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아버지의 연쇄 살인과 엄마의 가출.
그런 큰 사건이 벌어짐에도 내 삶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런 변화 없는 삶 속에서 타인이라는 존재를 잊어버린 채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몇 년간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누워만 있는 내 삶은 방안에 떠다니는 공기마저 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런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할까?
매일 반복되는 시선 놀이와 무의미한 배설.
죽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무의미한 삶에 이제 숨 쉬는 것조차 지쳐간다.
때론 생각해 본다. 내 주위에 있던 무의미한 사람에 대해.
난 고등학교 때, 왜 아버지가 살인을 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간간이 생각나는 건 아버지가 왜 19명에서 살인을 멈췄는지,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왜 자수했는지와 같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의문만 들었다.
내면의 적막만 흐르는 삶을 살아온 내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나도 아버지처럼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잔인한 살인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다. 나는 지금의 자유 잃고 싶지 않다. 사람을 죽여 타인의 피와 살이 내 몸을 더럽히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순간 떠오르는 아버지의 살인도, 자유로워진 지금의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평소와 같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깨어보니 내가 항상 바라보던 하얀 천장이 아니었다. 내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고, 그사이 한 점의 빛만 보였다. 그리고 저기 저편에서 침묵의 공간을 뒤흔드는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고 한점 빛 사이로 사람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내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내 앞으로 다가와 하는 말이
“재영씨 일어나셨습니까?”
검은 사제복과 마스크를 쓴 사람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난 몇 년 만에 집 밖을 벗어나 타인의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그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앞에 있는 사람은 나에게
“여긴 재영씨가 사는 공간과 완전히 다른, 이질적 공간입니다.”
“저는 이 암흑공간의 지배자 마스터라고 합니다. 앞으로 전 재영씨의 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재영씨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고독하지만 항상 혼자였고 그 고독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고 있는 나에게 누구와 함께라니. 난 놈의 이상한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저기 있는 저놈은 적막의 세계의 소음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데 갑자기 놈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앞으로 저는 재영씨에게 자유를 드릴 생각입니다.”
“그건 타인의 생명을 재영씨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거 너무 즐겁고, 흥분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며 미친 듯이 웃는 놈. 그놈의 미친 듯한 웃음은 나의 고막을 뒤흔들고 암흑의 공간마저 뒤트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한 가지 든 의문은
‘내가 사람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난 지금처럼 혼자이고 싶은데.’
라는 생각과 함께 들리는 음악 –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공간을 뒤흔드는 음악과 함께 그놈은 나의 의문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지껄였다.
“재영씨는 앞으로 얼마든지 살인을 해도 좋습니다. 재영씨가 사는 공간에서 그 어떤 살인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며 재영씨의 모든 행위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재영씨의 삶에 방해되는 그 어떤 것도 죽여도 된다는 거죠.”
“이제부터 재영씨는 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은 신의 사도가 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속으로 ‘뭔 미친 소리를 사실 같이 말하나?’라고 혼잣말했지만 나의 심장은 이상하게도 쿵쾅거리며 급격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놈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재영씨 제게 미친놈이라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재영씨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터질 것 같은 심장박동을. 방금 전 재영씨에게 벌을 내리는 게 아니라 자유라는 선물을 드리는 겁니다.”
“앞으로 재영씨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그 누구도 재영씨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시 재영씨의 공간에 돌아가고 1주일 후, 재영씨는 반드시 하루에 한명 이상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재영씨가 이 조건을 위반할 경우 제가 재영씨 신체 일부를 직접 도려낼 겁니다. 그것도 아주 깊은 고통과 함께요.”
나는 쿵쾅거리는 박동과 다르게 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도 귀찮을 뿐만 아니라, 하루에 한 명 이상 죽여야만 하는 성실함까지 강요하다니.
놈이 제안한 살인은 이때까지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었고, 자유로움보다는 내가 쌓아 올린 단단한 벽을 무너뜨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자 난 몇 년 만에 타인이라는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사람을 죽일 때, 대상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죽여도 되나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지만, 순간 허무하기도 했다.
