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저수지(2)

얼음 위로 떠오른 형상이 흉측한 괴물로 바뀌고 있었다. 누군가의 두려움을 입은 것이다.
저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세 사람뿐이다.
송자림은 허공을 노려보고 있지만, 반유민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반유민 앞으로 손을 뻗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악귀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따라갑니다.”
“수, 숫자가 너무 많아요.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자림이 혼자인데···.”
반유민은 저수지 주변에 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사람들도 많고···.”
오십 명가량의 사람들이 여전히 신기해하며, 깔깔거리며, 폰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경찰 한 사람은 계속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두 사람은 물가에 선 구경꾼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심호흡하십시오. 반 과장님의 두려움으로 악귀가 더 힘을 얻습니다.”
“알았어요. 진정하고···.”
반유민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잘 될 겁니다. 이 기회에 하월도 귀력을 찾을 거고요.”
“어떻게요?”
“믿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반유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저수지 반대편으로 돌아선 다음 눈을 떴다.
“반 과장님, 저수지 반대편으로 유인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최대한 먼 곳으로요.”
“내가 뭘 하면 되죠?”
“악귀가 떠나면 바로 얼음이 녹을 겁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세요.”
“저 사람들이 말을 들을 것 같아요?”
송자람이 지휘봉으로 경찰차와 사람들을 가리켰다.
확성기에서는 경고의 소리가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위험합니다. 빨리 나오세요. 거기 위험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음 위로 올라서는 사람은 하나둘 늘어났다.
악귀가 움직이면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얼음이 흔들릴 테니까.
“지금은 믿지 않겠지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0월 초인데, 무슨 날씨가 이리도 따뜻한지. 그러니 저 얼음이 사람들을 홀리는 거다.
“악귀가 우리 쪽으로 움직이면 바로 시작하세요. 날씨가 좋아서 금방 녹을 겁니다. 서두르십시오.”
반유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찰차가 서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특수관리과답게 민생사법경찰로 등록되어 있다. 그녀의 말은 통할 것이다.
“우리도 가죠.”
“가요!”
나는 저수지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철책을 넘어 수풀을 뚫고 달렸다.
저수지 전체가 얼어붙은 건 아니었다.
악귀들에게서 멀어질수록 얼음은 얇아지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북쪽은 조금도 얼지 않았다.
저수지 가장자리는 잡목림이 무성했다.
잡초 넝쿨이 수없이 얽혀있어 빨리 달리기는 힘들었다. 넝쿨에 발이 걸려 자꾸만 중심을 잃었다.
송자림은 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저만치 앞서갔다.
지금 그녀에게는 하월의 귀력을 뺏어간 악귀만 보이리라.
마음은 그녀보다 더 빨리 달리고 싶은데···,
한참을 달리니 심장이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동안 꽤 힘이 붙은 줄 알았건만, 아직 부족했나. 가슴이 조여왔다.
‘이 이상은 무리야.’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땀이 눈을 찔렀다. 입 안에서 피 냄새가 느껴졌다.
원래의 나였다면 축지법으로 가볍게 뛰어넘을 거리인데···.
“여기서···. 헉, 여기서 상대합시다.”
“그 몸으로 괜찮겠어요?”
송자림이 지휘봉을 쭉 펼쳤다. 검은 장갑에서 노란 빛의 기운이 스며 나왔다.
저건 부적술···? 이 사람이 부적술도 쓸 줄 알았던가.
아, 생각은 나중에 하고.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무성한 나무와 누렇게 변해가는 풀을 바라보았다.
거기 내 힘의 근원이 있다. 술력의 근원.
주술사는 살아있는 자연의 숨에서도 기운을 얻는다. 나무와 흙, 깨끗한 강물에서.
내가 부르면 그들은 기꺼이 기운을 나누어준다.
도시에서는 생각도 못 했지만, 여기는 도시와는 다르다. 생명의 기운이 넘친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깨끗한 생명력이 있다.
‘너희의 기운을 나누어다오.’
내가 부르자 나무에서, 풀숲에서 초록의 기운이 서서히 밀려 나왔다.
술력이 약하니 받을 수 있는 기운도 희미하고 흐릿하지만, 지금 내 몸을 소생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빠르게 그들의 힘을 받아들였다.
