을 궁리해보고 도달한 결론은 꾀병이었다.
'저 녀석은 내가 그 심문 방에서 뭘 하고 오는지 모르겠지.'
사실 거기서 하는 일이라곤 별 게 아니다. 매번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를 하고 오는 게 전부다.
하지만 이런 경비가 뭘 알까? 그런 음습한 곳에서 잘못 폭행당해 어디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별 의심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연기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하느냐다.
도박도 섞여 있다. 들어와서 몸을 검사하는 경비와 피지컬 차이가 얼마나 날지였다.
물론 이쪽에서는 방심한 상대를 기습한다는 어드밴티지가 있긴 한데...
수도 경비병이라는 직책 상 눈에 보이는 이상의 무예가 있으면 일이 꼬인다.
아무튼 지금은 연습이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기는 하지만 연습은 많아서 나쁠 것 없다.
다시 일어나서 방 구석에 섰다.
다행히 녀석은 방 안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서성이는 것 정도는 허용 범위로 친다.
'목표를 방 가운데로 하고 힘풀기...'
아까보다는 이미지가 확실히 선명해졌다.
남은 건 실전이고 다녀오면 바로 실행해야 했다.
"이언수 시간이다."
맥사르 씨 오늘로 이야기는 마지막일 거야.
일이 잘 풀린다면 말이지만 어쩐지 근자감이 드는 것이다.
이건 확실하게 성공하겠다 싶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겉으로 보기엔 주변에 있는 다른 행정기관 건물들과 딱히 다를 바가 없는 곳이었다.
일행은 제이미가 지목한 장소를 각각의 장소에서 보고 있었다.
"그 날, 멀리서 봤을 때 저 곳을 경비하던 인원이 눈에 띄게 늘어 있었어요."
제이미가 헨리와 야부 씨의 가재를 집어먹었던 그 날이었다.
이것을 확인했던 때까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리고 4인조 역시 준비 철저하게 하라는 지시대로 필요한 일을 했다.
"누님께서 쪽지 보내셨던 그 날, 우리는 이 근처의 건물을 싹 조사했어.
사람을 가두어 둘 만한 지하 시설이 있던 곳은 저 곳 하나 뿐이더군."
꼬박 하루를 취객과 노숙자 행세를 하며 근처를 주시하던 헨리와 야부 씨도 건져낸 것이 있었다.
"그리고 수상과 왕녀님께서도 출입하시는 걸 확인했습니다. 평소엔 두 분이 드나들 일이 없는 곳이랍니다."
그때 촉이 왔다는 것이다. 분명 저 곳의 지하에 잡혀 있을 거라고.
"첫 번째는 머머리를 안으로 들여보낼 작전이야."
"아, 진짜."
그들이 들어갈 곳은 엄연한 공공기관이었다. 밤에는 문을 닫고 보안이 강화된다.
그래서 대낮에 들어가기로 했다.
"당신들 특기 코드 뭐죠?"
헨리와 야부 씨가 주섬주섬 꺼낸 벽돌기술자와 목공수 특기증을 보더니 마른 남자는 어딘가에 다녀와선 도구상자 두 개를 내밀었다.
미장과 목공 작업 셋트였다.
"이... 이건 50년 전통 수공구 명가 샌슨 가문의..."
"경비는 누님께서 주실 거니까 필요 없어. 가져."
감격도 잠시 그들은 다음 계획을 듣고는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머머리는 오늘 두 분의 일일 조수가 되는 거예요."
"뭐라고요?" "뭐라고!"
"연기들 잘 해 주시기 바래요. 우리 행크 화이팅!"
그렇게 행크는 애용하던 두건의 매듭을 머리 앞으로 묶은 모양새를 하고, 허리를 꾸부린 채 두 사람 사이에 위치해 입구에 다가간 것이다.
기관의 경비는 나 벽돌쟁이요 목공쟁이요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주의사항 하나만 말했다.
