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유물(1)

현무족 주술사이며 대제사장이었던 때에는 나도 부적을 잘 썼다. 지금과는 글자도, 모양도 다르지만.
그때 백성들은 부적보다 부작을 더 좋아했다.
그들을 위해 복숭아나무나 대추나무 조각에 해와 달을 그려주었다. 짐승의 발톱이나 옥구슬에 술력을 담아주기도 하고.
모양이나 무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주술사 가라뫼가 술력을 넣었으니 거북이든 동그라미든 무슨 상관인가?
글자나 그림보다 거기 담기는 술력이 중요하지만···.
그사이 부적술도 여러 갈래로 바뀌었구나.
지금 나는 현무의 땅이 아니라 현재의 이곳에서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현재의 부적을 알아야겠지.
다른 술사의 부적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그걸 어떻게 풀지도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예. 한번 배워보고 싶습니다.”
“아휴, 아니에요. 내가 배워야죠.”
권 소장은 손사래를 치며 물러섰다.
“그럼, 언제부터···”
갑자기 일 층 로비가 시끄러워졌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웅성거렸다.
‘아, 오늘 현장 체험···.’
중학교 일 학년 아이들의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이 층까지 메아리쳤다.
“소장님, 나중에 찾아갈게요.”
“예. 언제든 괜찮아요.”
인사를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다.
학생들에게 박물관 소장품에 관해 설명하면서도 환영으로 본 나무 상자와 부적이 그 위에 겹쳐졌다.
정성스레 베껴 쓴 사경과 그것을 건네고 받는 두 개의 손, 무늬 없는 상자, 그리고 한 장의 부적.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 어디인지, 누구인지는 모른다. 상자에도 상호나 로고가 찍혀있지 않았다.
특이한 반지를 끼거나 흉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마디로 이렇다 할 단서가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반쪽이라도 제법 모양을 갖춘 나팔 모양 토기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유물분석실 노란 바구니 속에 있던 것, 청동기박물관에서 남은 조각을 기증한 것.
자기 모양을 찾고 싶어 하던 그 토기 말이다.
그것을 놓을 자리도 미리 정해놓았다. 이 층 전시실에서 나가는 문 바로 옆.
없는 조각이 많아 진열대에는 못 넣었지만, 전시대를 따로 구해놨다. 한동안 그 자리에 놓일 것이다.
이 층으로 올라가니 문 관장과 서인애가 새로 도착한 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인애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유 선생, 잘 됐나 보세요. 돌아가고 싶은 모양을 잘 찾았나요?”
“그럴듯하네.”
문 관장이 뒷짐을 지고 물끄러미 토기를 내려다보았다.
“다 유 선생 덕분이죠. 이런 걸 찾아내다니.”
“뭘요. 기술자 솜씨가 좋은가 봅니다.”
토기가 기억하는 모양대로 잘 맞춰졌다. 군데군데 빠진 부분도 그럴듯하게 무늬를 그려 넣었다.
“아, 여긴 일부러 색을 다르게 해달라고 했어요. 깨진 느낌을 살리려고요.”
“예. 멋집니다.”
설계도가 잘 만들어진 덕분이다. 몽타쥬 시뮬레이션이라고 했던가?
토기를 보고 있으니 사경을 찾을 방법이 생각났다.
문화유산정책본부 특수관리과.
문화유산 도난사건에도 관심 많겠지? 유물에 서린 잡귀를 다룬다지만, 어쨌든 관련 기록에 접근할 수 있을 테고.
보통 사람에게는 말할 수도 없다.
도씨 가문에서 도난당한 사실을 함구하고 있으니 나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
사경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상자로 들어갔고, 부적술로 봉인당했다. 이것을 환영을 보았다면 누가 믿겠는가.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니··· 써먹어야지. 이번 문제는 귀가 아니라 시스템을 이용한다.’
문 관장이 한 걸음 물러나 턱을 쓰다듬었다.
“깨진 조각 몇 개로 이걸 알아보다니, 대단하구먼, 유 선생.”
“이러다가 다른 박물관에서 스카우트 제의 오는 거 아녜요?”
“무슨!”
문 관장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하하, 유 선생, 벌써 명함도 나왔다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박물관 운영이나 사업에는 우유부단해도 이럴 때는 엄청나게 빠르군.
“잘해보자고, 유.선.생.”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었다.
“잘 부탁해요. 유 연구원.”
서인애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를 반기지는 않았다.
다른 직원들에게 연구원 계약 소식을 알렸을 때, 오여름은 예상한 일이라며 놀라지도 않았다.
문제는 문일주였다.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이 없네. 뒷배도 없이 그냥 떨어졌어.”
그는 다이어리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한 사람만 편의를 봐주다니! 이러면 안 되잖아? 열심히 일한 다른 사람은 뭐가 돼?”
“다른 사람 누구요? 누가 그렇게 열심인데요?”
