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20화
다음날이 되었다.
창살을 통과하는 햇살은 오늘 있을 행사와는 다르게 나른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왕국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감옥 안에 있는 모든 죄수를 처형대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죄수들은 병사들에게 도망가지 못하게 철저한 감시하에 처형대까지 끌려갔다.
끌려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은 어두웠는데, 어제 말을 걸었던 남자와 더불어 몇몇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곤 구조단이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보니, 감옥에 갇힌 모두가 권력파의 씨앗들은 아닌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나를 죽게 만든 권력파의 끄나풀인 이놈들을 그대로 처형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조단의 존재를 병사들에게 전해야 했지만, 그들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일단 내 목숨부터 구제해야 했기에 아쉬움을 참고 조용히 따라갔다.
처형장에 도착하니, 사형집행인은 40센티미터는 넘을 만한 날을 갈며 도끼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의 날갈이가 끝났는지, 병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처형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병사들을 관리하는 고참 격인 사내는 글씨가 휘갈겨진 종이 뭉치를 한 장씩 넘겼다.
"이놈들 많이도 있네, 왕국을 좀먹는 거머리 같은 놈들, 쯧쯧쯧.”
"병사장, 준비가 다 됐소.”
"그러신가? 사형집행을 시작한다!”
사형집행인의 말에 병사장은 사형집행을 선포했다.
"맨 앞에 놈부터 차례대로 끌고 와.”
그는 얼굴과 이름, 그리고 간단한 신상정보가 적인 종이 뭉치를 들고 외쳤다.
병사는 맨 앞줄의 죄수 한 명을 끌고 와 사형대에 눕혔다.
사형대는 단두대와 비슷했다.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반자동으로 위에서 날을 내려찍어 집행하는 원래 단두대와 달리, 실제 사형집행인이 직접 도끼로 목을 자르는 것이었다.
이곳의 사형대는 목을 자르기 쉽게 고정해 주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잠시 후 분리되었던 목 고정부를 결합하고, 간단한 고정으로 사형 준비가 끝났다.
병사장은 종이 뭉치에서 한참 무언가 찾았다.
"으음, 살로만 길폰이군, 그렇지?”
그는 뭉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사형대의 죄인에게 들이밀었다.
‘이제 놈이 말한 구조단이 나타나 줘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진행시켜.”
병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촥!
툭, 두르르르.
도끼가 죄수의 목을 지나가고 힘없이 떨어진 머리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구조단이 온다면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제 내게 말했던 자를 찾았다.
하지만, 그 녀석도 멍청한 표정으로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며 무언갈 찾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몇 명의 죄수들의 목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촥!
툭, 두르르르.
‘젠장, 처음부터 쉬운 게 하나 없군.'
나는 주변을 상태창으로 확인하면서 이상한 점이나, 구조단이 보이는지 확인했다.
"다음.”
병사장의 건조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왜 저기에?'
나는 상태창에서 보이는 익숙한 단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씨, 빨랑빨랑 안 와? 다음!”
병사장의 고함에 내 옆의 병사가 깜짝 놀라며, 나를 사형대로 끌고 갔다.
"자아~어디 보자, 너는···응? 종이를 어디 가서 흘렸나? 왜 없는 것 같지?”
그는 종이 뭉치를 한장 한장 넘기면서 내 얼굴과 대조했다.
병사장은 자신이 가진 종이 뭉치를 몇 번이나 다시 봤지만, 나와 관련된 것을 찾지 못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야씨, 일 처리 똑바로 안 해? 사형 목록에 없는 놈이잖아? 장난하냐! 내가 요즘 편하게 해줬지? 내일부터 두고 보자, 기대해라.”
병사장은 시뻘게진 얼굴로 짖어댔다.
"화, 확실히 확인했는데, 죄송합니다.”
"아, 몰라. 그냥 쟤도 죽이고, 쟤 얼굴로 목록 추가해 놔. 잡혀 올 때 같이 있었으니, 관련은 있겠지. 뭐.
