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난 밤하늘에 뜬 눈부신 별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별을 바라보며 끝없는 어둠 사이로 비치는 별빛이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옆에는 묵묵히 일만 하시는 아버지와 무심한 엄마가 앉아 있다.
때로는 술을 먹고, 때로는 TV를 보며 일상을 보내는 아버지.
여전히 나의 고독에는 전혀 관심 없는 엄마.
그런 가족들 사이에 여전히 난 세상이 아닌 벽 안에 살고 있다. 그렇게 벽 안에 있는 난 조금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거울을 보니 양팔과 다리는 멀쩡히 붙어있었고, 일그러졌던 예전의 눈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대로였다. 난 거울을 보며 양팔을 돌려 보기도 하고 조심스레 한발 한발 걸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게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몸을 바라보며 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이 ‘지금은 과연 언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30여 년 지나온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 내가 어느 순간에 숨 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밤이 지나 다시 해가 뜨고, 예전 기억 속 장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왠지 거기로 가면 지금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먼저 간 곳은 어느 으슥한 골목길.
여기서 난 조용한 골목길 사이로 지다 가던 여자에게 무참히 칼을 내던졌다.
그리고 여자의 빨간 상처 사이로 마치 성행위 하듯 정액을 내뿜었다. 난 그 끔찍한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과거의 기억에 몸서리치며 장소를 옮겼다.
다음 내가 간 곳은 두리백화점 앞.
여기서 난 한 남자를 살해했고 지나는 노인에게 칼을 내던졌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죽어가는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을 보냈고 여전히 각자의 벽에 갇혀 살고 있었다.
그렇게 비참한 비명과 뭉개진 죽음의 기억을 뒤로하고, 집 근처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난 울부짖는 아이를 앞에 두고 한 가정의 가장을 무참히 살해했다.
살해했을 때 둔기의 촉감은 사라졌지만, 아이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내 귓가를 맴돌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벤치에 앉아 동네 꼬마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아버지를 감싼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하고 생각해 봤으나 이런 질문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 아이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나의 기억 속 잔혹한 행위를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그런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간 곳은 내 삶을 마무리하려 했던 아파트 옥상이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간다면 지금까지의 생각이 정리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니 기억 속 청명한 하늘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옥상 밖 세상을 바라보니 전과 같이 내 삶과 무관한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다 저기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그곳은 한 여자의 비명과 둔탁한 둔기음이 혼재되던 공간이었다.
난 그곳을 바라보며 무심히 다가갔다. 무심히 그곳에 다가간 난 거기서 있었던 일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그 기억은 나의 손을 뚫고 내 눈을 향한 차가운 쇠꼬챙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차가운 고통에 앞서 느껴진 따뜻한 온기와 함께.
그런데 절망에 순간, 나의 몸에 따뜻한 온기가 돈 건 왜일까?
그런 알 수 없는 생각을 하다 ‘내가 죽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아직 세상에 존재하며 살아있을까?’하고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 대답 없는 옥상 위에서 쌀쌀한 바람만이 내 몸을 감싸 안았고, 홀로 있는 나의 체온도 거기에 맞춰 조금씩 내려갔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타인의 생명을 벌레 짓밟듯 짓눌러버린, 잔혹한 살인자라는 걸 모른다.
누구에게도 관심을 준적도 받아 본 적도 없는, 벽 안에서만 숨 쉬는 나.
그 순간 머릿속 과거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아니, 미래의 기억이라 해야 하나?
내가 죽인 사람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왠지 내가 죽인 사람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악몽을 꾼 것만 같은 기시감에 나의 몸은 조금씩 떨고 있다.
그런데 저 먼 구석에 보이는 희미한 핏자국.
여자가 죽어간 자리에서 붉은 핏자국이 보인다. 그리고 그 붉은 핏자국은 점점 넓어져 내 주위를 감싸고 있다. 난 점점 붉게 변해가는 옥상을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둘러본 사건 현장들.
방안, 골목길, 백화점 앞, 공원, 아파트 옥상.
거기 있는 바닥 모두 붉은색이었다.
이러한 기억들과 함께 사람을 살해했던 잔인한 감촉은 다시 내 손에 전해지고 청명했던 하늘은 갑자기 까맣게 어두워진다.
난 어두운 하늘 아래 순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내가 옥상에서 허둥지둥하는 사이, 옥상 밖 환한 세상이 보인다.
어둠으로 가득한 여기와 다른 암흑 밖 세상.
저기 암흑 밖 세상의 환한 빛은 마치 나에게 여기로 오라 손짓하는 것 같다.
난 그런 세상의 손짓에 화답하듯 아파트 난간을 밟았다. 그렇게 옥상 위에 우뚝 선 나는, 저기 있는 세상을 향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그런데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른 나는, 아래로 향하는지 하늘로 향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누구를 피해 도망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날고 있다는 것뿐.
그리고 나는 천사의 날개를 펴고 자유로이 세상을 향해 날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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