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1)

지이이이잉-
낮고 음울한 파장이 돌판을 울렸다.
뜨겁게 달구어진 돌판을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때리고 있다. 돌이 달구어졌다면 한여름, 이 정도 굵기라면 장맛비.
그것을 느낄 정도라면 나는···.
‘봉인이 풀렸나.’
눈을 뜨려고 했지만, 떠지지 않는다. 아, 몸이 없구나.
‘하늘에서 다시 태어난 건가?’
그럴 것이다. 내가 갈 곳이 그곳밖에 더 있는가.
현무족 최고 주술사로 부족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내가 맡은 소임을 다 하기 위해 밤낮없이 수련했다.
마지막까지 사명을 지키다 죽었고, 내 혼마저 이 돌판에 봉인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무슨 결계였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전 일이다.
이상하군. 죽은 다음에도 돌판이 딸려 오다니. 어느새 세상이 흠뻑 젖었다.
‘왜 나갈 수 없지?’
여기서도 몸이 필요한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내가 쓸 몸이 어디 있을 텐데.
***
“폰, 내 폰 어디 있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며 텔레비전 앞을 서성거렸다.
올해 스물여덟으로, 보통 키에 마른 체형이다.
“야, 준, 이번엔 뭘 잃어버렸냐?”
벽에 기대앉은 또 다른 남자가 리모콘을 흔들었다.
두꺼운 뿔테 안경 때문에 눈이 가늘고 날카로워 보였다.
“여기 뒀는데···.”
준이라 불린 남자는 중얼거리며 텔레비전과 모니터 사이, 거울 앞에 놓인 잡동사니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시골 모텔의 작은 방이라 뒤적거릴 짐도 거의 없었다. 유적발굴에 참여한 단체 손님을 위한 온돌방이라 침대는 없었다.
방에는 종종거리는 준 말고 세 남자가 띄엄띄엄 앉았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 ‘석하리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고대국가의 생산활동과 사회’ 같은 책이 쌓였다.
준은 책과 노트를 펼쳐보다가 이불과 베개를 들춰보고 담요를 펄럭였다.
오래된 건물이라서인지, 장마 때문인지 퀘퀘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나마 텔레비전 화질은 괜찮은 편이었다. 에어컨도 소리가 큰 것이 흠이지만, 시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와이파이가 잘 터진다는 것.
“어째 허구한 날 폰을 잃어버리냐. 정신 좀 차려라.”
소파에 늘어져 있던 중년 남자가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얼굴 주름이며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다. 며칠째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했다.
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눈을 굴렸다.
협탁 서랍을 열었다 닫자, 구석에서 폰을 들여다보던 젊은 남자가 이빨 사이로 쓰읍 소리를 냈다.
“화장실에 두고 나온 거 아냐?”
“아, 그런가?”
준은 발끝으로 걸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진열장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에서 ‘놀라운 뉴스’가 나오자 뿔테 안경의 남자가 채널을 돌리다가 멈췄다.
그가 다음 버튼을 누르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 굴착기 버켓이 땅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지하 깊숙이 파 내려간 땅이 보였다.
지하 주차장을 만드는 공사였다. 공사장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둘러 서 있었다.
여자 앵커의 목소리가 들리고, 화면 아래로 자막이 흘렀다.
‘··· 주상복합 지하 주차장 현장입니다. 공사 도중 인근 지역의 전기가 끊기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정전과 동시에 굴착기 네 대가 한꺼번에 멈추었습니다. 전기는 한 시간 만에 복구되었지만, 굴착기 네 대는 꼬박 하루 동안 멈춰있었습니다.
관계 기관이 원인을 찾고 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해당 주차장은 현재 지하 사층 깊이까지 파 내려간 상태로···.’
앵커가 설명하는 사이, 카메라는 멈춘 굴착기와 불그스레한 흙바닥을 보여 주었다.
황톳빛과 붉은빛이 섞인 흙이 동글동글 뭉쳐있었다. 커다란 흙덩이는 으스러져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
햇빛 때문인지, 카메라 각도 때문인지 으스러진 흙은 핏물이 스며든 듯 붉었고, 황톳빛 흙도 유난히 붉게 보였다.
뿔테 안경이 리모콘으로 턱을 긁적였다.
“아우, 저렇게 땅 파는 것만 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니까요.”
“저 정도 파고들어 갔으면 조사 끝난 거지.”
회색 수염이 소파에 달라붙듯 기대앉았다.
“웬걸요. 두루봉도 그렇잖아요? 광산 개발한다고 폭파하고 채굴하고.”
“어쩔 수 있나? 자본주의 사회에 사유지이니.”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구석에 앉은 젊은 남자가 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뭐가? 개발이 아니야, 자본주의가 아니야?”
뿔테 안경이 돌아보았다.
“보상이 문제입니다. 이 나라는.”
젊은 남자가 폰을 흔들었다.
“석회석 광산도 그렇잖아요? 결국 폐광되고, 사장은 보험 하며 혼자 살았다고요.”
“그걸 누가 몰라?”
“뿐입니까? 장학재단 기부했더니 세금 폭탄 맞은 건 어떻고요? 여하튼, 이 나라에서는 좋은 마음, 좋은 생각. 그딴 거 다 필요 없어요.”
젊은 남자는 다시 폰을 들여다보았다.
“주상복합 잘 세워서 임대료 많이 받는 게 잘사는 길이죠.”
“어허, 그래도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 우린 역사적 사명이 있잖아.”
