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저수지(1)

‘영담호 저수지 얼음’
인터넷을 찾아봐도 속보 제목만 한두 개 떠 있고 내용은 없었다. 이런 건 SNS가 빠를수도.
미인들 채널에도 아직 새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찌러기도 어딘가 커뮤니티에서 사진을 구한 것 같은데.
영담호라···
부완에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었다. 두 곳 정도 경유해야 찾아갈 수 있다.
영담에 가서도 저수지까지 가는 마을버스는 두 시간에 한 대 다닌다.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오늘은 일요일.
어차피 출장이고, 내일은 휴일이니 충분히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이다.
어젯밤, 소설책에 스며있던 사념은 다른 장면도 보여주었다. 어쩌면, 그 사념 때문에 내 기억이 되살아났을지도.
산사태가 일어나고, 홍수가 마을을 덮쳤다. 땅이 흔들리고 절벽이 무너졌다.
‘이번에도 요괴의 짓인가.’
그때 소멸시켜야 했는데··· 폰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술력이 부족해도 어떻게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주술사다. 사람을 위해 하늘신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자.
내가 폰을 들여다보는 사이, 차는 벌써 경매장에 도착했다.
“무슨 걱정 있나?”
우 대표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나를 돌아보았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푹 잤다네. 자네는 잘 못 잔 것 같군.”
“예, 어디 갈 일이 생겨서요.”
“허허, 젊을 때는 바쁜 것도 좋지. 면경 챙기면 터미널까지 태워주겠네.”
“감사합니다. 도착하면 문자 드리겠습니다.”
“그런 일 아니라도 종종 연락하게.”
우 대표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자네와는 좀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를 찾아보지.”
“책 수리하면 알려주십시오. 저도 결과가 궁금합니다.”
“그러지. 며칠 안 걸릴 거야. 어제 바로 소리가 사라진 거 보면 자네 말이 맞을 거고.”
나는 면경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었다.
서인애에게 보내니 바로 답장이 왔다.
‘경매는 저녁 6시 아닌가요?’
‘미리 얻었습니다.’
‘오우, 놀라운데요? 역시 유 선생.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임무를 완수했으니 약간의 여유를 가져도 되겠지. 다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화요일에 출근해도 됩니까?’
‘당연하죠. 오늘까지 출장이잖아요?’
나는 종이 가방을 들고 터미널에 내렸다. 마패만 진짜인 상자와 둘 다 진짜인 면경 세트가 들어있다.
배낭에는 우 대표가 억지로 넣어준 사례금도 있지만, 내게는 마패와 면경이 더 중요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더 빠를까 고민하는데 삐리릭 전화벨이 울렸다.
“박물관에 있죠? 지금 가니까 주차장으로 나와요.”
송자림이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따가웠다.
“아, 20분 후에.”
이 사람은 진짜 앞뒤가 없군.
“저 지금 부완입니다.”
“부완? 거기가 어디야? 왜 거기 있어요?”
“출장 왔습니다.”
“어우씨, 왜 이런 날 출장이야?”
“뭐래? 출장?”
멀리서 반유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송자림이 통화를 스피커로 바꾸었다.
“유 선생님, 지금 영담호 저수지로 가려는데요.”
“아, 저도 거기 갈 겁니다.”
“기사 보셨군요? 그럼 중간에서 만나죠. 자림아, 어디서 만날지 찾아봐.”
“그냥 거기로 오라고 해. 택시 있잖아?”
송자림의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송자림 조사원.”
반유민이 딱딱하고 낮은 목소리로 직함까지 부르자 송자림이 에잇,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알겠습니다. 과장님.”
송자림은 폰에 대고 중얼거렸다.
“다시 연락할게요.”
툭 전화가 끊겼다.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전화가 왔다. 역시 스피커폰이다.
“유 선생님, 강선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세요. 거기서 만나 함께 가죠.”
반유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은요?”
“도로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는데, 두세 시간 걸릴 거예요.”
“갈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뭘···.”
송자림의 목소리를 들으니 무시무시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슬아슬하게 도로 위를 질주하던 찌그러진 차.
다급하게 물었다.
“반 과장님이 운전하는 거 맞죠?”
“예. 걱정 마세요.”
“그거 무슨 뜻이에요?”
송자림이 허억 소리를 냈다.
