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기운(2)

대벽산 뒤편 절벽으로 가는 등산로가 없다.
암벽 등반 대회가 열리는 계곡에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반유민 과장이 출력해준 지도에서도 그 길이 가장 가까웠다.
암벽 등반의 성지답게 험하고 거칠었다. 최대한 짐을 줄이고 가볍게 출발했다.
오래전, 주술사로 살 때는 이런 순례길을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아무 때나.
그때는 청동검과 가죽 물통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나와 함께 생사를 넘나들던 나의 검. 그것도 어딘가에서 살아남았을 텐데···.
지금은 아주 호화로운 장비를 갖추었다. 등산화에 비상식량까지 넣어왔으니까.
환영으로 보았으니 어디를 얼마나 다칠지도 예상한다. 오히려 덤덤하다.
길이 아닌 숲을 헤매느라, 나뭇가지에 팔이 긁히고 가시덤불에 종아리를 찔렸다.
젖은 낙엽에 미끄러지면서 튀어나온 바위에 살이 찢겼다.
그래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체력과 술력, 모두 안정적이다. 그동안 수련한 것이 마치 이 순간을 위한 것만 같다.
이 길을 가기 위해, 저기 동굴 속 무언가를 찾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수련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이다.
절벽으로 다가갈수록 마음이 설렌다. 옛 친구를 만날 것처럼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넘어지고, 찢어지고, 할퀴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런 숲에서 현무족 주술사가 쉽게 지칠 리 없다.
여기는 오염된 도시가 아니니까, 내게 힘을 나눠줄 생명력이 널려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맑고 깨끗하며 강한 힘이다.
‘너희들의 기운을 나누어다오.’
지칠 때마다 그 자리에서 서서 초록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숲속에서는 새 소리, 바람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그 사이로 새도, 짐승도 아닌 것들도 소리를 내기도 한다.
특히, 사람이 다니지 않는 울창한 숲에서는.
‘술력이다.’
‘힘이 센데?’
‘따라가자.’
잡귀들이 아지랑이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렇게 힘이 약한 것은 다른 잡귀나 악귀를 피해 산속으로 도망쳐 온 놈들이다.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구태여 술력을 쓸 이유가 없다.
고개를 드니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 두 개의 구멍이 보였다. 내가 찾아가야 할 목적지이다.
거기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술력을 아껴둬야지.
내 뒤를 따라 둥둥 떠오는 희뿌연 덩어리를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따라오려고?”
‘어디 가는데?’
“저 동굴.”
벚나무 막대를 들어 절벽을 가리켰다. 덩어리가 아지랑이처럼 몹시 흔들렸다.
‘히익, 저긴 무섭다.’
‘센 놈이 살아. 엄청 강해. 빨려 들어간다.’
“뭔지 알아?”
‘몰라. 그래도 알아, 억센 기운이 숨어있다.’
절벽으로 더 가까이 가니 잡귀들이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 약한 놈들이라 워낙 겁이 많지만, 어쨌든 잡귀도 무서워하는 곳이라···.
“뭐가 있을지 기대되는군.”
다가갈수록 궁금해졌다. 저기 숨어있는 신귀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절벽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해가 지기 시작했다. 산속이라 해가 일찍 진다.
처음 계획은 동굴 속에서 밤을 보내려 했는데,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맨 것이 치명타였다.
‘할 수 없지. 절벽 아래에서 밤을 보내야겠군.’
서쪽 하늘로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절벽이 잘 보이는 너른 바위 위에 앉았다.
산에는 잡귀만 있는 게 아니다. 정기도 흐르고, 머물 곳을 잃은 혼이나 사념도 흘러 다닌다.
병풍에 담겨있던 혼도 떠돌이 정념에게 들었을 것이다. 그도 큰 힘이라 했다.
‘아주 큰 힘이 묻혀 있다. 신비한 기운이 감돈다더군.’
정념도 비슷한 말을 했지.
‘흐르는 정기도 가까이 가지 않는 곳이다.’
‘땅의 것이면서 또 땅의 것이 아닌 힘이다.’