병사장의 귀찮음이 가득한 말에 병사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사형집행인만 뚫어져라 보고있었다.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나는 단두대에 눕혀지면서 사형집행인에게 말했다.
"빨리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은 처음이구나. 걱정 마라 바로 시작할 것이니.”
사형집행인은 헛웃음 짓다가 뒤이은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언제 구조를 시작할 거냐고 물은 겁니다, 집행자님.”
"······.”
집행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크크크, 저 봐, 정신 나간 거 봐. 역시 사형시키는 게 맞잖아? 뭐 하는가, 어서 집행하지 않고?”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병사장은 웃으면서 다시 집행을 명했다.
"······네놈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수도에서 만나자는 약속 지키지 못한 것은 사과할 테니, 구조단의 역할을 다하지 않겠나?”
사형집행인은 나의 말에서 놀랄만한 단어라도 들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에···? 집행인, 진행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약속은 또 뭐고?”
집행인은 가볍게 손목을 움직였다.
“컥! 커거억···.”
병사장의 목이 그대로 떨어졌다.
촥!
툭, 두르르르.
[캐릭터 상태창]
이름 : 카이던 나이트폴
레벨 : 61
직업 : 사형집행인 (암영회의 집행자)
나이 : 54세
신성력 : 50
특성 : 그림자 서약
스킬 : 밤의 송곳니, 칠흑의 단검, 어둠의 유령
상태 : 기대감
내 앞에 있는 사형집행자는 토리아에서 같이 전투를 했고, 파견단의 종자로 숨어들었던 암영회의 집행자, 카이던 나이트폴이었다.
“못 보는 새 얼굴이 많이 못나졌군. 전혀 못 알아보겠어.”
“그건 피차일반 아닌가?”
“크크큭, 그건 그렇군.”
지금 사형집행인의 얼굴은 이전에 봤던 파견단 종자의 얼굴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상태창을 봤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권력파의 무력단체인 암영회의 집행자인 그가 권력파의 씨앗을 구하러 온 1인 구조단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해서 죽이기만 할 뿐 구하지 않고 있어서, 내가 먼저 아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그라면 나를 죽이지 않을 거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빨리 구조단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낫지 않을까?”
주위는 병사들이 칼을 들고 카이던을 포위하고 있었다.
물론 일개 병사 따위가 아무리 많아도 암영회의 집행자인 카이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구조단 같은 게 아니다.”
카이던은 커다란 도끼를 양손에 쥐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간단한 회전이라고 생각했지만, 카이던을 중심으로 강력한 풍압이 주위로 전해졌다.
그러고는 포위하던 병사들의 목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분리됐다.
"꺄아아악!”
"괴, 괴물이다! 도망쳐! 빨리!”
"제발, 여기서 나가야 돼!”
충격적인 모습에 남아있던 병사들과 죄수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카이던은 몸이 검고 진득한 액체로 변하더니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더니 도망가는 사람들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가시들이 튀어나와 성실하게 목을 찌르기 시작했다.
사형장에는 장소에 어울리는 각종 비명만이 난무했다.
카이던은 순식간에 죽음의 랩소디를 마지막 장까지 연주하고 내게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카이던은 마치 간단한 산책이라도 한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권력파의 씨앗이 아닌가? 권력파 내부 무력집단인 암영회가 어째서 그들을 죽이는 거지?”
나는 주위의 시체들을 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군. 암영회는 교단의 권력파 따위와 비교 할 만한 곳이 아니다. 그저 암영회 내부에서도 권력파의 꼬리 자르기가 시작된 것일 뿐···이라고 조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암영회의 노인네들이 나를 이런 일을 하라고 보낸 게 이해가 안 됐는데, 여기 네가 있잖아? 파견단 때도 그랬고. 아무래도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보내진 것 같다. 그 늙은이들, 보기보다 신통력 하나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
내 눈앞에서 나를 죽인다고 얘기하면서 오늘 점심 뭘 먹을지 물어보는 것처럼 평온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아, 아니, 나를 살리라고 보낸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럴 수도 있지, 내 임무는 권력파의 씨앗들을 박멸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너를 죽이라는 임무가 내려와도 안 죽일 거지만.”