“제 목숨은 소중하거든요.”
과업을 이루기도 전에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 이번 생이 어떤 기회인데.
송자림이 헛 콧바람을 뿜는 소리가 들렸다.
강선 터미널까지도 두 시간은 걸린다.
버스를 기다리며 영상과 사진을 찾아보았다.
영상이 있어도 화질이 좋지 않았다. 얼음에 빛이 반사되어 희뿌연하게 보였다.
잡귀인지, 요괴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상 기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허긴,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숨을 곳도 많겠지. 이 사람들 사이 어딘가에.
반유민의 차는 고속도로를 나와 국도로 접어들었다.
싸움에 특화되지 않은 사람이라 차분한 건 좋은데, 너무 조심한다고 할까. 송자림과는 완전 반대였다.
송자림은 뒷좌석으로 옮겨 앉았다.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요. 밟을 때는 밟아야지, 규정 속도 잘 지켜서 뭐 하게?”
“딱지 날아오면 누구 손해인데?”
반유민이 룸미러를 노려보고는 내게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 술잔 사건은 끝냈어요.”
“누군지 알아냈습니까?”
“작은할아버지의 손녀요. 작은할아버지가 이년 전에 창고 명의를 바꿨더라고요. 공동소유였는데, 지분을 넘겨받았다죠.”
“유물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군요.”
“그렇죠. 소유권을 증명할만한 건 영수증 몇 개뿐이지만, 피해자가 자기 권리를 주장했나 봐요.”
“그 술잔이 문제였어. 그런 걸 사갖고는···. 쯧.”
송자림이 혀를 찼다.
“할아버지가 술잔을 사고부터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대요. 그 기운에 빠졌던 거죠. 아쉽게도 다른 물건에는 귀기가 없더라고요.”
“홀린 거야.”
송자림이 주먹으로 시트를 툭툭 쳤다.
“그래도 그렇지. 그놈의 술잔은, 살인자의 술을 받고 좋아해?”
“술잔에 서린 귀가 뭘 알겠어?”
반유민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귀를 다루면서도 사람의 눈으로 그들을 보는구나.
나는 창문 너머 길게 뻗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가을에 걸맞게 가로수마다 색이 바뀌고 있었다.
“귀나 혼이 가진 선악의 기준은 사람과 다릅니다. 귀는 사람의 탐욕과 분노로 힘을 키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욕심 많고 화 잘 내는 이들이 선한 사람이죠.”
백마법과 흑마법을 나누는 기준도 마찬가지 아닌가.
권력의 주류를 따르면 백마법이고, 그들에 반대하면 흑마법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정념이나 혼은 자신을 숭배하고 아껴주면 선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이가 좋은 사람인 거죠.”
“허! 그래서는 귀를 보는 능력도 의미가 없잖아요?”
송자림이 팔짱을 끼고 앉아 씩씩거렸다.
“다 없애버릴 거야. 잡귀든, 악귀든!”
반유민이 우회전 깜빡이를 넣으며 도로를 살폈다. 한적한 시골길이라 다른 차는 보이지 않았다.
“또 시작이다. 자림아, 이성적으로 생각해. 이번엔 어떤 놈인지 모르니까.”
“보나 마나 하월을 이렇게 만든 놈들이겠지. 반드시 복수할 거야.”
송자림이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저런 자세 좋지. 마침 내 일에 필요한 에너지이기도 하고.
다만, 저 분노가 악귀의 힘을 키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텐데.
반유민의 차는 영담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저수지라고 해서 마을마다 있는 커다란 둠벙을 생각했는데, 영담댐 지류에서 이어지는 넓은 호수였다.
사진이나 영상도 얼음이 있는 부분만 찍어 작아 보였다.
그 얼음조차 살얼음으로 보였는데···.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벌써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스무 명 정도는 얼음 위에 올라서 있고, 삼사십 명 정도 물가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아, 아. 위험합니다. 저수지에 서 계신 분들은 속히 올라오십시오.”
경찰이 사이렌으로 경고하는데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셀카를 찍느라, 영상을 찍느라 사람들은 분주했다.
여기 어떤 기운이 있는지 모르니 저럴 수 있겠지.
지구가 멸망하는 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폰을 들고 셀카를 찍을 거다. 마지막 순간을 영상에 담는다면서.
