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15화
나의 물음에 카르카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교황님께서는 그 어느 편도 아니십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도 중립을 지킨단 말입니까?”
교단이 곪아가고 있는데 교단의 최고 존엄이 중립을 지키는 것은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뒤따른 발더르의 목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교황께서는 백 세를 넘기신 고령으로 외부 활동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이전 대화에서 느꼈던 어색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권력파들이 날뛸 수 있는 여건이 된 것이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권력파놈들이 왕국은 물론 성서 속 예언의 성자님까지 마수를 뻗치다니···이것은 단순한 교리해석를 잘못한 수준이 아닙니다. 이것은······.”
발더르는 왕필의 한탄스러운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왕필 경, 그 이상의 말은 삼가게나. 아직은 그들도 교단의 사제들이네. ”
왕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게 앞에 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성자님. 저는 사실 마부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장필 경께서는 저를 지켜주지 않았습니까? 저라도 자칭 예언의 성자라는 작자를 옆에서 두고 보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감히 성자님을 속이는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사죄할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단한 결심 같은 게 느껴졌다.
“그것 때문이라면 사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속지 않았으니 장필 경도 속이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예? 그것이 무슨···?”
“장필, 올해 40세로 왕국 친위대장으로 충성심이 높고 공명정대한 성격. 아닌가요?”
“헙! 그, 그, 그것을 어떻게?”
“뭐? 친, 친위대장이라고? 왕국의 마지막 등불이라는 그 분이란 말이십니까?”
장필은 어색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호사가들이 지은 허명일 뿐입니다.”
“일단 마차로 이동해요. 치료도 빨리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어서요.”
카르카가 나서서 말이 더 이상 길어지는 상황을 막았다.
마차로 돌아간 후, 장필의 상처를 치료했지만, 상태가 좋지 못해서 임시방편 밖에 되지 못했다.
그래서 곧바로 발더르가 고삐를 잡고 수도로 출발했다.
마차 안은 나, 카르카, 장필이 있었고, 밖에는 일일 마부를 자처한 발더르가 있었다.
장필은 적당한 천을 덮고 자고 있었고, 나는 카르카에게 물었다.
“장필 경은 괜찮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어요. 하지만 완벽하게 치료하려면 신성치료 전문사제에게 진료를 봐야 해요.”
카르카는 조금 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신성력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대상의 자연 회복력을 급격히 상승시키는 일이며, 그것은 마치 상처 부위만 시간 흐름을 빠르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정말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의 영역에서 신성 치유를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드는 것뿐이니까요.”
“그렇군요. 이해하기 어려운 능력이네요.”
“아무튼 상처 회복을 가속하는 만큼 환자의 체력도 많이 소비돼서 체력이 받쳐주지 못할 상처를 회복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신성치유 때문에 사망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신성력을 쏟아부어서 치료할 수 없는 이유에요.”
그녀의 말을 들으니 장필이 치료를 받은 후 곯아떨어진 것이 이해됐다.
왠지 신성 치료도 신력을 통해 가능할 것 같았지만, 신력 소모량을 알 수 없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내 생명력을 대가로 얻은 신력은 매우 소중했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토리아 도시장님이 성자님을 도와주셨다고 하셨죠? 그분은 어디로 가신다고 했죠?”
“아아, 그분은 암영회를 피해 숨을 안전한 곳이 있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틀림없겠죠. 급하게 나오느라 인사도 못 드렸는데요. 그런데 암영회라면 소문만 무성한 그 단체 아닌가요? 실제로 존재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는데 정말 당황스럽네요.”
"암영회가 생각보다 유명한가 봅니다.”
"소문은 무성하죠. 교단에 대해 험담하면 밤손님으로 찾아온다거나, 우리가 평소 생활하는 곳에 숨어 있어서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거나, 20년 지기 친구가 알고 보니 암영회의 첩자였다거나 하는 소문들이요.”
"이곳은 첩자로 유명한 곳이군요. 그래서인지 개개인의 전투력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저희가 상대한 놈들은 아마 일반 암영회원일거에요. 잠입과 암살에 특화되어 있는 회원임에도 전면전에서 교단 성기사와 왕국기사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기본적인 전투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죠.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단체에서 성자님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암영회는 어째서 처음부터 전투에 특화된 회원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저는 진작 죽었을 텐데요.”
"크흠, 그건 암영회밖에 모르겠죠. 그런데 죽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건가요? 성자님은 본인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나 하세요?”
나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차는 수도를 향해 꾸준히 달렸고 다음 날이 되자, 드디어 목표로 했던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다른 지역과 달랐다.
수도 외곽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내부로 들어가려면 성문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교단의 성기사의 것과 비슷한 갑옷을 입은 자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양쪽으로 한 명씩 지키고 있었는데, 특이하게 성기사가 쓰는 무기가 아닌 일반적으로 경비병들이 쓰는 장창을 갖고 있었다.
"무슨 용무로 수도를 방문했나?”
한껏 귀찮음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신전장을 뵈러 왔습니다.”
나는 먼저 나서서 얘기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근무 태만인 데다, 뇌물까지 먹이지 않으면 꿈쩍도 안 할 인상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대했던 예상과 달랐는지 짧지만 잠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에? 크흠, 신전장님은 무슨 일로 만나시는 겁니까?”
그리고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내 말에 무언가 신빙성이 느껴졌는지 말투도 바뀌었다.