“틀린 말도 아닌데요. 제대로 보상 안 해주니까 우리 문화유산이 어둠의 길로 빠지죠. 다들 쉬쉬하며 땅부터 파죠.”
뿔테 안경은 리모콘 버튼을 눌러댔다.
콰르르륵.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준이 허리띠를 조이며 걸어 나왔다.
“폰은 찾았냐?”
“아니오. 없는데요.”
“휴게실에는? 거기 놓고 온 거 아냐?”
회색 수염은 짜증을 참으며 소리를 눌렀다.
“현장에 놓고 온 건 아니겠지?”
뿔테 안경이 리모콘을 집어던지고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채널만 많지, 하나도 볼 게 없네. 재탕에, 삼탕에. 뭐 하나 잘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베껴대니.”
“그런가··· 휴게실 갖다가 현장 다녀오겠습니다.”
준이 신발을 찾아들었다.
“뭐? 저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회색 수염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여섯 시도 안 되었는데, 밤 아홉 시는 된 것 같았다. 덕분에 일찌감치 작업을 접고 쉬고 있지만.
“휴게실만 돌아보고, 현장은 내일 가라.”
“안 돼요. 비 맞으면···.”
“진짜 현장에 있다면 말이야. 어차피 늦었어. 포기해.”
뿔테 안경이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예. 그럼 휴게실만 다녀올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준은 조심스레 우산을 챙겨 들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구석에 앉은 젊은 남자가 폰을 내려놓았다.
“아우, 쟤 계약이 언제까지죠?”
“두 달 남았다며?”
뿔테 안경은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니까, 왜 아무나 인턴으로 뽑냐고요. 것도 비전공자를.”
“그럼, 전공자는 모집이 잘 되고?”
회색 수염이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어릴 때는 암기왕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던데?”
“머리만 좋으면 뭐 해요? 못 알아듣는데.”
젊은 남자가 씩씩거렸다.
“놔둬라. 내일이나 모레면 발령 날 거야.”
회색 수염이 소파에 길게 누워 발을 까딱거렸다.
“어디로요?”
“저기 어디··· 무슨 사립 박물관.”
“두 달 남은 인턴도 받는대요?”
뿔테 안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원금 받으려면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회색 수염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래도 애는 착하잖아?”
요즘은 착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 줄 모르나. 젊은 남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폰을 집어 들었다.
***
젊은 남자, 준은 터덜터덜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우산 위로 후두둑 빗소리가 요란했다.
휴게실에도 폰은 없었다.
어디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현장에 떨어뜨렸다면 큰일이다. 혹시라도 비에 젖을까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생활 방수는 될 거야. 고칠 수 있을 거야. 중얼거리며 빗속을 걸었다.
조금만 올라가면 오늘 오전까지 쪼그려 앉아 붓질하던 발굴 현장이 나온다.
‘D구역··· 어디쯤 있을 거야.’
언덕길을 따라 현수막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남부 청동기 유적지 발굴조사 현장’
‘관계자 외 출입금지’
‘사랑스러운 우리 마을,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빗줄기가 굵어지며 바람도 세차게 휘몰아쳤다. 바람 방향을 피해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우산 속으로 빗줄기가 들이닥쳐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이십 미터만 가면 현장이다. 어두운 데다 빗속이라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빨리 찾아야지.’
걸음을 서둘렀다.
한쪽 발이 젖은 흙에 발이 쭈욱 미끄러졌다.
“어, 어.”
중심을 잃고 굴러떨어졌다.
경사면을 따라 철퍽철퍽 구르다가 움푹 팬 웅덩이에서 멈추었다.
따악!
튀어나온 돌판에 머리를 부딪쳤다. 떨어진 충격에 순간 심장도 멈추었다.
잠시 후, 스멀스멀 피가 흘러나왔다.
붉은 피가 빠르게 돌판으로 젖어 들었다. 빗물과 섞여 순식간에 돌판을 덮었다.
핏물이 닿자 돌판에 새겨진 그림이 꿈틀거렸다. 고대 동굴에 새길 듯한 거북이와 제사장의 그림이었다.
그림은 핏물을 빨아들이며 남자의 뒤통수를 향해 꾸물거렸다. 그림과 핏물이 모두 스며들자 돌판은 밋밋해졌다.
그의 머리에는 엷은 상처만 남았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픔을 느끼는 건 육체가 있다는 뜻.
내 혼이 새 몸을 받았다.
‘이것이 내 것인가?’
하늘나라에 다시 태어난 몸. 어떤 몸일까.
갓난아기는 아니다. 다 자란 성인의 몸, 내가 살던 곳에서는 아이를 서너 명쯤 낳았을 몸이다.
‘여기서도 쓰던 몸을 다시 쓰는구나.’
그럴 수도. 태양도 어제의 태양이 오늘 다시 떠오르니까. 지난봄 피었던 나무에서 또 꽃이 피지 않는가.
아직은 혼과 몸이 하나가 되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 흠뻑 젖은 채 그대로 누워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새 몸의 기억과 지식을 읽어나갔다.
오오, 실로 엄청난 양의 지식! 정말 놀랍구나.
그런데, 왜 이리 엉켜있어?
머릿속에 든 건 많은데,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다. 이래서 뭘 어떻게 하려고?
게다가, 이 몸··· 왜 이리 힘이 없지? 곡괭이 하나 못 들 것 같은데?
‘이렇게 약해빠진 몸뚱이로 살라고?’
아홉 부족을 아우르던 위대한 주술사 가라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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