“그건 왜지?”
“왠지 너만이 내 오랜 지루함 속에서 꺼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것 같거든.”
카이던은 그렇게 말하면서 평소에는 내비치지 않는 감정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루함? 카이던, 네 목적이 뭐야? 토리아 때도 날 죽여야 할 임무가 있었는데도 살려줬잖아?”
“내 목적은 재미야, 내 지루함을 잠시라도 잊게 해준다면 뭐든 상관없다.”
나는 직감적으로 신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흥미로운 일을 전해준다면 나와 함께 할 수 있겠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재미없는 성자질을 도우라는 것 아닌가?”
“나는 아무래도 교황이 돼야 할 것 같다.”
바뀐 메인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는 막강한 물리력이 필요했다.
신은 그 힘을 얻기 쉽게 하기 위해 이곳으로 나를 보낸 것이 아닐까?
“···뭐? 뭘 한다고?”
카이던의 표정에서 당황함이 느껴졌다.
“교황 말이다. 나는 교단의 교황을 해야 한다.”
단호한 내 말에 카이던은 뒷덜미를 잡고 웃어 재꼈다.
“푸하하하하하,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있다니까! 너도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는 진심으로 말하는 거다. 내가 교황이 되는데 도와줄 수 있나?”
“진짜 진심으로 교황이 되고 싶은 건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돼야 하는 것이다. 카이던, 도와줄 수 있나?”
“크크큭, 그런 미친 소리를 진심으로 하는데, 같이 할 수밖에 없지! 그럼 잘 부탁한다, 미친 성자.”
***
수도 아르트리아의 신전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교단 활동의 중심지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 교황의 총애를 받던 신관장, 펜텔 벨라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신전은 그때보다 훨씬 더 유명해지고, 교단의 직책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성지가 되었다.
그것은 3년 전, 이곳에서 자신을 희생해서 성도들을 살리고 소멸하신 예언의 성자님 덕분이었다.
엄청난 신력으로, 신전을 신역으로 격상시키는 기적을 이루시고, 소멸하셨지만, 기적의 여운으로 성지가 될 정도의 신성력을 품은 곳이 되었던 것이다.
일 년 365일 항상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지만, 오늘은 다른 손님들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 둘뿐이었다.
두 사람은 평소에 찾아오는 손님과는 달리 어두운 표정으로 신전 내부의 홀로 들어섰다.
그들은 홀 내부를 경건한 자세로 돌기 시작했다.
죽음과 삶이 만나 얽히며 새로운 삶으로 나타나길 바라며 그들은 끊임없이 돌았다.
오늘은 성자의 기일이었다.
이는 그에게 보내는 감사이며, 사죄이고, 바람이기도 했다.
그들은 매년 이렇게 하나의 의식처럼 성자를 기리고 있었고, 이는 어떠한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이를 모를 리가 없는 종자 한 명의 다급한 발걸음이 신전 내부를 시끄럽게 울렸다.
기어코 종자는 홀 내부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의 의식을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난리법석인가요?”
까칠한 목소리를 낸 사람은 얼굴을 가리던 로브를 벗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카르카 신관장님.”
“그래, 큰일이라도 난 모양이지?”
나머지 하얀 로브의 사람도 얼굴을 가리던 로브를 벗었다.
평소에는 점잖던 성기사님의 목소리에 약한 노기가 심어진 것을 느낀 종자는 빨리 이유를 말해겠다고 생각했다.
“네! 동부지역 킬로베르만 시에서 암영회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흰 로브의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정확한 위치는 어딘가요?”
카르카라 불린 신관장이 물었다.
“동부지역 킬로베르만 시, 왕립 사형장이라고 합니다.”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거라.”
하얀 로브를 걸친 성기사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발더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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