터질 듯 조여오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픔이 희미해지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번에는 찰랑거리는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현무족의 주술사는 물을 다룬다. 조금은 술력이 돌아왔으니, 위급할 때 도움을 줄 것이다.
‘이번에는 청동검을···.’
습관처럼 허공을 쥐었으나 빈손이 허우적댔다.
아, 여긴 거기가 아니지. 이런···.
난 여전히 검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의 검은 여기 없구나.
‘그렇다면 막대기라도···.’
근처 수풀을 뒤져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았다.
길이도 적당하고, 굵기도 손에 딱 맞고, 아주 단단한 것으로.
다음으로는 하월을 부를 차례.
“하월에게 기회를 줍시다.”
질긴 넝쿨을 찾아들고 송자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송자림은 은장도에 손을 얹고 망설였다.
“정말 믿어도 돼요?”
“하월이 나를 믿으면 됩니다. 이게 시작이 될 거고요.”
나는 저 멀리 얼음 위에 떠 있는 악귀들을 바라보았다.
기괴하게 불끈거리던 괴물은 사라지고 검은 구름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반유민이 마음을 잘 다스렸군.’
놈들은 더 강한 힘을 찾아 사방을 돌기 시작했다.
“자림씨는 못 믿어도 하월은 믿을 겁니다.”
검집을 쓰다듬던 송자림이 망설임 끝에 은장도를 꺼내주었다.
장식용 은장도라 날이 갈려있지 않았다. 뚜껑을 뽑아 손잡이에 덧끼우는 형태였다.
“하월이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은장도 칼날을 막대 끝에 매달고 넝쿨로 단단하게 감았다.
“정수를 정확히 찌르십시오.”
“정수? 그게 뭐죠?”
“악귀의 정수요. 사람으로 치면 심장 같은 겁니다. 저 덩어리 속에 더 짙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찌르면 바로 소멸합니다.”
“그게 보여요?”
“거기 집중하세요. 잡귀나 정념에는 없는 거니까요.”
“정수···.”
송자림이 지휘봉을 꽉 쥐고 되뇌었다.
“잡귀는 아무렇게나 찌르고 갈라도 해결되지만, 저놈들은 요괴의 힘까지 삼켰어요.”
“요괴? 그런 건 없었는데?”
“얼마 전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장갑은 뭡니까?”
송자림은 장갑 낀 손을 펼쳐 보였다. 장갑에 노란빛이 서리다가 사라졌다.
“귀를 가르고 이걸로 빨아들여요. 귀신박멸 부적이요.”
나는 은장도가 매달린 나무 막대를 가로로 받쳐 들었다.
“그동안 악귀는 얼마나 상대했습니까?”
“두 번···, 아니 한 번···? 그게 악귀인지 뭔지 모르지만.”
“그럼, 오늘이 악귀를 소멸시키는 첫날이 되겠군요.”
은장도에 손을 얹었다. 하월에게 술력을 나눠줄 차례였다.
“하월. 잃어버린 귀력을 찾아주겠다. 나를 믿어라.”
은장도의 떨림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아주 여린 떨림이었다.
‘나를 믿어라’라고 말하려면 나 자신부터 나를 믿어야 한다. 지금의 나로서도 해낼 수 있음을.
내 안에서 술력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막대를 타고 칼날 끝까지 다다랐다. 하월의 기운이 하얗게 피어오르다 사그라졌다.
순간, 얼음 위에서 사방을 살피던 악귀들이 일제히 괴성을 질렀다.
‘귀력이다!’
‘어디냐, 어디야?’
악귀들이 뭉쳤다 흩어지며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일순간 구름이 내려앉은 듯 어두워졌다.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도 보이는 검은 연기가 되었다.
“얼음이 녹는다!”
확성기를 통해 반유민의 다급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끼아앗!”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들렸다. 개미처럼 작은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얼음이 녹을 거예요. 빨리 나오세요.”
확성기에서 반유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세요!”
얼음 위 검은 연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것이 악귀들인 줄 알았는데, 그 속에서 검은 덩어리들이 휙 솟아 나왔다.