오여름이 눈을 흘겼다.
“설마 문 쌤이라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내 말은 세상이 투명해져야 한다 이 말이지.”
“그치만 문 선생님도 관장님 조카라서 여기···.”
“그래도 난 전공자라고, 전공자!”
문일주는 씩씩거리며 나가버렸다.
문이 쾅 닫히자 서인애가 난감한 얼굴로 턱을 긁적였다.
“유 선생,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문 선생이 집 구하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봐요. 무슨 권리관계 때문에 힘들다는데···.”
오여름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그렇죠. 엉뚱한 데서 화풀이라뇨.”
“괜찮습니다. 거짓도 아닌데요.”
저 정도는 귀여운 편이다. 그 옛날 현무족장의 아들에 비하면.
칼을 쥔 자가 시기와 질투에 빠지면 내 목숨이 위험하지만, 보통 사람은 투정에 가깝지.
여유가 있다면 저 사람의 모서리까지 깔끔히 다듬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갈 길이 바쁘다.
어쨌든 내게도 명함이 생겼다.
‘지송박물관 연구원 유하준.’
동료 주술사들이 남긴 그림을 찾으러 다닐 때도 그럴듯한 구실을 댈 수 있다.
그렇게 다니면서 사념이 깃든 유물도 상대하고, 물건에 서린 귀를 처리하다 보면 잃어버린 내 술력도 빨리 돌아오겠지.
문 관장이 자랑스럽게 명함을 건네준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진솔 골동품 봉 사장이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인턴 벗어났다며? 한번 들르게.’
‘우 선생님이 칭찬 많이 하시더군. 축하하네. 앞날이 폈구먼. ㅎㅎ’
계약한다고 말한 지 하루 만에 문자가 오다니. 다른 거래처에서도 메일이 이어졌다.
첫 줄은 축하합니다로 시작하지만, 내용은 전부 회사 안내와 광고였다.
어떻게 알았지? 박물관 홈페이지에도 아직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남전 갤러리 우 대표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이상하지 않았다. 봉 사장을 통해 알았을 거라고 넘겨짚었다.
‘유 선생, 구운몽이 잘 해결되었네.’
“아, 다행입니다. 궁금했는데, 잘 떠났군요.”
‘자네 말대로 하니까 소리가 싹 사라졌어. 이렇게 쉬운 일을 왜 여태 고생했는지···.’
우 대표는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도와주겠네. 퇴마사로 개업한다면 기필코 투자하겠네. 자네라면 성공할 거야. 이 바닥에 진짜가 드물거든.’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계속 박물관 연구원으로 일하기로 했습니다. 아직은 일을 더 배우고요.”
‘뭐? 연구원···?’
실망하는 목소리였다. 알고 전화한 것이 아니었나.
‘어허···. 왜 그리 욕심이 없나? 젊은 사람이 야망을 품어야지.’
“일하다 보니 많이 부족한 걸 알았습니다. 경험도 쌓고요.”
‘허긴, 젊을 때 고생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아, 고객 중에 자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던데···.’
“예. 널리 알려주십시오.”
내가 찾는 건 동료 주술사들의 유물이지만, 어떤 그림으로 남겼을지, 어디 있는지 모르니 닥치는 대로 찾아다닐 수밖에.
예지력이 그것까지 보여주면 좋으련만. 수루베의 그림처럼.
어쨌든, 강한 주술이 유물을 보호하고 있을 거다. 그들의 힘이면 지금까지 충분히 살아남았을 거고.
그것을 모두 찾으면 아홉 가지 주술이 완성된다.
그때가 되면 열두 명의 신귀를 부를 수 있고, 요괴 무리를 모두 소멸시킬 수 있다.
일단···. 처음 들어온 의뢰부터 해결하자. 도씨 가문의 사라진 유물.
환영이 보여주었으니 그 역시 내가 할 일이다. 기껏 얻은 단서를 버릴 수 없지.
구청장 비서인 김서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말씀하신 건은 조사해보겠습니다.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유하준.’
이유는 간단하다. 사건을 의뢰한 장본인에게는 알려줘야지.
내가 결심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인사는 하고 시작하자.
딱히 답장을 바란 건 아닌데, 바로 전화가 왔다. 문자가 아니라.
‘유하준 씨, 훌륭하십니다. 탁월한 결정이고요.’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전화하겠습니다.”
‘언제라도 연락 주십시오. 어떻게 하려고요?’
“비슷한 사건을 조사하면 공통점이 나오겠죠.”
‘다른 사례를 조사한다고요?’
“예.”
‘쉽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사건도 지켜보았는데, 몇 년 동안 수사에 진전이 없었거든요.’
“그건 사람에게만 도움을 받을 때 얘기고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나 보다.
김서윤이 아하,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렇군요. 하준 씨라면 잘할 겁니다. 회장님께도 기뻐하실 겁니다.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단서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몇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사건을 다루었지만, 범인도, 물건도 못 찾았으니까.