그런 나의 말을 들은 놈은 다시 암흑조차 찢어버릴 듯한 큰 목소리로
“어떤 방법이든,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그리고 몇 명을 죽이든 재영씨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켜주셔야 할 건 반드시 하루에 한 명은 죽여야 한다는 것만 유념하시면 됩니다.”
“이제 제 말은 여기서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돌아가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죽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죠. 그럼 전 이만.”
그 말을 듣고 눈을 떠보니 집안 바닥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난, 마치 이상한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
정말 이상하고 기묘한 악몽을...
몇 년 만에 알지 못하는 놈이 내게 말을 걸지 않나, 나는 거기에 맞춰 대답하지 않나.
아버지의 살인이 있고나서 살인이라는 단어를 전혀 생각지 않았었던 나는, 갑자기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런 두통과 다르게 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말초신경의 자극은 극한으로 끌어올려 졌다. 미칠 것 같은 흥분감이 이런 걸까?
난 놈이 제안한 것에 동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예민해진 나의 말초신경은 지금의 감정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게 살인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들어오고 나서 더는 천장을 향한 시선놀이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하루종일 방안에 서서 지금의 상황을 생각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내게 지금의 두근거림은 왜일까?
연쇄 살인을 한 아버지의 유전적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이때까지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을 뚫고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앞으로 내게 죽을 타인의 피와 살이 비어있던 내 마음을 채워줄까?
그리고 앞으로 있을 ‘Death’라는 단어 앞에, ‘Life’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나도 이제 죽음보다 삶이라는 단어와 친해지고 싶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1주일은 내겐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1주일 후에 있을 지금과 다른 삶의 기대 때문인지 온몸을 울리는 심장 박동은 지금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난 1주일 후에 있을 살인을 생각해 봤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지?
어떤 도구로 사람의 내장을 도려낼까?
나의 체력으로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타인의 죽음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내게, 살인이라는 단어는 나의 머릿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타인의 행복이 아닌 잔인한 죽음이지만.
앞으로 1주일 후, 나는 살인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놈이 말한 대로 나의 신체는 하나하나 잘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신체가 잘려나간다는 걱정보단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살인을 하고 그들의 몸 밖으로 나올 피와 살의 감촉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런 강박적이고 변태적인 생각 때문일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것은 현실이고,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로 각인 되었다.
홀로 고독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벽 안에만 살았던 내게 이러한 이중적 감정이 드는 건 왜일까? 이런 생각과 더불어 나의 마음은 극단적으로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조급함 때문인지 항상 집안 바닥과 한 몸이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왔다 갔다만 하다 드는 생각이 맨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난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엌으로 간 나는 칼을 찾긴 했으나 안 쓴 지 오래여서 녹이 드문드문 슬어 있었고, 창고에 있는 망치는 목이 부러진 채 방치 돼 있었다. 그리고 톱은 이가 나가, 조금만 휘둘러도 바스라 질 것만 같았다.
난 그것들을 보며 ‘지금 내겐 사람을 죽일 만한 도구가 없구나.’ 하고 쓸모없는 도구 앞에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 이러면 아무도 죽일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 내어 집 밖을 나섰다.
실로 몇 년 만의 바깥세상인가?
그렇게 나간 세상은 내 마음과 다르게 환하게 밝았다. 그렇게 환한 세상의 빛을 맞으며 난생처음 동네 철물점에 갔다. 그리고 살인을 위한 기본적인 도구(칼, 망치, 쇠몽둥이 등)를 샀다. 내가 타인을 죽일 잔인한 도구를 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뭐 때문에 이런 끔찍한 도구를 사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살인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없어서일까?
아마, 평범하다 못해 찌질이 같은 나의 겉모습을 보고 살인이라는 단어를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듦에도 난 그들의 무관심에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나마 살인에 쓰일 도구를 사러 환한 세상에 나갔다가, 다시 침묵만 있는 고독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나는 다시 살인에 대해 생각하며 다짐했다.
이제 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존재로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죽어있던 과거가 아닌, 살아있는 나로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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