"방문자 출입 일지만 잊지 말고 쓰십시오."
"이 녀석......은 우리 조수인데 써야 할까요."
"셋 중에 한 명만 써도 돼요."
그렇게 세 사람은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들어왔다.
일단은 사람들이 주로 돌아다니는 로비를 벗어나 화장실과 이어지는 복도 쪽에서 머리를 맞댔다.
"오늘 일은 뭐 일이었으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겠어."
표정은 안 그랬다.
"우리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는 일단 들어왔으니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됐어. 너희들은 적당히 시간 끌다가 나가던가 말던가.
아 그리고 나갈 때는 아까 입구에 있던 놈 괜히 의심 안 하게 자리 비우거나 교대할때 뜨라구."
그러더니 작업 가방에 구겨서 들어온 후드를 꺼내는 것이다. 족히 무릎까지는 닿을 법한 길이다.
"뭘 봐? 여기서부터는 내 밥줄이야.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가."
그야 이쪽에서도 바라던 일이지. 엉거주춤 두 사람이 자리를 완전히 뜨자 행크는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대강의 패턴은 이런 모양새로군.
그는 이어서 주머니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꺼냈다.
대부분 바늘과 실, 단추와 같은 재봉 도구였다.
맥사르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언수 씨는 일부러 다리에 힘을 약간 풀고 희미한 눈을 연기했다.
양 옆에서 인솔하는 병사로 하여금 이 새끼 왜 이래, 하는 정도의 의심만 사야 했다.
제일 중요한 건 방문 감시하는 경비병이었으니까.
이윽고 방 안에 들어오자 결의에 찬 표정을 한번 하고, 마지막 한 번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번 하고.
실행에 나섰다.
'목표를 방 가운데로 하고 힘 풀기...'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가 있었다. 둔탁한 풀썩, 하는 소리가 방 밖으로 완벽하게 새어 나갔다.
구멍문이 열리더니 건조한 시선이 흘러 들어왔다.
"뭐 하나?"
발음도 중요해. 이 사이에 혀를 최대한 고정해 두는 형태를 유지했다.
"시시시무중에 잘모모얻어마은드으으한...."
경비는 성실한 남자였다. 인정도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아예 문 쪽으로 돌리고는 내려다보았다.
언수 씨의 말에 대한 의심은 딱히 없었고 빠른 조치를 하려는 것 처럼 보였다.
나이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마마마아기도 고고고통럽듭니다아"
"조금만 기다려. 의료진 데려올 테니깐."
경비는 그러고선 문의 잠금장치를 강하게 두 번 위아래로 흔들어 확인하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뜨는 것이다.
모든 일이 제대로 꼬였다.
경비가 돌아오고, 몸 상태를 제대로 볼 의사가 돌아오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단이 나올 것이다.
아무 짓도 안 당한 놈이 고문을 당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머릿속에 새하얘졌다.
일이 기이하게 제대로 풀렸다.
'저 새끼 왜 지금 자리를 비워?'
이 천재일우의 기회에 문 쪽으로 잽싸게 이동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건물에 무사히 들어오고 사전에 조사했던 대로 숨겨둔 지하통로도 찾았다.
문제는 언수 씨를 가둬 둔 것이 확실해 보이는 방에 대단히 성실한 녀석이 근무를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난관을 어쩌지, 싶은 찰나에 갑자기 문 쪽을 쳐다보더니 자리를 뜨는 것이다.
문을 쿵쿵대며 치자 구멍문에 언수 씨의 얼굴이 천천히 올라왔다.
새하얬던 얼굴에 핏기가 올라오더니 귀신이라도 본 표정을 하는 것이다.
"어! 대머리!"
"놀랄 시간조차 없어! 빨랑 나와!"
놀랄 부분에서 이미 밧줄 세 타래를 구멍문으로 던져 넣었다.
언수 씨는 척수반사적으로 얇은 굵기의 밧줄을 받아들고 구멍문 밖으로 다시 줄을 뻗었다.
