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VII

“라엘족 중의 하나가 도주해서 행성에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를 추적하고자 하니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
“일족의 하나가 범죄를? 어떤 범죄를 저질렀길래 그러시죠?”
“선주종족을 대량으로 학살한 죄가 있습니다.”
“설마······”
“필모어라는 자입니다. 아시고 계시죠?”
“아······그래 있었습니다. 비밀 임무를 이끄는 수장이었던 자였죠. 수상한 자이긴 했었던... 그래서, 내가 도와주면 나는 어떤 이득을 얻는 건가요?”
“무사히 그대들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건...잠시 생각 좀 해봐도 될까요?”
부함장의 말에 우글이 드라에게 물었고 드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시했다.
그리고 이틀 뒤, 부함장 이그티스가 드라와 독대했다.
“이미 우리가 불시착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더군요.”
“그렇죠.”
“필모어와 종족 간의 텔레파시로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극구 부정하는 것을 보아하니, 필모어라는 자가 우리도 모르게 큰일을 벌였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라엘족의 텔레파시는 생각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기억의 일부, 그리고 감정이 공유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거나 적대적 악의를 가지고 있으면 거절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필모어의 텔레파시 거절은 범죄의 자백과 마찬가지였다.
“돕겠습니다. 저희의 임무는 단순한 배송 임무였지, 대량 학살 같은 반우주 문명 범죄를 돕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악마 같은 외모와는 달리 라엘족 부함장 이그티스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이그티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필모어의 위치를 특정해 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찾았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이그티스는 놀랍게도 제국 시대의 고묘의 안에 마련되어 있는 비처에 있었고, 드라는 홀로 그 고묘에 들어갔다. 그렇게 함정을 헤쳐 나가고 마지막 관문까지 뚫고 도달한 그곳에는 불시착한 우주선에 있던 동면기기와 똑같은 동면기기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 악마의 외양을 가진 라엘족 하나가 누워있었다.
“뭐야······이 자식 곧 죽을 거 같은데······”
그랬다. 필모어라고 불리었던 라엘족은 도주를 위해 빙의를 거듭한 끝에 자기 몸에 다시 갇힌 상태였다.
“태청아. 얘 왜 이런 상태냐?”
“빙의가 거절되어 자기 몸에 갇힌 겁니다.”
“빙의가 거절돼?”
“학노자가 사용했던 빙의술은 단전이 없거나 약해진 경우에만 단전을 차지하는 형태로 빙의하는 것입니다만, 상대의 단전이 건강하고 영력이 강하면 오히려 빙의하려던 자가 영혼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튕겨 나와 자기 몸에 갇히게 됩니다.”
“아······그래?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빙의하려다 이런 상태가 된 거라는 말이지?”
사실은 드라가 가르친 아드리아나 여왕의 직속 호위 중의 하나가 필모어를 우연히 찾아내어 급습했었다. 그 과정에서 빙의했던 몸이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입자, 마지막 발악으로 호위 5호에 빙의하려 했으나, 이미 단전이 생성되었고 여왕에게 받은 수련으로 영력이 강한 상태였기에 튕겨 나온 뒤 이 상태가 된 것이었다. 벌써 천년도 넘은 이전의 이야기였지만, 그 사실은 필모어 자신과 그때 필모어를 죽이고 함정에 빠져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린 5호만 아는 이야기였다.
“그럼 이 녀석 지금 죽이면 되겠네?”
“지금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할 겁니다.”
“좋아. 그럼 해치우지.”
드라는 태청에 짙은 푸른색 강기를 띄운 뒤, 천천히 동면 캡슐 속의 필모어 심장을 향해 찔러넣었다.
‘푸쉬식!’
캡슐의 밀봉이 깨지자, 그 틈으로 캡슐 내에 있던 영양액이 흘러나왔고, 잠들어 있던 필모어의 얼굴이 고통으로 찡그러지더니 다시 편안한 모습이 되었다.
“해치웠나?”
드라가 그 말을 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조용했다.
“그래. 이렇게 싱겁게 끝날 줄은······”
드라가 마지막 말을 뱉을 때, 어디선가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누군가 내 본래 몸을 죽인 모양이로군. 길고 긴 시간이었어.”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유리벽 너머 수백 개의 캡슐이 있었고, 그중 하나의 캡슐에서 깨어난 젊은 필모어로 보이는 자가 있었다.
“네가 문장관, 아니 필모어인가?”
“그렇다. 너는 그래······드라로군. 너였어. 사사건건 나의 일에 훼방을 한 자는.”
“그 캡슐들 모두 너의 클론이냐?”
“하하하······그렇지. 그리고, 이게 전부일까?”
젊어진 필모어는 꽤 미청년 악마였고, 자기 이마를 짚으며 웃던 녀석은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자 모든 나들은 이제 너를 적으로 인식했다. 지금부터 언제든 긴장하고 두려워해라. 이곳의 내가 죽어도 또 다른 곳의 내가 깨어날 것이고 그런 나는 수없이 많다.”
“그래? 그럼 너를 수없이 많이 죽일 수 있겠네? 어디보자······여기 있는 너는 내가 다 죽여도 되겠지?”
‘서걱!’