혼과 정념의 말을 떠올리며 절벽을 바라보았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니 멀리까지 잘 보였다.
바람을 타고 절벽 근처를 흐르는 정기가 보였다.
유유히 흐르던 정기가 어느 순간 검은 구멍으로 훅 빨려 들어갔다. 언뜻 개미지옥처럼 보였다.
두 개의 구멍 중 왼쪽에 있는 동굴이다.
기운을 빨아들이는 자석이라고 할까. 철 가루를 끌어들이듯 정기를 끌어모은다.
무언지 몰라도 강한 술력에 잡귀가 끌려 나오듯, 정기도 강력한 힘에 끌린다.
‘정기를 끌어모아 뭘 하려고?’
어쩌면 신귀가 아니라 요괴일 수도 있겠어. 정기만이 아니라 길 잃은 사념도 빨려들 테니까.
환영에서 나온 대로, 벼랑을 따라 발을 얹을 만한 공간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바위가 깎여나간 흔적까지 잘 보인다.
오래전에는 좁은 길이 나 있어 사람이 다녔을 것이다. 누군가 동굴에서 살았을 테고, 그때 갖다 놓은 물건이 있을 것이다.
동굴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 두려워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예감이 좋다.
비닐 천막도 아늑하게 느껴졌다.
예전에 산에서 수행할 때와 비교하면 기와집이나 다름없다.
가져온 약으로 대충 상처를 치료하고 눈을 감았다.
날이 밝자마자 눈을 떴다.
어제보다 훨씬 몸이 가볍다. 영담호 저수지에서의 나와 비교해보면 두세 배는 빨라졌다.
숲속에 있어서인가. 물과 나무, 산과 풀이 도와줘서?
아니다. 다른 무엇인가가 나를 돕고 있다. 저기, 절벽에서부터.
뛰듯이 걸어 왼쪽 동굴 아래 이르렀다. 높이는 아파트 사 층 정도?
올려다보니 옅은 초록빛 기운이 안개처럼 입구를 가리고 있었다.
초록빛··· 의 다정한 기운?
요괴가 아니다. 신귀도··· 아니야. 저것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므··· 믈아치?”
주술사 믈아치의 술력이 잠들어있다!
아홉 주술사 중에서도 봉황족의 대주술사, 그는 영험한 치유사로 이름이 높았다.
의술이 뛰어난 그가 받은 특별한 술력은 회복력이었다. 내가 예지력을, 간미후가 독심술을, 수루베가 환영술을 받은 것처럼.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 빨리 믈아치를 만나야 한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동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동굴 입구에 섰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버렸다.
땀 때문에 종아리의 상처가 쓰라렸지만,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믈아치! 거기 있나!”
대답할 리 없지만,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굴은 한 사람이 지낼 만큼 넓었다. 사람도 살고, 짐승도 머문 흔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이겠지만.
안쪽 구석에 항아리와 토기 몇 개가 놓여있었다. 다른 건 깨어졌어도, 곡식을 넣어두던 진흙 항아리는 모양이 그대로 남았다.
거기서 그의 술력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믈아치!”
작은 항아리를 끌어안았다.
건장한 믈아치가 주술사 예복을 입고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가라뫼, 네 몸을 함부로 다루지 마라.’
아득한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믈아치는 예지력은 없어도 별의 흐름과 땅의 기운으로 앞날을 읽곤 했다.
미래를 읽는 열쇠는 어디에나 있는데, 사람과 사람이 끌어당기는 영력도 그 열쇠라고 알려주었다.
‘칼이 들어오는데 꼿꼿이 서 있으면 되나. 너야 의무와 책임을 다한다고 하겠지만, 남은 백성들도 생각해야지.’
“그건 내가 할 일이니까.”
‘하나를 지키느라 남은 모두를 잃을 것인가. 하나를 참고, 모두를 지킬 것인가.’
믈아치는 용감하고, 생각이 깊었다. 수루베가 나의 절친이라면 그는 형과 같다고 할까.