"신전장님께 직접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오게 됐습니다. 혹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그는 표정을 바꾸며 흔쾌히 길을 텄다.
하지만 내가 지나고 나자, 장창으로 길을 막으며 일행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보게, 당신들이 어째서 성기사와 닮은 갑옷을 입고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정식 성기사며, 여기 사제도 있으니, 어서 길을 터주게나.”
발더르는 나름대로 공손한 말투였다.
"당신은 수도에 무슨 볼일이 있소?”
"방금 저분의 말을 듣지 못했어요? 신전장님께 보고드린다고 하잖아요!”
"보고는 한 명만 하면 되지 않소? 어째서 자네들 모두가 가려 하는 건가? 현재 불필요한 인원 출입을 삼가라는 명이 내려왔으니 그리 알고 돌아가시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이곳 수도신전 소속 성기사, 발더르다. 도대체 누가 그런 명을 내린 거지?”
"그...그야, 뭐 당연히 왕께서 내리신 명령이오. 아무리 신전소속 성기사라고 할지라도, 왕명을 거역할 셈은 아니겠지?”
그는 얼버무리다가 제대로 된 변명이라도 생각이 났는지 문장의 막바지에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흥, 그렇다면 이 분도 지나갈 수 없는 건가?”
발더르는 그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물었다.
"이분이고, 저분이고 지금은 아무도 들일 수......자, 자, 잠깐만, 장, 장필 경...?”
"지금 왕께서 친위대장인 본인까지 출입을 통제하라고 하셨다고 했나? 자네는 그 말에 자네 목을 걸 수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서 비켜라! "
경비병은 다급히 다른 병사에게 외쳤고, 장필은 수도 안으로 들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장필의 눈치를 보면서도 끝까지 발더르와 카르카는 들여보내지 않았다.
"일단 먼저 신전으로 출발하세요. 저희도 방법을 찾아서 따라갈게요.”
카르카는 어느새 어깨 위에 지저귀는 파랑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그것이 파랑새로 내부와 연락하며 방법을 강구해본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챘고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사실 나는 혼자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하려 했던 이유는 수도로 가는 길을 안내받기 위함과 그들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중에서도 무력이 가장 중요했기에, 이제는 신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지금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따라오는 장필을 보니, 왕국 친위대장의 무력이나 직위는 수도 내에서는 다른 이들보다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써먹기 위해서는 치료가 급선무였다.
"일단 신전으로 가서 치유사제를 찾는 게 우선이겠군요.”
"저 때문에 번거롭게 해드려서 송구합니다, 성자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저를 지키려다 생긴 상처가 아닙니까.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웃음을 끼워 넣자, 감동한 표정을 짓는 장필이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신전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붐볐다.
입구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길래 유동 인구가 적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길목마다 시장과 노래꾼, 구경꾼들이 많았다.
일부 사람들은 하얀 천을 두르고 이열종대로 걷고 있었다.
"흰 천을 두른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 순환의례를 말씀하시는군요? 아마도 맨 앞에 가는 사람의 가족이 태어났거나 돌아가셨을 겁니다. 이는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기념하며 태어난 자를 축하하고,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날 것을 바라는 행사입니다.”
"그렇군요.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
"저분들이 걷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신전에 거의 다 왔다는 뜻입니다. 신전 주위를 돌며 생과 사를 축하하는 것이 순환의례이기 때문이죠.”
"아, 그렇다면 저곳이···?”
"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저곳이 신전입니다.”
신전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신전과 전혀 달랐다. 오히려 정교하고 현대적으로 지어진 건축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진 창문.
이 건물도 익히 알고 있는 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마치 현대식 대형 교회 건물 같았다.
신전 입구에는 진짜 성기사 갑옷에 휘장까지 두른 정식 성기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일로 신전에 방문하셨습니까?”
정중하면서도 박력있는 말투. 성문을 지키던 가짜랑은 차원이 다른 포스가 느껴졌다.
“신전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혹시 카르카님 일행이십니까?”
카르카님?
카르카 사제의 이름이 언급됐다는 것은 파랑새가 자기 할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무려 성서에 나온 예언의 성자인 내가 아니라, 카르카님 일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직 성자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건가? 하긴 글자로 아무리 믿어달라고 한들 직접 신력을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겠지. 글자에 적힌 증거들만 보고 믿는다면 사이비 교주를 믿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말이야.’
"네, 맞습니다. 성문 출입에 문제가 생겨서 불가피하게 저희만 먼저 오게 되었습니다.”
신관 문지기는 적힌 종이에 무언가를 확인하며 나와 장필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 말했다.
"이안 메이너스, 본인 맞으십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님만 들어가시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일행분은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말이 끝나고 그는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공간만큼 문을 열었다.
수도 성문에서도 이상했지만, 신관 정문에서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일행과 떨어뜨려 하려 했다.
지금 상황에서 나를 혼자 놔두면 이득이 될 곳은 권력파, 그리고 같은 힘의 흐름을 가진 암영회뿐이었다.
나는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수도 성문에서도 똑같이 일행을 붙잡던데 무슨 연유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신관장님께서 내리신 명입니다. 거절하신다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쿠웅.
성기사는 열려있던 문을 닫으며 감정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서, 성자님!”
"괜찮습니다. 걱정 말고, 편히 쉬고 계셔요. 전문치료사제 문제까지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어차피 혼자가 편했다.
나는 다시 열린 문틈 사이로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