“미친···. 잡귀가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어.”
송자림이 허리에 매달았던 지휘봉을 꺼내 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무기인가.
아, 여기서는 무기다운 무기를 가질 수 없구나. 총검을 등록할 수 있다 해도 갖고 다닐 수 없으니···.
3단으로 펼쳐지는 지휘봉이라 접으면 짧고 가느다란 막대기가 된다. 퇴마력을 감당할 만큼 강력한 재질일 테고.
구경꾼들 사이로 떠돌아다니는 귀가 보였다.
얼음 위에서 발을 구르며 사진을 찍고, 까르륵대는 사람들의 어깨와 머리 위로 떠도는 귀들이···.
열한 마리나!
그냥 잡귀가 아니다. 악귀들이다. 그것도 제법 귀력을 갖춘.
‘아무리 악귀라도 이 정도 귀력은 없을 텐데···.’
내가 가진 술력을 얼음에 집중했다.
어렴풋이 얼어붙은 기억이 느껴졌다.
물이 얼면서 공기 중에 있던 기운도 함께 얼어붙었으니 무슨 일인지 읽을 수 있다.
“요괴?”
요괴들이 그동안 찾은 귀력을 시험했구나.
자신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앞으로 무엇을 이용할지 찾고 있다.
놈들이 얼음 위에 흩어놓은 귀력을 악귀가 흡수한 것이다. 그래서 요괴는 떠났고, 악귀만 남았다.
이 정도면 요괴도 아직 힘을 다 찾지 못했지만··· 이렇게 빨리 귀력을 키웠다고?
오래전, 그들과 싸울 때는 십육 년에 걸친 긴 싸움이었다.
대요괴가 힘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오륙 년이 걸리니 그 전에 놈의 무리를 봉인해야 했다.
그 때문에 동료 주술사들이 목숨을 잃었건만, 이 상태라면 일 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하고 놓친 현실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사람이 많다. 그것도 너무나 많이. 요괴에게 힘을 나눠줄 사람이 하늘의 별처럼 쌓였다.
사람들은 그때보다 훨씬 욕심이 많고, 쉽게 분노하며, 만족하지 못한다.
대요괴가 바라는 모든 것을 뿜어낸다. 그러니 그만큼 빨리 강해질 거다.
그런데, 지금 내 주술력은 겨우···. 정념이나 혼을 상대할 정도라니.
주먹을 꽉 쥐고 악귀들을 노려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놀고 있지만, 언제 저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내가 아니지.
우선은 이놈들부터 해치운다. 깨끗하게.
“자림아, 너 혼자서는 안 되겠는데. 상대가 너무 세.”
반유민이 쓰읍 숨을 삼켰다.
사람들 사이를 노려보던 송자림이 빼액 소리 질렀다.
“하월이 떨고 있어! 저기 놈이 섞여 있어!”
그녀의 말에 저수지의 얼음을 다시 살폈다.
“하월이 알려줬습니까?”
“그렇다니까요. 놈들을 없애야지. 지금 당장!”
송자림은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기세였다.
“그럼 이 기회에 하월에게 귀력을 찾아주죠.”
“귀력을 찾아준다고요?”
“예. 저놈들은 요괴의 기운을 삼켜서 강해졌습니다. 저 혼자 상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월이 있으면 가능할지도···.”
“잠깐. 유 선생님. 술잔을 해결한 건 대단하지만요. 이건 너무 위험해요.”
반유민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자림이는 특수 훈련도 받았고, 실전 경험도 많아요. 하지만, 유 선생은···.”
“괜히 걸리적거려.”
송자림은 양손에 검은 가죽 장갑을 꼈다.
“돕겠습니다.”
“뭘 믿고?”
“저 사람들을 그냥 둘 겁니까? 악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하지만···.”
“저와 자림씨가 저수지 반대편으로 악귀를 유인하죠.”
“뭘로 유인해요?”
“하월에게 부탁합시다.”
“안 돼요!”
송자림이 뒤로 물러섰다.
“하월은···, 날 돕다가 이렇게 됐다고요!”
그러니까 귀력을 찾게 해준다니까!
더는 설득할 여유가 없었다. 술력을 느낀 악귀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들은 더 큰 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꿈틀거리며, 수많은 눈을 번득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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