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11화
아니, 베이기 직전이었다.
내 목숨이 어렵게나마 붙어있는 찰나에 검은 형체가 흐릿하게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칼날을 막았다.
순간 카이던의 그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두 개의 칼날을 두 개의 손으로 잡은 자는 놀랍게도 도시장이었다.
도시장과 이 녀석들은 한패가 아닌 건가?
"내가 중지 명령을 내렸을 텐데. 어찌하여 일을 진행하는 겁니까?”
도시장의 싸늘한 발언에 두 흑의인이 주춤거렸다.
"도시장님, 상부의 명을 이렇게 갑자기 중지시킬 순 없는 법입니다. 이자를 살리고 싶으신 이유를 모르겠지만, 중지를 원한다면 정식으로 허가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집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흑의인들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나는 이자에게 얻을 것이 있으니, 죽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약 당신들이 방해한다면, 저 또한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장의 발언에 두 흑의인은 반 발짝 물러났다. 아마도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것이리라.
"···당신, 뒷감당은 생각 안 하시는 겁니까?”
집사의 무미건조한 말투에서 처음으로 벗어나는 어투였다.
"나에겐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거지요. 아마 그분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소.”
"···철수해라.”
흑의인은 순식간에 무기를 넣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이 일은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잘 대처하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하고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식당 밖으로 나갔다.
식당 안에는 도시장과 나 그리고 잠든 발더르만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도시장이었다.
"몰라봬서 죄송했습니다. 성자님.”
‘응? 지금 성자라고 한 건가?’
그는 몇십 분 전, 도시장실에서의 문답이 거짓말 같이 느껴질 듯이 나를 성자라 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나를 성자라고 부르는 거지?
무언가 나를 속이려고 꾸미는 연극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했다.
속이기 위해서면 처음부터 나를 의심하지 않고,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을 줬다면 신뢰를 얻기 훨씬 더 쉬웠을 터.
그렇다면 이 상황이 꾸며진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이 전환될 만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인데.
피곤함에 지쳐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일을 만들 시간도 없었고, 만들 수도 없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한 가지 일이 있긴 했다.
‘수정구슬, 그건가?’
분명 도시장의 호언장담으로 시작된 성위 측정이었는데, 수정구슬의 색이 까맣게 나오자, 고장이라고 말하며 자리를 급히 물렸다.
만약에 성위 측정기라는 수정구슬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마이너스가 된 신력으로도 성자라는 사실을 추론했다는 것 일터.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성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째서 그 자리에서 인정하지 않고, 구슬이 고장 났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이제 와서 무릎을 꿇느냐는 것이다.
마치 숨겨야 할 비밀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생각에 잠겨 말할 타이밍을 놓친 것을 고의적인 침묵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는 당황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심기 불편하겠지요. 당연합니다.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는 성자가 악마를 퇴치했다고 해서 제 오랜 임무에 따라 귀하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오랜 임무로 나를 제거하려 했다고?
제거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이 신성력 없이 악마를 퇴치하는 것이라면, 신력을 가진 자를 제거하려고 오래전에 임무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어떤 단체인지 모르지만, 교의 경전에 나오는 신력을 가진 예언의 성자를 죽이기 위한 임무로군.
그런데 내가 언제 이곳에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오랜 임무라고?”
나는 상황에 맞게 편하게 말하기로 했다.
다행히 도시장도 당연하듯 받아들였다.
“네, 그렇습니다. 감히 성자님을 오해해서 그쪽 성자인 줄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고 바로 임무 중단을 명령했지만···이들의 충성심은 제가 아닌 상부에 있기에 이런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쪽 성자랑 그쪽 성자가 뭘 말하는 건데?
알 수 없는 말이 쌓이면서 이해할 수 없는 대화가 되어갔다.
“크흠, 내가 이쪽 성자라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이 오해를 바로잡지 않아야지, 내가 살 수 있다는 강력한 직감이 들었다.
“그건 성위 측정기를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측정기의 색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투명, 노랑, 하얀색입니다. 투명은 신성력을 갖지 않은 자, 노랑은 신성력을 가진 자, 하얀색은 신력을 가진 자로 나뉩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숨겨진 색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검은색이겠군?”
“네, 그렇습니다. 마신의 계약자이자, 대리자로서 세상을 파멸로 이끄실 유일한 분. 마신의 성자, 바로 귀하입니다.”
‘???’
뭐라고? 마신의 성자라고?
이게 무슨 유일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깜짝 놀란 것을 넘어서 어이가 없어서 나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질 뻔했다.
현재 이놈은 새까만 색의 구슬을 보고 나를 마신의 성자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혀 집히는 게 없는 건 아니다.
만약 유일신이 선이고, 마신이 악이라고 한다고 한다면, 내 신력이 양수일 때는 선이고, 음수가 되면 악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나는 지금 유일신의 성자가 아니고, 사기꾼이 아니고, 마신의 성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가?
이 이론이 맞든 맞지 않든, 지금 이 자는 나를 마신의 성자로 생각하니 살려둔 것이다.
살고 싶으면 악신의 성자를 연기해야 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상태창’
[캐릭터 상태창]
이름 : 블라드 체페슈
레벨 : 52
직업 : 도시장
나이 : 320세
특성 : 태양의 저주, 흡혈 충동
스킬 : 흡혈, 변신, 패밀리어 생성
상태 : 당황함
상태창이 고장이 난 게 확실하다. 그게 아니라면···.
[본 상태창은 고장 나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사고 수준을 의심해 보시길 바랍니다.]
‘···?’
