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6화
“성자라···네 놈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근데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야.”
카이던은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 같은 걸 이안의 목에 더 가까이했다.
“어떻게 암영회를 알고, 내 정체를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제 대답에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알게 됐냐면···”
“······.”
“바로, 신께서 알려주셨습니다.”
“······너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정말로 신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이 의심 많은 비밀 요원에게 상태창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같은 의미이긴 하니 넘어가 줬으면 싶은데.
"성자라···그렇다면···”
카이던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검은 형체로 변하더니 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뜀박질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두 인형이 내 앞에서 헐떡였다.
"헥헤···사제님···하흐흐 괜찮으신가요? 헥헤”
여사제는 체력의 한계까지 왔는지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는데 열중이었지만, 성기사는 무거워 보이는 은색 갑옷을 입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사제님, 괜찮으신가요?”
성기사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많은 인원을 사제님께서 처리하신 겁니까?”
아니, 연약한 성자 혼자서 처리할 수 있겠냐?
"그야, 물론···”
그 순간, 카이단의 상태창이 바뀌었다.
[ 상태 : 기대감 -> 살의 ]
"···입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아무런 대처 방법 없이 일을 벌였겠습니까?”
[ 상태 : 살의 -> 기대감 ]
'휴우...오늘 목숨이 자주 왔다 갔다 하네.'
내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성기사는 감격하듯 말했다.
"역시···. 사제, 아니 성자님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카르카 사제의 스킬도 간파해내시고, 거기다 이렇게 뛰어난 무력까지 갖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이들은 내가 자칭 성자라는 것을 알고 진짜 성자인지 시험하기 위해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성자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파랑새를 통해 나를 감시한 것도 내가 성자라는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겠지.
"역시 제가 성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군요. 성자라는 위치가 위치인 만큼 밝혔을 때 신뢰받기 힘들더군요.”
"이해합니다. 저 또한 리브나에서 성자님께서 남기신 기적을 보지 못했다면 믿기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잠깐만요. 정말 당신이 그 성서 속 예언의 성자가 맞다는 건가요?”
카르카 사제는 이제야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제가 그 예언의 성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제가 성자라는 것을 반드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와서 발뺌인가요? 제가 성자라고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성자 사칭죄로, 사형대로 끌고 갈 거라고 해도 말인가요?”
"카르카, 성자님께 무슨···!”
"하하하, 그렇다면 꼭 믿어달라고 말하고 싶네요.”
"지금 장난하는···!”
"저도 죽고 싶지 않으니, 제안을 하나 하죠. 제가 성자라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다만, 그 증명에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신다면 제가 진짜 성자인지, 사칭하는 가짜인지 밝혀지겠지요.”
"뭘···도우면 되죠?”
"저는 수도원의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그 일에 무력과 교권이 필요할 듯합니다만, 저는 무력과 교권 둘 다 가진게 없어서 말입니다.”
나는 언제 깨어났는지 기절한 척 듣고 있는 수도원 사제를 고갯짓하며 말했다.
"···교권은 그렇다 치고 무력까지 필요하신가요?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어 보이는데요?”
그녀는 주위를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음···이건 운 좋게 얻어 걸린 상황이고, 앞으로는 이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군요.”
"하아···말도 안 되는···그래요, 알겠어요. 기사님도 동참하실 거죠?”
"물론이지. 아, 성자님을 못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기사는 당연하듯 즉답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성자를 봤다.
"아하하, 알고 있습니다. 기사님께서 도와주신다니 든든합니다.”
"우리쪽에 종자 한 명 더 있긴 한데, 어딜 갔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일단 우리끼리 먼저 시작하죠. 뭐부터 도와드릴까요?”
"일단은 정보를 좀 더 캐내야겠군요. 수도원장이 궁극적으로 뭘 하고 싶은지, 윗선이 누구인지 말이에요. 저 친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나는 몰래 조금씩 기어서 도망가던 수도원 사제를 보며 말했다.
* * *
수도원장은 미간을 좁힌 채 창가 주변을 끊임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이안이라는 사제가 처음 수도원에 방문 했을 때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겼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쫓을 이유를 만들지 못하고 문전박대한 이유이기도 했다. 같은 교의 일원으로서 외부의 눈이 있었으면 문제가 됐을 수도 있던 일.
하지만, 그런 것보다 그가 돌아갔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그는 파견단과 함께 당당히 걸어들어왔다.
마치 첫 만남에서 무언갈 알아냈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겠다는 눈빛으로 말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다행히도 저 사제와 파견단은 큰 관련이 없어 보였고, 우연히 만나서 동행하는 것이라 했다.
내가 부임하고 일 년이 지났다.
이렇게 의심을 받고 해결한 것도 벌써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저 사제도 그렇고 파견단도 수도원에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오히려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이 누구의 지시인지 생각하니, 그들에게 결정적인 증거만 잡히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나에게 죄를 물을 수 없으리라.
그렇게 미리 준비한 대로 증거불충분으로 파견단이 떠나고, 문제의 사제도 떠날 때가 됐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떠나지 않고, 내게 물어왔다.
“부임 첫날 사건, 당신 짓입니까?”
그 질문을 받은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내가 한 일은 모두 옳은 일들일 텐데, 어째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 것인가.
마치 선생 앞에 학생처럼, 부모 앞에 자식처럼, 신 앞에선 죄인처럼···.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까지의 불안감, 죄책감 같은 감정들은 모두 저 악랄한 놈의 사술인 것을.
‘불온한 이단자의 사술에 당할 뻔했구나.’
그렇게 오해가 풀리니 감정이 차분해졌다.