검은 연기는 그대로 얼음 위에 머물렀다. 악귀 주제에 속임수를 쓰다니.
‘내게 힘을 다오. 더 큰 힘을!’
‘저건 내 거야, 저 힘!’
뭉클거리는 검은 덩어리가 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고맙게도 쫓아갈 수고를 덜어주는구나.’
덩어리 안의 정수가 새까맣게 보였다.
“정수를 똑바로 찔러요!”
송자림이 달려드는 악귀를 향해 지휘봉을 겨누었다.
“해볼게요!”
검은 덩어리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하월, 나를 도와다오.”
나는 나무 둥치를 디딤판 삼아 높이 뛰어올랐다.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악귀를 향해 막대를 휘둘렀다.
‘뀌에액!’
놈의 정수에 정확히 은장도를 찔러 넣었다.
은장도의 빛이 어슴푸레 번져나가더니 악귀의 정기를 집어삼켰다.
숨이 가빴지만, 다음 악귀를 향해 뛰었다.
“하월, 네 먹이다!”
은장도에 서린 하얀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이번에는 두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검은 덩어리는 나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다른 놈들이 그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왔다. 기다리지 않겠다는 속셈이군.
저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부족해. 방어막이 필요하다.
나는 저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강물이여! 방패가 되어라!”
강물이 스멀스멀 움직였으나 내 힘은 너무나 미미했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솟아올랐다가 내 앞에 멈추었다.
작은 방패 두 개가 되어 흐물거렸다. 그래도 치명적인 공격은 막아줄 것이다.
물 방패가 둥둥 떠다니며 악귀의 공격을 쳐내는 동안 나는 하월로 놈의 정수를 겨누었다.
악귀의 정수를 삼킬수록 하월의 빛이 서서히 강해졌다.
‘놈! 술력을 가졌다.’
‘해치워!’
‘내가 가질 거다!’
악귀들이 끼아악 몸을 비틀며 외쳐댔다.
검은 덩어리가 수많은 촉수를 뽑아내며 사방에서 몰려왔다.
물 방패가 빠르게 휘돌아도, 작은 방패 하나로는 막지 못한다.
놈의 촉수가 살갗을 할퀴고 지나갔다. 피가 배어 나왔다.
‘빨리 끝내야 해. 지치기 전에.’
한걸음 물러서며 막대를 다시 조준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은장도를 찔러 넣었다.
하월이 귀력을 흡수하자, 상쾌한 바람이 가슴까지 들어왔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 큰 힘이 되어 온다.
하월은 악귀의 정수를 삼킬 수는 있으나, 요괴의 힘까지 흡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요괴가 남기고 간 힘이 그대로 내게 들어왔다. 이런 적이 없는데···.
내 안에 간미후의 주술력까지 들어와 있어서?
하월과 나의 기운을 느끼고 검은 덩어리들이 주춤 물러섰다.
‘놈, 강하다.’
‘저건 뭐냐?’
송자림을 돌아보았다.
한 손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며 장갑 낀 다른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귀의 일부가 장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적술이 발동할 때마다 노란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정수가 남았으니 이내 원래 모양으로 돌아갔다.
물 방패가 그녀를 지키는데도, 정수를 찾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저렇게 싸웠단 말인가?
“정수를 보세요. 한 방에 끝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저 속에 짙은 덩어리!”
은장도를 정확히 찔러 넣었다.
‘뀌애액!’
악귀가 지르는 비명에 이어,
‘기요오오!’
하월이 귀력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서늘하게 들렸다. 은장도의 빛이 더 하얗고 선명해졌다.
송자림의 눈이 반짝였다.
“하, 하월?”
나는 남아있는 놈을 향해 은장도를 겨냥했다.
“정수를 찌르면 하월이 귀력을 삼킵니다. 싸울 때마다 더 강해질 겁니다.”
물방패가 우리 앞으로 날아왔다.
“강한 놈을 상대할수록 더욱 강해집니다.”
송자림이 주위를 빙빙 도는 물 방패를 가리켰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죠?”
대답은 나중에.
나는 허공에 떠 있는 검은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남은 놈들이 한데 모여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크아악! 널 찢어 버리겠다!’
시커멓고 거대한 덩어리가 우리를 향해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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