‘다른 사람 말고, 너를 소중히 해라. 네가 없으면 너의 세상도 없어. 너를 잃으면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겠나.’
그래서 그가 회복술을 받았을까. 아니면 의술이 뛰어나서였을까.
나를 포함한 아홉 주술사가 요괴 무리와 싸울 때, 그는 가장 오래 버텼다.
다른 주술사들이 지쳐 쓰러질 때도, 그는 지칠 줄 몰랐다.
그가 또 뭐라고 했더라···.
‘가라뫼. 네가 할 일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을 것 같다. 어딘지 보이지는 않지만 네가 아주 멀리 갈 것 같거든.’
그때는 순례를 떠난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멀리 여행 가거나, 아니면··· 유배 간다는 의미로.
동료 주술사들이 모두 죽고, 나 혼자 요괴의 결계를 지킬 때도 그의 말을 가끔 떠올렸다.
그때는 고향을 떠나 결계를 지킨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현무족의 땅, 태어나고 자란 나의 은신처가 아니라 비단산 너머 너른들, 여기를 말하는 거라고.
‘가라뫼, 하늘신의 대리자라고 해도 우리 역시 사람이야. 사람의 몸을 입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어.’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지 않나.”
‘그럴지도. 그 일···. 뭔지는 몰라도 네가 꼭 해내면 좋겠구나.’
“믈아치···.”
항아리를 바라보니 흙빛 사이에서 서서히 초록색 선이 드러났다.
구불구불한 선은 혼령을 다루는 제사장의 모습이 되었다. 아지랑이 같은 얼룩과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
품에 안고 있으니 손을 대지 않아도 그림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림이 흩어지고 초록빛 연기로 바뀌었다. 연기는 손등과 팔의 살갗에 머물다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뼛속까지 시원했다.
가슴 부근에서 뭉쳐 다니던 기운이 심장 뒤편, 등 쪽으로 가서 붙었다.
거기 자리를 잡자 후끈거리는 기운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믈아치의 회복력이 내게 들어왔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의 마지막 경고가 들렸다.
‘회복술을 너무 믿지 마라. 우리는 사람이니까. 술력을 쓸 수 있는 시간과 횟수에는 한계가 있어.’
“그래. 술력을 너무 믿으면 안 되지.”
나는 항아리를 내려놓고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의 회복술을 빌릴 시간이다. 가벼운 상처와 지친 몸 정도는 치료할 수 있다.
‘이건 물항아리 같은 거야.’
이번에도 믈아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채워지는 것보다 퍼내는 게 많으면 금방 바닥이 드러난다. 마른 항아리는 물을 넣으면 되지만, 숨이 끊어진 주술사는 되살릴 수 없어.’
“고맙다. 믈아치.”
네가 남겨준 술력으로 반드시 대요괴를 처리하겠다.
피로가 사라지고,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산을 오르기 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눈을 감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영이 아니라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요괴가 조작했을 법한 사고를 예지력으로 보지 못했던 이유.
‘놈들이 막고 있었구나.’
나 역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주술을 쓰기 전에 환영술을 먼저 펼쳐놓는다. 놈들도 마찬가지로 일을 꾸미기 전에 결계를 펼쳐놓았다.
땅과 바다도 살아 움직이니 그것들이 요동치는 일도 많다.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고도 워낙 많다.
그중에서 어떤 것이 요괴의 장난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예지력을 막지 못할 것이다.
“네 놈의 결계도 끝이다.”
지금까지 네 가지 주술력이 들어왔다. 앞으로 남은 것은 다섯 주술사의 술력.
아홉을 모두 모으면 신귀를 부를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요괴는 이 땅에 남지 못할 것이다.
“믈아치, 네가 말한 그때가 지금인 것 같군.”
나는 항아리를 내려놓고 쓰다듬었다.
보고 싶구나. 너와 다른 동료들, 신성한 산에서 함께 기도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갑자기 항아리가 움찔거렸다.
입구에서 스멀스멀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잡귀는 아닌데? 사념?
한 줄기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빛은 허공에서 모여 덩어리가 되었다.
