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초대

헨리와 야부 씨는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정문에서 근무하던 경비의 모자에 새똥이 정확하게 명중했고,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행크의 말대로 건물 안에서 대충 작업할 각을 잡는 연기를 필사적으로 하면서 눈치를 보는 와중이었다.
멀리서 건물 안을 응시하던 덩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딱 맟춘 것처럼 일이 된다니 놀랍네요."
"그런데 대낮에 웬 올빼미입니까?"
"신경 쓸 것 없어요."
그 와중에 어쩐지 덩치는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깨에 앉아 있는 올빼미조차도.
"아무튼 그....행크 씨는 알아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나온 거고요."
"맞아요. 그럼 이제 꺼져, 뭐 이런 식으로 말했겠죠."
하루 이틀 일한 사이 아니구나... 싶은 짐작이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술을 마시러 가자는 것이다.
이 일(?)이 처음인 선량한 시민이었던 두 사람이 귀를 의심한 것도 당연하다.
"다음 계획은 없는 겁니까?"
"있죠, 데리고 돌아오면 늦게 온 만큼 진탕 맥이는 거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제이미는 그저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마른 체구의 남자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우리 일처리는 거진 이렇소. 대개 누군가를 던져넣은 뒤는 보통 재량이지.
다섯 중 누구나가 될 수 있지만 큰형님이 제일 많았고 누님이 두번째요.
그렇기 때문에 만사태평이신 거요."
언수 씨가 이 사람들이랑 손잡고 일할 날은 안 오겠군.
마주본 헨리와 야부 씨는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분명 뒤뜰 정원을 무난히 벗어났고 행크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웬수같은 고정 거래처에게 바가지를 쓰고 얻은 왕궁 평면도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정확했다.
"개구멍 표시는 서비스다."
물론 검증되지 않은 서비스 자료는 믿을 것이 아니었다.
평면도는 그럭저럭 일치하는 듯 했지만 녀석들이 성벽 여기저기 동그라미 쳐둔 개구멍은 죄다 막혀 있었다.
그렇겠지. 왕궁 성벽 관리인들을 뭘로 보고.
애초에 평소 문단속을 안 하거나 잠금장치가 없는 문들이 위치한 곳들만 구불구불 빠져나올 셈이었다.
시간은 야아아악간 걸릴 지언정 그게 제일 정확했다.
"이 길 맞아요? 믿어도 되는 거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 한 마디는 행크의 뱃속을 제대로 긁었다.
"그럼 너 혼자 알아서 갈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물론 행크가 솔직하지 못한 그런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나가는 데에 명백하게 언수 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왕궁 내부에서 외부로 차근차근 빠져 나간다. 미리 체크해 둔 제일 낮은 성벽지대에서 언수 씨의 줄쟁이 특기로 벽을 타는 게 계획이었다.
그래서 이 밉살스러운 놈을 어떻게든 데려 온 것이다. 그런데 속도 모르고 속을 긁고 있다.
"기분 상하는 건 알겠지만 지금 우리 빙빙 돌고 있는 것 같다고요."
결국 퉁명스럽게 화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성깔은 있을망정 멍청한 남자는 아니었다.
지금은 일을 망친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젠장, 나도 알고 있어. 대체 뭐가 문제지?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물론 계획은 완벽했다. 다른 변수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이미 성 밖으로 나가 모이기로 한 장소에서 첫 잔을 따라 받았을 것이다.
"창고 쪽문과 위치를 바꿔 놓은 계단 아래에서 멈췄습니다."
"혹시 모르니 정문 쪽 작업자들에게 타일도 반대로 깔라고 지시해라. 그리고 계속 주시하면서 보고해."
설치와 해체가 쉬운 구조물들의 위치를 뒤바꾸어 놓는 작업은 탈출 알람이 뜨자마자 시작되었다.
수도에서 일정 등급 이상인 죄인의 탈옥 사건이 벌어질 경우 필요하다면 고위 지휘관의 지시 아래 시행되는 규약이다.
왕궁을 포함한 주변 지역 역시 짜여져 있었고 병사들은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날 같은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놈들이 슬슬 방향감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만 체포할까요?"
왕궁에서 제일 높은 망루에 경비대장과 맥사르가 있었다.
