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다리는 것

절벽을 끼고 수풀 속을 걸었다. 마른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을 헤치고 작은 빛을 따라갔다.
흰빛과 푸른빛이 춤을 추듯 앞장섰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여전히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부우웅.
작은 소리가 더 확실해졌다.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
거대한 바위기둥 옆으로 낙엽 더미가 쌓여있다. 썩은 이파리 사이 검푸른 막대가 삐죽 나왔다. 청동으로 만든 손잡이.
눈앞에 떠 있던 작은 빛이 손잡이로 빨려 들어갔다.
“청동검?”
손잡이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와 함께 수많은 요괴를 물리쳤던 검, 놈들의 정수를 빨아들여 내가 죽을 때는 신검에 이를 정도였는데···. 여기 버려져 있었다니.
가시덤불과 마른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옷이 찢기고 피가 맺혔지만, 상처는 두렵지 않다.
낙엽 더미를 헤치고 검을 빼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청동검이 맞다. 앞부분이 잘려 나가 길이가 조금 짧아지고 녹이 슬었을 뿐, 모양과 무늬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검기도 사라지고 없었다. 악귀와 요괴의 정수를 삼키며 막강한 힘을 뿜어내던 녀석인데.
여기 처음 왔을 때의 나와 같은 모습이다. 유하준의 몸으로 깨어났을 때의 나약하고 힘이 없던 그때와 닮았다.
이천 년이 넘었으니, 잊어버릴 만한가. 이 땅을 떠돌며 자기 자신도 지켜야 했을 테니.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기운을 소모했구나.’
땅속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서, 주인을 부르기 위해서.
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푸른빛이 검에 남은 기력의 전부였다. 그나마 흰빛이 도와줘서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역시, 그 흰빛은 백여우 백아가 남긴 마지막 숨이었어.
청동검을 들고 칼날을 손바닥으로 받쳐 들었다.
그때도 날을 갈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무뎌졌다. 군데군데 홈이 패였다.
내 청동검은 사람을 베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귀의 정수를 삼키기 위한 것이다. 날카롭게 갈 이유가 없었다.
언뜻 장난감 모형처럼 보인다. 모형보다 몇십 배 무겁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믈아치의 항아리가 있던 절벽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알 수 있다. 주술사 믈아치의 술력이 없었다면 청동검 혼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믈아치, 네가 지키고 있었구나. 고맙다.”
검의 양날을 쓰다듬었다. 흰빛이 서려 있다.
“백아, 너도 고맙다. 마지막 숨을 나눠줘서.”
청동검을 받쳐 들고 나무 뒤로 빠져나왔다. 몇 걸음 만에 검을 휘두를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다.
“검기를 잃었어도 상관없다. 곧 귀력을 삼키게 해줄 테니.”
검이 깨어나면 곧 옛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은장도에 숨어있던 하월이 악귀의 정수를 사냥하는 것처럼, 청동검, 너는 더 많은 정수를 삼키게 될 것이다.
청동검을 깨울 시간이다.
“여기 네 주인이 왔다. 깨어나 주인을 맞으라.”
몸 안의 술력을 모아 양손으로 내려보냈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팔과 손목을 돌려 칼날로 허공을 쳐냈다. 무릎은 낮추고 칼끝은 하늘로.
앞으로 달려나갔다가 옆으로 빠지며 검을 빠르게 휘돌렸다.
허공을 벨 때마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검을 쥐고 있으니 오래전 요괴 무리를 봉인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힘껏 칼을 휘둘렀다. 바람개비가 돌 듯 청동검을 돌고 사방을 찔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청동검도 내 힘을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머리 위에서 우르르릉 천둥이 치고 마른번개가 몸을 감쌌다.
나와 청동검이 일으킨 술력이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 내 주위로 악귀들이 몰려들었다.
‘네놈은 뭐냐?’
‘이 기운, 이게 사람이냐?’
그 사이, 요괴도 두 마리 섞여들었다. 붉은 눈의 검은 요괴와 등에 뿔이 달린 놈.
‘주술사.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어?’
오래전 땅끝에 봉인한 요괴 무리에 속한 놈들이다. 드디어, 만났군.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 없는데.’
‘그 힘은 이제 내 거다.’
이 산에 잡귀가 있을 리 없다. 이미 악귀에게 잡아먹혔을 테니. 여기 모인 것은 모두 정수를 가진 놈들.
“청동검의 먹이가 제 발로 기어 왔군.”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나는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널 다시 신검으로 키워주마.”
내 뜻을 알아듣고 검도 부르르 떨었다.
부웅!
나무 기둥을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맨 앞에 출렁이는 악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바람처럼 칼끝이 악귀의 정수를 베고 지나갔다.
쉬이익!
청동검은 빠르게 놈의 정수를 빨아들였다.
악귀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크흐흑. 제법이군.’