나는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던 검색창이 떠올랐다.
‘아니, 태창아. 사람이 320살까지 살 수 있는 거야? 여기는 이세계니까 설정을 막 그냥 이것저것 막 그냥 맘대로 할 수 있는 거냐고?’
[사람은 320살까지 살 수 없습니다.]
‘그럼 고장 난 게 맞잖아!’
[에휴, 저건 사람이 아닙니다. 통칭 흡혈귀로 불리는 밤의 일족입니다.]
상태창은 왠지 점점 사람처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에 신경 쓸 정도로 녀석이 말한 내용이 뇌에 묵직한 잔흔을 남겼다.
‘흡혈귀? 뱀파이어라고? 저 빡빡머리가?’
[밤의 일족이니 흡혈귀는 맞고, 좌우로 긴 옆머리를 가졌으니, 빡빡머리는 아닙니다.]
나는 놀라서 도시장을 봤다.
그는 아직도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게, 도시장.”
나는 일어나는 도시장을 다시 한번 봤다.
150센티미터 중반쯤 되는 작은 키에 양쪽 옆머리에 길게 기른 곱슬머리에 반해 이마로부터 시작되는 5차선쯤 돼 보이는 고속도로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미형은커녕 추남 중의 추남의 것이었다.
사실 위의 단점들이 너무나 강렬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 또한 단점들과 시너지를 낼 수 있게 개성적으로 못생겼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뱀파이어의 하얗고 창백한 미남, 미녀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드워프 종족이 뱀파이어가 된 느낌이랄까?
“그대는 밤의 일족인가?”
내 말에 그가 깜짝 놀랐고, 나 또한 놀랐다.
‘추남은 어떤 표정을 지어도 못생겼구나···’
“네, 맞습니다. 이제 멸족해 버린 일족을 기억해 주시고, 알아주시다니, 저 블라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왜인지 감격하여 다시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가는 모습에 답답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든 생각이 있었다.
‘저 녀석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알아?’
[블라드 체페슈는 멸족에 가까운 상태의 일족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마신의 성자인 당신의 곁에서 마신을 부활시키면서 소원으로 일족의 부흥을 말할 것입니다. - ( 정확도 78% ) ]
‘···이게 되네?’
이세계에 오면서 뇌가 굳은 게 확실하다.
분명 상태창의 검색 기능이 추가됐다. 검색이란 것이 무엇인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답을 해주는 것 아닌가?
진작부터 써먹지 못하고 이제야 사용하는 내 자신을 질책했다.
그런데 정확도라는 건 뭐지?
[질문에 대한 대상의 상태창 및 현장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계산한 결과값의 정확도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알지도 못하고, 상태창도 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정확도가 매우 낮거나, 알 수 없다는 거네?
[네,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뇌세포가 일하시네요.]
이제 기억났다.
태창이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싹수가 없었다는 것을.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도시장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일족의 부흥인가?”
그는 고개 숙인 자세 그대로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답했다.
“예, 성자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유일교를 무너뜨리는 것을 도와라. 그렇다면 너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을 나, 마신의 성자의 이름으로 약조하노라.”
“예!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상태 : 당황함 -> 결연함]
“성자님, 한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해도 좋다.”
“저기 쓰러진 성기사는 신성력이 있는 진짜배기 기사 같습니다. 어찌하여 동행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그가 의심이나 떠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과 말투를 보니, 나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임무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정보를 얻으려는 질문이었다.
“저치는 내가 신의 성자라고 믿는 자이다. 수도의 신전을 습격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하여 데리고 다니는 것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렇게 신성력이 높은 자를 신의 성자라고 속일 수 있다니. 성자님의 지혜와 계략이 마치 살아있는 ‘코덱스 기가스’ 같습니다.”
코···뭐라고?
또 한 번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칭찬한 거겠지.
나는 다음에 상태창으로 검색해 봐야 할 목록에 ‘코덱스 기가스’를 마음속으로 추가 해놓고 입을 열었다.
“과한 칭찬은 자만을 낳지. 나도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네. 그건 그렇고 자네가 속한 곳은 어디인가? 나, 아니 신의 성자를 제거하려는, 자네들이 상부라고 부르는 그곳 말일세.”
내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대충 예상가인 곳이 있었지만,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십수 년 전, 일족을 부흥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중 어떤 자를 만났고, 그의 지시를 따르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지금까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사제처럼 보였지만, 이름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성력과 비슷한 감각을 미세하게 느껴진 걸로 봐서 교의 중책임은 분명했습니다. 질 낮은 신성력은 저 또한 잘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 이후로 수십 년 동안 임무를 맡으면서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새를 통해 정보나 임무를 전달받았을 뿐입니다.”
역시나 현재 유일교가 신의 성자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교는 타락했고, 권력의 맛에 빠져있다. 그것을 타파하려 새로운 신의 대리자가 도착했다는 것은 곧 자기 목이 달아날 것이 임박했다는 사실이기도 했으니.
“그렇다면, 집사는 좀 더 알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집사 또한 저와 같은 입장일 뿐입니다. 다만, 그는 교에 대한 충심보다는 도시 자체를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블라드 체페슈, 이 친구도 상부의 명령에 불복했으니, 추가로 얻을 정보도 없을 터.
문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상부를 따로 부르는 명칭은 없는 건가?”
“저희는 그냥 교의 어두운 부분이 모였다고 해서 그림자회라고 불렀습니다. 정식 명칭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움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눈앞의 상태창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해당 상부의 명칭은 유일교의 암영회입니다. - ( 정확도 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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