수상은 경비에게서 망원경을 받아 행크와 언수 씨의 위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계단 옆 벽에 바싹 붙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광경이 훤히 보였다.
"좋아. 병력을 움직여서 놈들을 압박해라.
다만 체포는 아니야."
"그럼 거리만 유지한 상태로 일단 대기하라는 말씀이신지?"
"아니. 놈들을 나락으로 유인해."
경비대장은 수상이 왜 체포 작전 정도를 지휘하는 일에 굳이 자신을 불렀는지 알게 되었다.
나락의 존재는 군 내에서도 일정 계급 이상만 알고 있는 기밀이다.
"작전은 이언수의 체포 아니었습니까...?"
수상은 고개를 찬찬히 젓는다.
"계획대로면 조금 더 알아 냈어야 하는 게 맞다만...
놈들과 접촉한 이상 빠르게 싹을 자르는 게 더 나아.
나머지는 왕녀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하면 되니 지시대로 해라."
곧 지시들이 전달되었고 병력들이 급작스럽게 움직였다.
당연히 행크와 언수 씨도 이상한 낌새를 바로 눈치챘다.
"어쩐지 미적지근하게 움직인다 싶더니..."
토끼 사냥을 방불케 하는 몰이가 벌어졌다.
여기서 쫓아라 라는 고함이 울리고, 반대쪽에서 거기다 라는 고함이 울리고...
겨울산 어린아이들의 포위망에 걸려든 토끼 꼬라지가 된 두 남자는 머릿속이 금새 혼란해졌다.
"이, 이것 봐요. 대머리 씨."
"내 이름은 행크다!"
"좋습니다 행크 씨. 나 지금 기억났어요. 당신 투명인간이지 않습니까."
행크는 이 정신없는 와중 제자리에 발을 딱 세웠다. 언수 씨의 마음에 희망이 빛이 몰아쳤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당신이 몸을 숨겼다 드러냈다 하면서 놈들을 교란시키면 우리 둘 다 살 수 있어요. 얼른 하자구요."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발 뒤꿈치 쪽으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기분을 느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반동 그대로 다다른 저지대 바닥에서 땅이 꺼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경비대장이 망원경을 접었다.
"나락에 성공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수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루 출구 쪽으로 향했다.
"병력들 철수 명령하고 상황 종료시켜. 관리인한테 연락하고."
행크와 언수 씨가 밟아서 꺼진 블록의 타일을 복구하는 작업자 몇 명만 남았고, 곧 병력은 철수했다.
잠깐 동안의 탈출 소동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왕녀한테는 미안하게 되었구만... 그 녀석이 마음에 든 것 같았는데."
복귀하던 수상은 끌끌끌, 하며 작은 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앗!"
좀 더 반응이 느렸다면 깊고깊은 돌바닥에서 온몸이 깨어져 죽게 되었을 것이다.
언수 씨는 추락의 패닉상태에서 정신을 차리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어찌나 깊은지 뒤늦게 정신을 추스린 상태에서도 몸은 여전히 자유낙하 중이었고 그제서야 줄을 양쪽으로 던졌다.
얇은 줄은 행크의 허리에 감겼고 굵은 줄은 벽면의 바위에 걸렸다.
위에서부터 바위, 언수 씨, 행크의 순서로 줄에 엮은 굴비 꼴이 되었다.
"행크 씨 살아있으면 말 좀 해보쇼."
아래쪽에서는 대답 대신 아주 강도높은 욕설들이 올라왔다.
언수 씨는 그러려니 했다. 어조를 보니 자신을 향한 건 아니었고, 세상을 저주하는 뉘앙스였기에. 잠시 재촉하지 않고 그대로 뒀다.
행크는 기분이 약간 진정되었는지 그제서야 평소의 말투로 대답했다.
"일단은 멀쩡해. 아무튼 끌어 올려줘."
바위 옆에 난 공간에 어거지로 구겨 앉으니 성인 남성 두 명 정도는 그럭저럭 가능했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나니, 언수 씨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따져야 할 것은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안 한 거냐구요."
"뭐를?"
마찬가지로 멘탈을 추스르고 있는 터였는데 갑작스러운 물음에 성깔보다는 물음표가 먼저였다.