그 이후로 드라의 일방적인 살육이 시작되었다. 캡슐을 깨고 그 안의 클론을 죽이고 또 죽이고······정말 문자 그대로 수천을 베어냈을 때쯤 고묘의 모든 필모어가 죽었다. 마지막 필모어가 죽으면서 말했다.
“곧 다시 보자.”
“기대하고 있으마.”
그렇게 필모어와 일별한 드라는 반지를 이용해 리치에게 돌아왔다.
리치의 옆에 있던 아드리아나 여왕이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사히 돌아왔네? 간 일은?”
“실컷 죽였어.”
“그럼 해결된 거야?”
“아니.”
“다시 빙의해서 도망쳤어?”
“그런 셈이지. 녀석이 자신의 클론을 수없이 준비해 둔 모양이야. 잠시 자기 몸에 갇혀 있었는데, 그걸 내가 풀어준 모양이고.”
“곤란하게 되었네······”
“뭐, 이제부터 녀석을 실컷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되었지. 아드리아도 녀석을 죽일 기회를 얻게 해줄게.”
“아니······그걸 무슨 선물주듯이 말할 필요는······”
“싫어?”
“아니 좋아.”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왕국만을 수없이 죽인 자의 목을 잘라낼 때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이후 마틸다와 라드리아에게도 사정을 설명하자 더욱 뜨겁게 반응했다.
“계속해서 죽일 수 있어요?”
“죽이고 또 죽일 수 있다구요?”
둘은 살짝 열이 올랐는지, 갑자기 수련해야겠다면서 그날부터 드라에게 검술을 새로 배우고 익혀나갔다.
“흠······뭔가 이제 텔레파시까지 막아내는 방법을 찾아낸 걸지도 모르겠군요.”
라엘족의 이그티스가 노력해도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 된 듯싶었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얼음 안에 냉동되어 있던 이들은 현재의 세상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설리반이 드라의 기억에서 추출한 형태의 ‘서울’을 따라 만든 도시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도시는 설리반의 모선 중간층의 위치한 것으로 서울의 광화문 주위가 거의 그대로 만들어져 있었다. 다만, 도시의 내부 시설은 설리반이 개조해서 완전히 SF급의 편리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기서 지내는 이들에게는 도시에 관광 온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드라. 네게 전언이다.”
“응? 누구로부터?”
관광객처럼 입고 경복궁을 구경하고 있던 일행 중의 하나, 여왕 아드리아나의 기사 칠호가 갑자기 정색하더니 말했다.
“칠 호? 무슨 일인게냐?”
칠 호를 제지하려던 아드리아나를 드라가 막았다.
“일단 들어보죠.”
“그래. 나는 필모어다. 네가 보유한 전력을 살펴보니 가공할 만하더군. 내가 너를 당장 이길 수 없다는 건 알았다. 다만, 너도 지금은 나를 찾을 수 없을 터. 이 상황에서 내가 악마 빙의를 진행하게 한다면 너는 나를 막을 수 없을 테니, 어떤가? 나와 협상하자.”
“협상?”
“그래. 나는 이 작은 행성계에서 벗어나 나의 동족들에게로 돌아가고자 한다. 대신 이 작은 행성계에는 더 이상 악마 빙의를 시도하지 않겠다. 어떠냐?”
“호오······그러니까 여기를 벗어나는 데 도와주면 너는 더는 이 행성계에서는 사고를 안 치겠다?”
“그렇다.”
“싫다.”
“어째서? 내가 악마빙의를 시도하는 걸 막으려던게 아닌가?”
칠 호를 통해 드라의 목적을 대충 눈치챈 후의 제안이었기에 드라가 거절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그래 막으려고 하고 있지. 그러니까 싫다.”
“여기를 벗어나기만 하면 그걸 이뤄주겠다는데도?”
“여기를 벗어나서 또 악마 빙의를 시도할 게 아니냐?”
“아······넌 악마빙의를 통해 이 행성의 생명이 죽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악마 빙의 자체를 싫어하는 거였군.”
“그래. 알았으면 이제 꺼져줄래?”
“잠깐만.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떤가? 악마 빙의를 연구만 하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진실의 수정을 이용해라.”
“호오······그래?”
드라는 그제야 협상을 받아들여 볼까, 고민해해보기로 했다.
“일단 칠 호도 빙의를 풀어주는 것까지 포함하고?”
“그래 좋다.”
“상의해 보지. 칠 호를 냉동시켜 설리반.”
말과 동시에 드라는 시간을 멈추고 칠 호를 냉동 광선 앞에 위치시켰다.
‘사아아아~’
추락한 우주선에서 추출한 냉동 광선의 기술을 탑재한 설리반은 그걸 이용해서 칠 호를 얼렸다.
그리고 커다란 광장에 아드리아나, 마틸다, 라드리아, 그레이엄 등 이 일과 관련되어서 냉동되었던 모두가 모였다. (칠 호도 냉동 캡슐에 들어 있는 채로 회동에 참여했다)
“자 다들 이야기를 들어서 알 겁니다. 당장은 필모어를 추적할 방법이 없고, 이 자를 자신들의 동족으로 돌아가게 하면 악마 빙의를 더는 시도하지 않겠다는 것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