밧줄에 뱀 영혼이라도 빙의된 마냥 잠금장치를 낼름거리듯 훑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이렇게 나오겠지, 하고 상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개쩌는 놈이구만 이거."
크게 숨을 한번 내쉰 언수 씨는 이제 어디로 가냐고. 라고 표정으로 물었다.
행크는 두 다리로 대답했다.
"도대체 이런 길들은 어떻게 아는 거요?"
"넌 지금 그게 중요하냐?"
이때쯤에 저 멀리에서 커다란 소란이 일어난 듯 많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감금실로 복귀한 경비가 경종을 울린 듯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중간중간 올라가는 계단들을 밟자, 시선이 가려진 채 걸어가던 길들의 느낌이 역순으로 떠올랐다.
가장 첫번째로 느꼈던 감촉은 풀밭이었다.
"일단은 한 시름 놨어."
들어왔던 기관 건물의 뒤쪽 방향으로 비밀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평범한 행정 기관의 정원 치고는 어이없을 정도로 넓고 화려하다.
"우리 어디 궁전 같은 곳으로 나온 겁니까?"
"눈치도 빠른 놈일세."
"진짜라구요?"
진짜로 왕궁의 뒤뜰 정원이라고 했다.
왕궁의 정원 치고는 아주 야아악간 관리가 소홀한 곳이라고 한다.
성벽의 중간중간에 이끼도 얼룩덜룩 끼어 있고, 무릎 정도 자란 잡초도 군데군데 있었다.
"맙소사. 우리 좆된 것 같다."
왕궁 뒤뜰의 정원에는 작은 가제보가 하나 있었는데, 누가 이런 곳에 오기나 하겠느냐는 느낌으로 작고 소박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문제는 누가 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이야기꾼이 아닌가요?"
무언가를 쓰고 있던 노트를 접고, 품에 안고선 다가오는 것이다.
아무리 행크가 성깔에 자신있는 불량배일 지언정 자신의 처지는 아는 남자였다.
즉시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언수 씨를 쳐다보고선 생각했다. 이 새낀 대체 뭐하는 놈이지?
"돌아가는 건가요?"
왕녀는 언수 씨를 질책조차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올려보는 채로 말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뢸 수가 없군요. 송구하게도 도망치는 중이랍니다."
"야 이..."
그러나 언수 씨가 대신 말하지 않았는가. 어느 안전이라고.
목이 달아날 뻔한 실수를 간신히 면한 행크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로 식은땀을 흘릴 뿐이다.
"하지만 저에게 해 줄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으신가요."
언수 씨는 허리를 굽혔다.
"왕녀님 혹시 약속 하시는 법 아십니까?"
"서로간의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지키는 것이라고 배웠어요."
"제대로 알고 계십니다만 이것은 절대로, 절대로 지킬 것을 맹세한다는 뜻입니다."
전생 전 세상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약속의 제스쳐를 했다.
"저랑 똑같이 하세요."
왕녀의 작은 손이 대각선 위로 올라왔다.
새끼손가락이 걸리자 왕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게 진짜 약속입니다. 왕녀님 제가 약속드리지요.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어제 말씀드리기로 했던 것들을 모두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약속입니다."
그리고 언수 씨는 행크의 어깨를 끌어 올렸다.
"됐어요. 이제 튑시다."
행크는 이마를 쓰윽 훔치고는 왕녀의 눈치를 보았다.
왕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약속이에요."
왕녀는 뒤를 돌아서서 글을 쓰던 가제보 쪽으로 돌아갔고 두 남자 역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곧 소란은 왕궁 전체를 뒤덮었고 정원에 와 있던 왕녀에게도 호위들이 급히 달려와 궁 안쪽으로 보호했다.
하지만 왕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작가의말
소중하게. 잃어버리지 않게. 잊어버리지 않게.
끌어안아 두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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