갑자기 뭔 소리지? 뭔가를 생략한 비약 같기는 한데 바로 눈치를 못 채고 있자 추궁이 계속되었다.
"당신 특기잖습니까. 사라지는거. 그 상황에서 그만한 게 없는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제서야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든 것을 이해했다. 행크는 침까지 튀겨가며 항변했다.
"미친놈아! 사람이 투명해지면 그게 특기냐? 초능력이지!"
어이가 없기는 언수 씨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그 날 밤에는 분명..."
행크는 입술을 한 번 거세게 모으더니 뭔가 말을 하려다 삼키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리곤 들쳐메고 있던 작업 가방에서 후드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잡동사니들을 우르르 쏟았다.
작은 쪽가위를 연거푸 움직여서 후드에 덕지덕지 붙은 단추니 천쪼가리들을 전부 떼어내었다.
이어서 후드를 한 번 뒤집더니 방금 떼어 낸 조각들을 전혀 새로운 패턴으로 기워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뒤집어 써서 입자 언수 씨는 그저 입이 쩍 벌어질 뿐이었다.
"이건 그냥 위장복이야! 네놈 납치할 때도 그냥 주변 패턴으로 만든 것 뿐이고...속이 시원하지?"
움직이는 입이나 얼마 없는 빛을 끌어모으고 있는 눈동자, 그조차도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귀신도 어리둥절할 속임수였다. 눈 앞에 사람이 있는데 없다니.
"이봐, 영업 비밀이지만 지금은 아무튼 여기서 나가야 하니 알려 주겠어. 나는 재봉사야. 그냥 이거 만드는 짓거리를
빨리 할 수 있는 게 다라고. 알아 들어? 네놈 밧줄도 다 내가 만들었어.
짜증 나네 진짜. 이 놈이 뭐라고 이렇게 고약하게 엮이는 거냐고?"
두 남자는 고개를 서로 반대편으로 돌리고는 한 명은 입맛을 다시고 한 명은 머리를 긁적였다.
몇 초간 흉흉한 공기가 흘렀지만 이대로 시간 낭비를 할 때가 아니라는 건 둘 다 알고 있었다.
"일단 도로 올라가는 건 말이 안 되겠죠."
하기야 감도 안 잡힐 만큼 떨어진데다가 위로 뚫린 구멍은 까마득히 높다.
설상가상으로 구조 자체가 아래쪽으로 넓어지는 형태였다.
"아무래도 그게 맞는 거 같은데. 저 아래쪽을 보라고."
그들이 목숨을 부지한 지대는 한 치 앞이 안 보였지만 아래쪽에는 확실하게 일렁이는 불꽃들이 있었다.
규칙적인 배치에 확실한 세기로 보이는 불꽃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뜻이다.
이런 깊이의 지하에 어째서 사람이 설치한 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다음 문제였다.
"오오... 그 높이에서 살아남다니..."
줄쟁이라기에 약간 기대는 했다만 만족시켜 주는군요.."
"그래..맹탕은 아니야.
첫 관문은 통과한 걸로 쳐줘도 괜찮겠군.."
나락의 구덩이 중간중간에는 구멍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모르면 절대 못 찾을 법한 절묘한 위치에 있었다. 사람 한두 명이 적절히 드나들 법한 크기였다.
괴한 둘이 그 중 하나에서 나타났는데 그것도 상당한 높이였다.
행크와 언수 씨가 낑낑대며 내려가는 모습이 보일 만한 장소였다. 멀리서 그들을 응시하는 검은자위는 극도로 커져 있었다.
둘 중 키가 매우 작고 등이 굽어 보이는 남자가 무언가를 쉴새없이 메모하며 말했다.
"일단은 느긋이 기다리시고...놈들이 내려온다면 본격적으로 놀아보도록 하지요."
"그래. 그것들 미리 깨워 둬.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먹이고."
그리고 두 사람은 모습을 드러냈던 구멍 속으로 그대로 사라졌다.
그들은 그저 떨어진 나락에서 무사히 바닥에 도착하는 것 부터가 관문이라고 했다. 그것도 첫 번째 관문.
이후에 그들이 말한 놀이가 무슨 놀이인지 행크와 언수 씨가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저 내려갈 뿐이었다.
- 작가의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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