놈들은 주위를 돌며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정확히 정수를 겨냥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뒤를 내줄 수는 없지.
물! 물방패를 써야 한다.
여기 있는 건,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과 낙엽 더미 아래 남아있는 약간의 물기. 그걸로는 부족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되는데···.
이마에 맺힌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좋아. 이것까지.’
악귀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한 손으로는 물의 기운을 불렀다.
“방패가 되어 나를 지켜라!”
현무족 주술사의 명령에 따라 이슬과 물방울이 사사삭 일어났다. 이마의 땀방울도 솟아올라 그 속으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모여 출렁이는 방패를 만들어냈다. 얇지만 쓸만하다. 물방패가 내 뒤를 지켰다.
놈들은 날뛸수록 약점이 더 잘 보인다.
악귀의 반 이상을 처리하고 나는 오래전에 하던 대로 검을 던지려고 했다.
예전의 청동검은 혼자서도 요괴를 상대했다.
싸움을 시작할 때는 내 손에 붙어있지만, 어느 정도 상대를 파악하면 알아서 휘돌았다.
청동검이 허공을 날며 싸울 동안 나는 다른 주술을 펼치곤 했다.
검을 던지려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어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는 갓난아기처럼 딱 붙어있었다.
‘이런···. 아직 멀었구나.’
저 작은 물 방패 정도도 되지 못한 것이다.
귀와 싸우는 동안 물 방패나 물 그물을 일일이 조종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나와 적 사이의 긴장감을 타고 움직인다.
처음에는 내게서 비롯되었으나, 놈들의 생각과 의지에 반응한다. 놈들이 나를 어떻게 공격하려는지를 먼저 읽는 것이다.
지금 청동검은 아직 그 단계까지 이르지 못했다. 더 많은 먹이가 필요하다. 더 강한 먹이.
강한 놈과 싸울수록 검기는 빨리 회복된다.
조무래기 악귀나 상대하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빠르게 악귀를 쳐냈다.
어느새 두 마리 요괴만이 남았다. 요괴 역시 여기저기 찢겨 만신창이가 되었다.
“대요괴는 어디 숨었나?”
‘크크. 네 놈이 건드리지 못할 곳에 계시지.’
요괴는 돌을 긁는듯한 소리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넌 죽을 때까지 그분을 모를 거다. 크크크.’
두 마리 모두 검은 피를 흘리면서 눈을 번득였다. 팔과 다리도 허우적거렸다.
크하하학.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알려줄 것이 없다면 남아있을 필요도 없어.”
요괴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청동검의 부러진 자리를 따라 푸른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큭. 넌 사람을 죽일 수 없잖아? 불쌍하게도.’
‘위대한 대왕님이 시종을 들이셨거든. 케켁.’
‘모두가 대왕님을 숭배하고 따른다. 우리는 사람이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소원을 들어주는지, 사람들은 모른다. 요괴를 따르는 자를 위해 힘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가니까.
사람은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하겠지. 자신들의 탐욕이 요괴를 키우는 것은 모르고.
‘넌 사람 손에 죽을 거다. 네가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널 죽일 거야.’
크크큭 두 마리가 동시에 이빨 가는 소리를 냈다.
“그만 가라. 시끄럽다.”
나는 비틀거리는 요괴의 정수에 청동검을 찔러넣었다.
푸쉬식.
정수를 잃은 요괴의 몸이 땅으로 스며들었다.
청동검의 기운이 더 밝아졌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갈 길이 멀지만, 푸른빛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싸움이 끝난 자리를 돌아보았다. 잔가지들이 부러지고, 풀잎은 짓눌렸다.
그 위로 뿌연 형상이 일어났다. 눈앞의 허공이 스크린처럼 어떤 풍경을 보여주었다. 강가 옆에 지어진 공장이다.
예지력···!
눈앞에서 온갖 재난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눈 덮인 산과 강, 불타는 공장, 무너지는 산비탈, 땅이 갈라지며 주저앉는 허름한 집들.
어디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요괴가 수작을 벌인다는 뜻이군.
산과 들, 집과 공장에도 하얗게 눈이 쌓여있다. 이번 겨울인가?
지금은 십일월.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그사이 청동검을 원래대로 돌려놓겠다. 놈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나는 혼자가 아니다. 동료들의 염원이 남아있다. 그들이 나를 통해 못다 이룬 소망을 이루고자 한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청동검이 스르르 움직였다. 검의 움직임에 따라 왼쪽 팔 앞의 공간이 천천히 벌어졌다.
술력으로 만들 수 있는 겹쳐진 공간이다.
‘아공간으로 들어가려고?’
그건 잊지 않았구나. 혼자서는 싸우지 못하더니.
주인이 살아있어야만 가능한 녀석만의 검집이다. 언제 어디서나 주인이 부르면 그곳에서 튀어나온다.
청동검이 겹쳐진 공간으로 들어가자, 숲은 고요해졌다.