동굴 밖에서 빨려 들어가던 정기였다. 정기만 뭉친 것이 아니다.
항아리에 머물렀던 믈아치의 술력도 섞여 있다.
어항으로 들어간 물고기가 들어간 자리로 다시 나오지 못하듯, 정기도 여기 갇혀 오랜 시간 서로 뭉쳐버렸다.
스멀스럼 기어나온 덩어리는 안개처럼 일렁거리며 여우의 모습이 되었다.
푸른 빛과 흰빛이 섞인, 옥빛 여우였다.
꼬리는 세 개였다가 두 개로, 네 개로 바람에 흔들리면서 바뀌었다.
믈아치 말고도 다른 힘이 있는데···.
백아의 넋도 섞여들었나.
죽을 때까지 내 곁을 지켰던 나의 영수, 백여우. 그래서 정기 덩어리조차 여우의 모습이 되었나.
“넌 뭐냐?”
‘부탁받았어. 길잡이로.’
“누구한테?”
‘우리를 여기로 부른 기운에게.’
“왜 하필 여우야?”
‘네가 그랬잖아.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가 왕이라서 너도 여우냐고.’
이건, 백여우 백아에게 하던 농담인데···
“진짜 백여우를 닮았구나.”
‘사실, 난 모습이 없어. 이건 네가 생각하는 모습이야.’
허긴, 정기에게 모습이 있을 리 없지.
믈아치와 다른 동료를 생각하다보니 대요괴와의 마지막 전투가 떠올라서였을까.
“백아는 흰여우야. 온통 하얗지.”
‘너한테 푸른 기운. 섞였어. 우리가 이 안에서 다 섞인 것처럼.’
“길잡이라고? 어디로 가는가?”
‘보여줄 것이 있어.’
“뭐가 있는데?”
‘가보면 알아.’
바람이 불자 옥빛 여우가 꼬리를 흔들었다. 연기처럼 길어지며 앞장섰다.
여우 모양의 푸른 구름이야 정기 덩어리이니 둥둥 떠가지만, 나는 절벽 옆으로 난 좁은 통로를 기다시피 내려가야 한다.
마음은 날아가는데, 몸은 기어간다.
“아우!”
‘화내는 건 나빠.’
‘그래, 여긴 악귀들 많이 살아.’
‘우리를 잡아먹어.’
여우의 목소리가 갑자기 세 개로 나뉘었다.
여우였던 정기 덩어리가 안개처럼 펼쳐졌다가 뭉쳐졌다. 꾸물거리더니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도 바뀌지 않았네.’
‘사람 사는 곳은 어때? 거기도 그대로인가?’
‘사람들은 여전히 기적을 바라지?’
원래 바람을 타고 흐르던 정기이니 바깥바람을 만나자 빠르게 움직였다.
“길잡이라며. 이대로 흩어질 건가?”
나는 좁은 바위틈에서 땅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거기까지는 갈 거야. 가까워. 우리에게는.’
“나한테는 멀다는 뜻이군.”
‘길은 알아. 그다음은 몰라.’
이제는 여우도, 구름도 아닌 옥빛 안개가 흐느적거리며 숲속으로 둥둥 떠갔다.
절벽 뒤를 돌아 길도 없는 숲을 헤맸다.
한참을 걸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오래 버티고, 빨리 회복하던 믈아치의 힘 덕분인가.
자연의 힘에 그의 술력도 함께하기 때문이다.
옥빛 안개를 따라 들어가니 어디선가 아득한 새소리가 들렸다. 새소리치고는 무거웠다.
‘응? 이건 새가 아닌데···.’
더 굵고 낮은 웅얼거림.
안개는 그 소리에 가까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정기 덩어리는 바람에 날아가고 손톱보다 작은 흰빛과 푸른빛이 남았다.
“너희가 진짜 길잡이였구나.”
흰빛과 푸른빛이 허공에서 몇 번 튀더니 서로 엇갈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부우웅.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 이건 내 기운과 공명하여 머릿속으로 들리는 신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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