시간이 꽤나 지났는지, 창밖에는 이미 황혼이 물들어 있었다.
깡패 같은 사제 놈들을 내보낸 지도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다. 원래 같았으면 문제를 해결하고 쪼르르 달려와서 돈이나 달라고 눈치 줄 시간이 훨씬 지난 것이다.
역시나 실패한 것이다.
‘못난 놈들, 쓸모가 없는 구나.'
인상을 찌푸리다가 날아오는 새를 보고 다급히 창가로 다가갔다.
새의 다리에는 묶인 종이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재빨리 꺼내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수도원장에게 보내는 마지막 임무가 쓰여 있었다.
* * *
글을 읽자마자, 산속으로 달렸다.
'마지막 임무, 드디어 이 작은 곳을 벗어나서 큰물로 가는구나!'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았지만, 몇 번이나 가본 길이기에 한 번의 주춤거림 없이 달려 나갔다.
파견단에 보여준 가짜 매장지를 지나 한참을 가니, 상쾌한 느낌의 푸르스름한 오로라가 보였다.
대단한 신성력이 느껴지는 아우라에 몸이 전율했다.
'이 얼마나 순도 높은 신성력인가.'
해당 신성력이 누구한테서 나온 것인지 다시 피부로 느껴졌다.
다시금 자기 행동에 대한 고뇌가 기우인 것을 깨달았다.
새를 통해 받은 서신을 펼치고, 쓰여 있는 주문을 그대로 외쳤다.
무슨 주문인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본인은 그저 교의 충실한 신자이자, 신의 유일한 대리자의 지시를 따를 뿐인 것이다.
이전까지의 불안함이나 일말의 의심이 너무나 죄스럽게 느껴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주문이 끝나자,
막고 있던 푸른 오로라가 사라지고, 내부의 응축된 막대한 사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숨을 못 쉬고 온몸이 경직돼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곧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분의 계획을 착실하게 성공한 자신에 대한 대견함이나 감격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퍼지는 사기를 계속 쐬면 위험하니, 피하고자 조금씩 조금씩 기어갔다.
사기가 퍼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벌써 끈적한 사기의 원형이 내 무릎까지 삼키고 있었다.
삼켜진 부위에서 살을 째는 고통과 뼈를 부수는 고통이 퍼졌다.
"크아아악!!!, 느아아가각!!”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격통으로 정신이 붕괴할 것만 같았다.
고통과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기는 착실히 범위를 넓혀갔다.
허리, 어깨, 머리까지 잠식되고, 마지막으로 떨어진 임무 지시서까지 삼키고 나니, 주위가 드디어 고요해졌다.
끈적한 사기는 꾸물거리더니 찰흙처럼 서로 뭉쳤다.
점점 더해지고 녹아내리고 붙여지고 깎이면서 얼핏 보면 거대한 인형이 되었을 무렵.
그것에 하나의 의지가 새까맣게 눈을 떴다.
그리고 언덕 아래의 도시 쪽을 바라보며 육중한 발을 떼기 시작했다.
* * *
수도원의 사제는 생각보다 아는 게 너무 없었다.
파견단의 숙소로 데려간 사제는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더 이상 정보를 부는 게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제는 둘 다 살려두는 게 나았겠네요.”
나는 어느새 숙소로 돌아온 카이던을 보며 말했다.
"······.”
카이던은 말없이 나를 째려봤다.
[ 상태 : 살의 ]
"···뭐 급박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요. 하하하.”
"아마, 두 사제 모두 아는 게 많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행실을 보니 정식 사제 서임도 받지 않은 자들 같으니, 원장도 크게 쓰지 않았겠지요.”
"중요한 건, 이안님이 자신들을 치부를 들추는 것을 멈추기 위해 벌인 일이 실패했다는 거예요.”
그들은 카이던이 있든지 없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현재 중요한 사안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르카가 숙소에서 카이던을 발견했을 때 그저 한숨을 크게 쉬고 ‘또 어딜 다녀오는···아니 됐습니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파견단원들에게도 카이던은 그저 종자로서로만
"이안님 듣고 계세요?”
"그럼요,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원장은 자신의 치부를 들켰고, 이제까지 수도원에서의 모든 사건 관련 증거들은 사라졌죠.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건의 증거인 저를 다시 없애러 온다는 것인가요?”
"이안님 하나면 다행이죠. 아마 원장은, 아니 그 윗선은 이 도시 자체를 묻어버릴 수도 있어요.”
"···도대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윗선이란 게 어떤 단체일까요? 엄연히 왕국 내 법이 지엄하고, 교단이 치하하는 곳인데 말이죠.”
"···어떤 단체인지는 둘째치고 무언가 큰 사건이 일어날 예감이 들어요. 일단 다 같이 수도원으로 가서 상황을 보는 것이 가장 최선일 것 같아요.”
왠지 그녀의 표정이 난처해 보였다.
"그게 낫겠습니다. 성자님. 일단 원장부터 빠르게 제압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성기사까지 동의하자, 나는 그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거기다 현재로서는 다른 좋은 대안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수도원으로 이동하려 할 때,
쇠를 끌에 가는 듯한 비명과 함께 거대한 발소리가 도시에 퍼졌다.
우리는 다급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쳐나갔다.
중세의 판타지 도시는 가로등 같은 것이 없어서 밤이 되면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달빛과 별빛을 받으면 대낮 같진 않더라고 의외로 식별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눈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좌우로 4미터가 넘어 보이는 육중한 형체의 무언가였다.
그것은 도시의 건물을 부수며,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리에 도시민들 수백 명이 지르는 비명이 묻힐 정도였다.
카르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일이 터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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