‘시작이 반이니까요. 뭐든 필요한 거 말씀하세요. 회장님이 적극 도우라고 당부하셨거든요.’
“구청장님이 아니고요?”
‘저는 회장님을 위해서도 일합니다. 아, 가장 필요한 것부터 준비해야겠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가끔 진행 상황 알려주십시오.’
김서윤은 연락 달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 역시 제법 쓸만한 아군이로군.
특수관리과 사무실은 조용했다. 문은 열려있고, 사무실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 시간이니 당연한가.
서가로 반을 나눈 반대편, 실험실에 반유민 혼자 남아있었다. 암막 안쪽에서 초록빛이 깜빡거렸다.
“귀기추적장치는 잘 되고 있습니까?”
“아, 유하준 씨군요. 뭐, 아직은요··· 제가 정년퇴직하기 전에는 되지 않을까요?”
“다 어디 갔습니까?”
“퇴근 시간 지났잖아요? 둥지로 들어갔죠.”
반유민이 실험실에서 나왔다.
고글 때문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자, 손바닥으로 대충 눌렀다.
“요즘도 귀신 들린 문화유산이 많습니까? 바쁘시네요?”
“우린 다른 일도 많이 해요.”
“무슨?”
“말할 수 없는 비밀이죠. 알면 다쳐요.”
반유민은 회의용 의자에 앉았다.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송자림의 책상 옆에 막대가 보였다. 영담호 저수지에서 은장도를 묶었던 굵은 나뭇가지이다.
‘여기 갖다 놓았군. 횟대로 쓰기에는 아무래도 짧지.’
저 막대에는 술력이 남지 않았는데, 그 싸움이 꽤나 충격이었나 보군.
“오늘은 뭘 좀 부탁하러 왔습니다.”
“도술사님이 부탁은 무슨···.”
반유민은 대답하다 말고 말을 바꾸었다.
“저희 조사원이 되면 따로 부탁 안 하셔도 되는데요?”
“그럼, 이거부터···.”
나는 명함을 내밀었다.
박물관 연구원이니 특수관리과 조사원이 되라는 얘기는 안 하겠지. 아직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반유민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오오. 연구원? 괜찮네요. 위장 신분으로 딱 어울려요. 이 정도면 아무도 의심 안 하겠어요.”
“위장?”
“그런 게 필요해요. 우리 일 도와주려면. 자림이도 퍼스널 트레이너 명함이 있거든요.”
박물관 명함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독특하군. 특수관리과답다고 할까.
지금은 부탁하는 입장이니, 서론은 건너뛰고 본론부터 들어가자.
“반 과장님, 혹시 유물 도난사건에 흥미 있으십니까?”
“어디서 또 사건이 생겼어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찾아보려 합니다. 비슷한 수법을 찾으면 뭔가 나올 거 같아서요.”
“도술을 쓰면 되죠. 귀를 부려서 알아 오라고요.”
“예. 그래서 시스템이라는 귀를 좀 이용해보려고요.”
“하하하, 도술사와 컴퓨터의 콜라보라···. 무슨 사건인데요?”
“사찰이나 문중의 유물을 바꿔치기한 겁니다. 겉은 똑같이 만들어놓아서 제때 발견 못 했죠.”
반유민의 낯빛이 달라졌다. 크게 뜬 눈이 이글이글 빛났다.
“아직도 단서를 못 찾았죠.”
그녀는 이빨을 꽉 다물었다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나도 찾고 있어요. 아주 교묘하게 가짜를 만드는 놈들. 그걸 찾으려고요?”
“예. 관심이 생겼습니다.”
“오, 유 선생이 한다면··· 찾을 것 같네요.”
“잘됐군요. 그럼 피해자 목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곤란한데요. 자세한 건 개인정보라···.”
“그런가요?”
여기서 막힐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맨땅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그럼 인터넷 기사를 뒤지는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반유민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 조사원이 된다면 유 선생도 저희 정보를 받을 자격이 생기죠.”
의자를 굴려 가까이 다가앉았다.
“시스템에서 추출했다고는 의심 못 할 자료가 있어요. 인터넷을 뒤지면 나오는 정보로만 찾아놨거든요.”
반유민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동맹을 맺죠. 어차피 우린 서로 돕게 되어있어요.”
어쩔 수 없군. 일을 빨리 끝내려면.
“좋습니다. 전 이 일을 꼭 해결하고 싶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 자료 지금 볼 수 있습니까?”
반유민은 고개를 저었다.
“월요일에 오세요. 지금 있는 건 이 년 전 거라 최근 정보로 보완해 놓을게요.”
“알겠습니다. 월요일.”
도난 사건에 한 걸음 다가선다.
인간의 욕망과 음모, 요괴 무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이지. 그런 곳에는 반드시 대요괴가 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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