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저수지(3)

‘크아아앙!’
남아있던 악귀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를 집어삼킬 듯 포효했다.
내가 달려나갈 수고를 덜어주다니. 놈들의 정수까지 드러내면서. 은장도에 하얀빛이 서렸다.
자신의 힘을 찾으려는 하월도 먹이를 알아보았다.
악귀 덩어리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수백의 촉수를 뽑아냈다.
놈들의 촉수에 맞서 물 방패도 방울방울 터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쩌엉!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두꺼운 얼음이 가라앉으며 물이 출렁였고, 내가 있는 곳까지 물결이 밀려왔다.
악귀의 힘이 약해졌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검은 덩어리를 막대기로 쳐내며 뛰어올랐다.
뒤쪽에도 한 마리가 다가왔다. 물 방패가 내 뒤로 돌아갔다.
철썩!
방패가 악귀를 막아냈다.
놈의 정수에 은장도를 겨냥하고 막대를 고쳐 잡았다. 내 술력은 부족해도 하월이 있다.
놈들을 가르며 막대를 크게 돌렸다. 달려드는 놈들의 정수를 놓치지 않았다.
‘기요오오!’
하월이 귀력을 삼키며 은장도와 막대를 부르르 떨었다.
검은 촉수가 송자림을 향해 날아갔다. 은장도가 먼저 알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자림씨, 뒤!”
날아오는 촉수를 쳐내고 물 방패를 모두 그녀에게 보냈다.
남은 악귀가 커다랗게 입을 벌렸으나 오히려 정수가 더 잘 보였다.
대놓고 약점을 보여주다니.
마지막은 가볍게 막대를 휘둘렀다.
먹구름이 사라지고 하늘이 맑아졌다. 햇빛 아래 은장도가 하얗게 빛났다.
저수지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내가 손짓하자 방패는 빗물처럼 후두둑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와 웃옷까지 땀에 흠뻑 젖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숨이 모자라 헉헉대면서도 웃음을 멈출 수 없다.
비록 상처투성이가 되었어도, 악귀를 모두 해치웠다. 이 몸으로, 이 나약한 몸으로.
정신을 차리니 팔과 다리의 상처가 쓰라렸다. 베이고 찔리고 스쳐서 여기저기 피가 맺혔다.
송자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팔과 어깨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담담하게 지휘봉을 밀어 허리띠에 매달았다.
“견딜 만합니까?”
“이까짓 거. 그런데···.”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거 뭐였죠? 그렇게 센 놈은 처음이에요.”
“아까 말한 그대로입니다. 악귀들이 요괴가 남긴 힘을 흡수한 거죠.”
송자림은 장갑을 벗어 바지 주머니 안에 넣었다.
“유 선생, 정체가 뭐예요? 그냥 인턴 아니죠?”
“수련을 조금 했습니다.”
“무슨 수련요?”
“퇴마사는 아직 못 되고, 귀령송환사라고···. 지리산에서···.”
“아···. 그렇군요.”
송자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저렇게 쉽게 믿다니.
“대단했어요. 정말···.”
송자림은 축축하게 젖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물 방패가 사라진 곳이다.
“도술을 부릴 줄 알고, 검술도 훌륭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지죠?”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맞다. 예전의 나에 비하면 전혀 강하지 않다. 이 정도로는 오늘 처음 걸음마를 뗀 거나 다름없다.
대요괴를 상대하려면 아직 멀었다. 놈들이 움직이면 이런 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날 거다.
한 군데가 아니라 동시에 여러 곳에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자림씨도 그만큼 해냈으니 잘한 겁니다. 하지만···.”
요괴와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앞으로 더 많은 요괴가 힘을 찾을 것이다. 겨우 저수지나 얼리는 약한 것에서 시작해 점점 강한 놈들이 나오겠지.
놈들이 모두 나오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사람을 먹이로만 여기니까.
“악귀나 요괴를 상대할 때는 정수를 정확히 찌르세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합니다.”
송자림은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저런 표정, 많이 보았다.
아홉 부족 최고의 무사들과 겨루었을 때, 패배한 무사들이 보여줬던 얼굴.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의미로···, 선물을 드리죠.”
나는 막대에 매단 은장도를 풀어 송자림에게 건넸다.
그녀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환희에 차서 소리쳤다.
“하월! 너 어떻게···!”
하월은 잃어버린 귀력을 모두 찾았다. 아니, 원래보다 많이.
“정수를 정확히 찌르면 하월도 귀력을 삼킬 수 있습니다.”
“그럼, 여태까지 그냥 소멸시켜서 하월이···.”
“자림씨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마음을 하월도 알고 있습니다.”
송자림은 은장도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고마워요. 도와줘서···.”
“저도 하월이 없으면 못 싸웠을 겁니다. 귀력을 찾았으니 다음부턴 힘이 힘을 먹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할 거다. 한번 맛을 보면 멈추지 못할 테니. 나와 함께 싸웠던 청동검처럼.