청동검도 찾고, 믈아치의 주술력도 받았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여기가 어디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니 이정표가 있을 리 없고.
새벽부터 일어나 절벽을 올랐기에, 하루가 지난 것 같았는데, 이제 겨우 아침이다.
지도와 나침반으로 길을 찾아냈다. 몇 차례 헤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군.
대벽산 등산로 입구에 내려오자마자 폰을 켰다. 배터리를 아끼려고 어제 오후부터 꺼놓았다.
부재중 전화가 서른여덟 통이나 찍혀있다.
그중 스물 몇 통이 윤태영에게서 온 전화이다. 세 통은 박물관에서 온 것이고.
가까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부터 뜯었다.
김밥을 우물거리며 문자를 살피니 오랜만에 찌러기의 문자도 와있다.
여전히 미인들 너튜브 채널을 따라 퀘스트를 하고 있으려나.
‘미인들 순례자 모집. 저절로 불 켜지는 석등. - 나도 미인.’
‘나도 미인’이면 미인들 너튜브 채널의 팬클럽인데···. 한동안 뜸하더니 다시 활동을 시작했나 보군.
박물관에 와서 귀흔을 찾는다고 아우성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런 녀석이 이번에는···.
가만, 이 석등은 송자림이 갔던 거기 같은데?
미인들이 어떻게 알고 거기까지 쫓아갔지?
오래전에 나온 괴담이나 다른 사건도 많이 올렸지만, 송자림과 반유민이 다닌 곳은 다 찍어 올렸다.
그 채널은 대체 스태프가 얼마나 많은 거야?
아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특수관리과에 미인들 중 하나가 있는 거겠지.’
서인애의 문자는 간단했다.
첫 번째 문자.
‘신화문화재단 연구지원 사업발표회. 다음 주 목요일 오전 10시. 신화컨설팅 컨퍼런스홀.’
두 번째 문자.
‘지금은 출장중이라 다시 연락할게요.’
나중에 연락한다니 기다리면 될 일이고.
윤태영의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녀석, 무슨 일로 전화를···.
띠리리링.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역시나 윤태영이었다.
“여보세···.”
“야! 너 뭐야! 왜 전화 씹어?”
윤태영은 소리부터 질렀다. 귀가 얼얼해서 폰을 멀리 떨어뜨렸다.
“산행 좀 하느라고.”
“산 타다 굴러떨어지는 소리 하고 앉았네. 내일이 개원식이라고 했어, 안 했어? 엉!”
아, 개원식. 잊고 있었다. 까맣게.
오늘은 집으로 갈 테니, 어차피 알게 될 일 아닌가. 이렇게 전화를 해대다니.
“오후 4시라며?”
“이틀이나 연락이 안 되는데, 너라면 걱정 안 하겠냐? 응? 게다가 넌 주최측이잖아? 주최측!”
“지금 간다. 내일 시간 맞춰서···.”
“뭘 시간을 맞춰? 내일 아침부터 준비해야지! 총본에서 최 부장님이 온다고 했다고!”
“그분이 누군데?”
“총본에서 제일 세. 실력이 어마무시하다. 여태까지 그분 이긴 사람이 없어.”
흥분했는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라고! 그런 분이 내 개업식에 오신다니. 푸하하하!”
윤태영은 큰소리로 웃어댔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청소 깨끗이 해놔야지. 너 언제 오냐?”
도장에 페인트칠도 새로 하고, 며칠동안 청소만 했는데, 또 청소라니. 그러다 바닥이 뚫리겠군.
“밤에는 도착할 거다.”
“그래? 내일 아침에 나갈 수 있음 됐다.”
윤태영은 킥킥거리며 웃더니 전화를 뚝 끊었다. 녀석, 그렇게 좋은가.
그동안 윤태영은 열심히 준비했다.
도장을 인수하느라, 수강생을 모집하느라, 이전 원장의 여행코스까지 잡아주느라 무던히 애썼다.
주변 사람들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박물관 식구들도, 특수관리과도.
그런 사람들을 위협해?
산에서 만난 요괴들이 키득거렸지. 대요괴가 시종을 들였다고.
‘넌 사람 손에 죽을 거다. 네가 죽이지 않으면 널 죽일 거야.’
누구를 이용하려는 걸까.
여기서는 사람을 잡으려면 제약이 많다.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달라며 주술사를 찾던 그 옛날이 아니다.
놈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다. 법 때문에 갖는 제약과 한계.
그렇다면 내가 쉽게 손 쓸 수 없는 사람일 테고.
왼쪽 팔을 문질렀다. 겹쳐진 공간에 청동검이 들어가 있다.
내 몸에 들어온 동료들의 주술도 있다. 앞으로 찾을 주술력이 더 있다.
주술사는 사람을 위해 능력을 받은 자. 이 사람들은 반드시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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