하월은 강해질 일만 남았다.
싸움이 시작되면 하월이 먼저 정수를 찾아낼 것이다. 송자림이 보지 못해도.
은장도가 환하게 빛나더니 하얀빛 덩어리가 빠져나왔다. 수호귀 하월이 송자림의 지휘봉으로 옮겨갔다.
“원래 거기 있었나 보죠?”
“예.”
송자림은 목이 메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말없이 지휘봉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은장도를 내밀었다.
“그럼, 이건 저와 하월의 선물로 치죠. 이제 필요 없으니까요.”
얼떨결에 은장도를 받아들었다.
이걸로 뭘 하라고? 날도 갈려있지 않은 짤막한 장난감으로.
한 뼘 크기의 장식품이라.
그래도 거절할 수는 없지. 어쨌든 수호귀가 머물던 물건이니. 귀력과 정수를 흡수했던 매개체가 아닌가.
“고맙습니다.”
은장도 손잡이에 손때가 묻은 듯 거무스레한 자국이 생겼다.
귀흔이 남은 물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박물관 인턴도 쓸 만하구나. 오래된 비밀을 가리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죠.”
송자림은 내가 던져놓은 나무 막대를 집어 들었다. 은장도를 매달았던 그 막대기로 넝쿨을 쳐내며 앞장섰다.
풀잎이 다리에 스치며 상처를 건드렸다. 팔과 다리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주술사 믈아치였다면 이런 상처는 금방 아물 것이다. 그가 받은 특이한 주술은 자기치유력, 즉 회복력이었다.
다른 사람을 치료하지는 못해도 회복력이 빨랐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주술을 되찾을 동안 많은 위험을 막아주었다.
그립구나···.
걸으면서 저수지의 물결을 돌아보았다. 물비늘이 살랑거렸다.
예전의 나는 강물을 일으켜 벽을 세우고, 메마른 땅을 적실만큼 강했건만···.
씁쓸한 마음은 이내 털어버렸다.
내 안에 들어온 악귀의 기운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것만으로는 근육 한 조각 강화할 수 없지만, 앞으로 기회는 많다.
간미후가 남긴 능력처럼 다른 이들이 남긴 술력도 찾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요괴와 상대하면··· 지금의 나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강한 놈을 상대할수록, 내가 강해진다.
대요괴, 놈을 상대할 유일한 주술사가 될 것이다.
주차장까지 돌아가는 길은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반유민이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철책 앞까지 뛰어왔는데, 송자림을 보자 반가워하던 표정이 싹 사라졌다.
“이제 뭐야!”
그녀의 이마가 불끈거렸다.
“유 선생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그런데 사람들은요?”
“다 돌아갔어요. 경찰도 돌아갔고. 허!”
반유민이 씩씩거리며 혀를 찼다.
“끝까지 사진을 찍어대는데, 어이가 없어서. 구경하던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녹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 위에서 그러고 싶을까.”
“냅둬.”
“참, 빨리 소독부터 하자.”
반유민은 송자림의 팔을 붙잡고 주차장까지 이끌었다.
트렁크에 든 구급상자를 보자 그동안 송자림과 반유민이 어떻게 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소독약과 붕대, 상비약부터 간단한 봉합 도구까지 들어있었다. 오늘은 봉합이 필요할 정도로 상처가 깊지 않다.
반유민의 손은 빠르고 꼼꼼했다. 붕대를 마는 솜씨도 능숙했다.
송자림의 양팔에는 희미한 흉터가 여기저기 보였다.
‘꽤나 힘들었겠군.’
하찮은 잡귀라도 두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처럼 싸웠다면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을 테고.
여기는 귀를 제대로 보는 이들도 거의 없지만, 있다 해도 조직에 시달리며 남아있을 사람도 없을 거다.
“보이지는 않았죠?”
“예. 얼음 위 먹구름은 금방 사라졌어요. 귀들이 몰려가도 그쪽으로 관심 두는 사람도 없었어요.”
내게는 꽤 긴 시간이었는데, 여기서는 잠깐이었나 보군.
송자림은 말아 올린 소매를 풀었다. 소매가 찢어지고 피가 묻었지만, 일단은 그대로 입을 수밖에.
반유민이 내 상처에도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래도 살아 돌아왔네요. 엄청 걱정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시말서 감이거든요.”
송자림이 나무 막대로 타이어를 툭툭 건드렸다.
“나보다 낫더라.”
“뭐?”
“나보다 더 잘 싸운다고.”
“오, 그래···?”
반유민이 흐흐 기괴한 소리로 웃었다. 그다지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군.
“그런데, 자림씨, 그 장갑은 뭡니까?”
“용한 점쟁이가 도와줬어요. 아, 점쟁이 아니고 술사랬지.”
“미래시 인생연구소.”
반유민이 설명을 덧붙였다.
“하월이 소멸하려고 할 때, 은장도로 옮겨줬어요. 그것도 원래는 소장님 거예요.”
“이 장갑도. 귀신을 빨아들이는 부적이죠.”
송자림은 검은 장갑을 꺼내 툭툭 털었다.
“못 본 지 이 년쯤 되나?”
“우웅. 삼 년?”
“그분도 진짜 귀를 보는군요.”
“부적술도 잘 쓰세요. 귀를 봉인할 줄도 알고.”
“왜 함께 일하지 않습니까? 특수관리과에 그런 분이 필요하지 않나요?”
“조직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셔서요.”
“미래시 인생연구소? 거기가 퇴마사입니까?”
“퇴마는 아니고요. 싸움은 전혀 못 하세요. 사주 명리, 점성술, 관상, 수상에 성명학, 타로도 잘하세요. 아, 해몽도 하고.”
“잡탕이군요.”
“박학다식이죠.”
송자림이 삐죽거렸다.
“반 과장님이 그런 곳까지 가시는군요.”
“하하, 도움을 좀 받았어요. 예전에 어떤 고객을 설득하느라 따라갔는데···.”
반 과장은 구급상자를 정리하느라 잠시 말을 끊었다.
“소장님이 자림이를 소개해주었어요. 제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서.”
“자림씨와 잘 아는 사이였군요?”
“아뇨. 나도 세 번 봤어요. 나 말고 처음으로 하월을 알아본 분이라.”
반유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업은 잘 되나 몰라.”
“잘 안될걸? 적당히 뻥도 치고, 아부도 해야 장사가 되지.”
귀를 볼 줄 알고, 능력도 있는데, 아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 하는 사람이라···. 만나볼 가치가 있겠어.
‘부적술이라면···.’
아홉 주술사 중에도 부적술의 대가가 있었지. 그녀는 빛으로 부적을···.
옛 생각에 빠져드는데, 반유민이 트렁크를 세게 닫았다.
“자림아, 이 막대기는 뭐야?”
“기념품.”
“무슨 기념?”
“하월이 귀력을 되찾은 기념.”
“뭐? 하월이?”
반유민은 펄쩍 뛰어오르며 송자림의 어깨를 붙잡았다.
상처를 건드리자 송자림은 얼굴을 찡그렸다.
“으윽.”
“아, 미안. 어떻게 된 거야?”
“궁금해? 궁금하면 점심 사.”
“그런 비밀이라면 기꺼이!”
돌아갈 때는 송자림이 조수석에 앉았다. 도로 위를 달리는 내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뜻밖의 혈투를 치르고, 점심까지 배불리 먹고 나니 온몸이 나른했다.
졸다 깨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 사이로 논과 밭이 지나갔다.
멀리 솟은 산을 바라보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지러웠다.
이마를 꾹꾹 누르며 앞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로가에 커다란 안내판이 보였다.
파란 바탕에 흰 글자를 읽으려는데, 안내판이 뒤틀어졌다.
하얗고 파란 소용돌이가 일며 그 안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되었다.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치자 휘어진 공간이 내 눈앞으로 옮겨왔다.
‘예지력?’
이런 식으로도 앞날이 보인다고?
어딘가 공사 중인 빌딩이었다. 오래전에 공사를 중단했는지 철근이 녹슬어 있다.
사람도 없고, 사고도 없다.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내게 중요한 곳이야. 저기가 어디지?’
빌딩 지하, 어두운 구석에서 무언가가 밝게 보였다.
황토로 빚은 신발 모양 토기. 날렵하게 앞코가 올라가고 굽이 높은 신발이다.
‘저건 수강족 여인들이 신던 신발이잖아?’
수강족이면··· 수루베?
수루베의 주술력이 잠들어있다. 그가 받은 특별한 능력은 환영술이었는데···.
아홉 주술사 중에서도 나와 가장 친구. 그립구나.
자세히 보려고 하자 환영은 빠르게 휘돌며 희미해졌다. 그래도 그 속에서 간판 세 개는 알아보았다.
반유민과 송자림의 대화는 끊어질 듯 이어졌다.
“뉴스는 뭐라고 할까?”
“이상기온? 환경오염? 암튼, 금방 나오지는 않을 거고, SNS에 올라오면 그때 기사 편집하겠지.”
“흐응, 미인들은?”
“거긴 나오겠지. 당연히.”
그 후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나는 간판 이름을 검색하느라 다른 건 신경 쓰지 못했다.
전국에 비슷한 이름의 가게가 많으니, 하나씩 검색하며 같은 도시에 모여 있는 곳을 찾아냈다.
‘진한.’
“반 과장님. 진한이 여기서 얼마나 멉니까?”
“진한요? 다음 휴게소 지나면 바로 진한이에요.”
“거기서 세워주십시오.”
주술사 수루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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