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워프 엔진

진지한 분위기 속 수진과 다르게 계속해서 말끝을 흐리는 민혁에 수진은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수진 : 뭐예요 그 비리비리한 말투는? 노출 위험도 무릅쓰고 도와줬건만!
민혁 : 아, 그 화장실이 급해서 ...
수진 : 참나, 일단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전부예요. 나머지는 나중에 또 얘기하고 ... 화장실이나 빨리 가보세요!
민혁 : 그럼 시, 실례!
수진은 언짢은 표정과 함께 민혁을 보내주었다.
진짜 똥이라도 마려운 듯 허겁지겁 방을 나가는 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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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회의실에서 빠져나온 민혁은 윤정부터 찾았다.
위조된 수렵 면허와 공문 서류를 먼저 챙겨놓은 윤정은 먼발치 기둥 뒤에 숨어 민혁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 민혁.
민혁은 윤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윤정 : 팀장님이랑 무슨 대화 나누셨어요?
민혁 : 내가 부탁한 일이라고, 박상현 코드 번호에 관해 얘기하던데? 코드 확인이 안된다구.
윤정 : 코드 번호요? 코드 번호가 뭐지?
민혁 : 너도 뭔지 모르는 거야?
윤정 : 네, 아무래도 까마귀 내부 일은 저도 자세히는 몰라서 ...
윤정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민혁의 표정을 살폈다.
방금 임무 브리핑에서 드러난 다소 빈약한 경력이 의식된 윤정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민혁 역시 윤정을 대하는 태도가 약간 편해진 느낌이었고, 윤정은 그런 민혁이 조금 얄밉게 느껴졌다.
윤정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민혁 : 으음? 뭐가?
윤정 : ... 됐어요. 선배 워프엔진 에너지 충전해야 되니까 따라오세요.
민혁은 윤정을 조금 더 놀려보고 싶어졌다.
민혁 : 근데 윤정이 너 혹시 총 쏴본 적 있어?
윤정 : 저희도 작전 수행할 때 권총 정도는 쓰거든요?!
버럭 화를 내는 윤정이었다.
민혁 : 아니, 이번에 엽총이라잖아? 엽총이면 장총 아니야? 권총이랑 장총은 다른 것 같아서 ...
윤정 : 하! 그럼 선배는요?
민혁은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었고, 불길한 예감이 든 윤정.
민혁 : 군대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 중에 총 안 쏴본 사람이 어딨어? 그것도 ‘엽총’하고 똑같은 길다란 ‘장총’
뻔하고 흔한 대한민국 남자의 군부심.
눈썹 위가 꿈틀거리는 윤정이었다.
윤정 : 하! 그래요? 그럼 그 엽총으로 호랑이, 그것도 사람 잡는데 아주 냉혹하다는 3마리 전부 혼자 잡아보세요! 전설이라 불리는 민혁 선배가 전부 때려잡는 동안, 저는 뭐 어디서 푹 쉬고 있을 테니까요!
그제야 현실을 파악한 민혁.
민혁 : 미, 미안. 그냥 농담 한 번 해봤어 ...
윤정 : 하루 만에 많이 편해지셨네요? 장난칠 여유도 있고. 엽총 사정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또 그걸로 호랑이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민혁 : 여기 민혁이 말해줬어. 권윤정 너를 찾아가라고. 너가 도와줄거라고 ...
불리할 때는 항상 다른 민혁이 했던 말을 전해주는 민혁.
그 말은 윤정의 불만이나 화가 사라지는 마법과 같은 말이었다.
윤정 : 됐어요.
윤정은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고, 민혁은 윤정을 뒤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며, 기둥과 여러 복도를 돌고 돌아 다다른 곳.
그곳은 워프 엔진 연구소였다.
투명하고 거대한 통유리 벽 내부는 각종 장비가 즐비해 있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여러 명 보였다.
연구원들은 각자 바쁘게 무언가 몰두하고 있었고, 단 한 명만이 윤정과 민혁의 방문을 알아챘다.
준상 : 왔어?
다른 이들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연구원 A팀장 유준상.
통통한 체형에 윤정과 엇비슷한 키의 준상은 엄지와 중지로 안경을 치켜세우며 둘을 반겼다.
윤정 : 민혁 선배 워프 엔진이 방전됐어요.
준상 : 그래? 워프 엔진 완전히 방전되려면 시간축 점프 5번, 세계축 점프는 100번 이상해야 되는데 ... 흐음, 너 원래 이민혁이 아니구나?
(?!!)
깜짝 놀란 민혁은 다급히 윤정을 쳐다봤다.
윤정도 준상의 발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표정이 역력했지만, 준상은 되려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준상 : 아, 윤정이는 까마귀도 아닌데 시간축 얘기는 하면 안 됐나? 크큭, 뭐 어때? 나중에 까마귀 들어가면 되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한번 엄지와 중지로 안경을 치켜세우는 준상.
누구나 놀랄만한 민혁의 진짜 정체보다, 말해서 안 될 사안이 더 신경 쓰였던 준상이었다.
준상 : 줘봐.
준상은 멀뚱멀뚱 서 있던 민혁의 손목을 걷어 올려 워프 엔진을 한 손에 덮었다.
착 착 착 착 착!
어떤 짓을 해도 풀리지 않던 손목 끈이 워프 엔진 본체 쪽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손목 끈이 사라진 워프 엔진만 남아있었다.
준상 : 시계 줄이 나노머신 입자들이라, 사용자가 손바닥으로 전체를 덮으면 이렇게 착용이 풀리는 거야. 알겠지?
민혁 : 어, 저를 어떻게 ...
윤정 : 팀장님, 뭐에요?!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준상 : 크큭, 니들 바보냐?
준상은 민혁의 워프 엔진을 박스처럼 생긴 기계 안에 넣었다.
삐릭 ... 삐릭 ... 삐리릭!
기계는 잠시 뒤, 숫자와 문자가 잔뜩 적힌 화면을 띄었고, 준상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준상 : 원래 이민혁보다 3살 어리네? 세계축은 ... 뭐 엄청 차이나네, 이 정도면 어린 시절 배경도 많이 달랐겠는데? 부자였거나 거지였거나, 가족이 여럿 더 있었거나 아예 없었거나.
민혁은 가족 얘기에 표정이 잠시 움찔했다.
윤정 : 팀장님! 팀장님은 어떻게 아시는 거냐구요?! 그보다 ... 어쩌실거에요?
준상 : 뭘 어째. 민혁이가 이 정도로 판 벌이는데 아무 준비도 안 했을까? 워프 엔진 충전 할 때마다 숨기려고 했어? 나 아니었으면 너희는 지금 들켰던 거야. 에휴, 권윤정 이 헛똑똑이.
역시나 안경을 치켜올리는 준상.
준상은 기계 상자에서 꺼낸 워프 엔진을 민혁에게 건냈다.
준상 : 손목 위에 올리고 손바닥으로 덮어봐.
착 착 착 착 착!
다시 손목에 감싸지는 워프 엔진.
준상 :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이거야. 그 이상은 알잖아 위험한 거. 이민혁 미친 영웅 놀이에 동참 할 생각은 없어. 내 목숨 살려준 거 은혜만 갚는단 마인드. 오케이?
윤정 : 미, 믿어도 되는거죠?
준상 : 야, 지금 바로 보고 안 하는 걸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무슨. 걱정하지 마.
민혁 : 감사합니다 ...
감사함을 표하는 민혁에 준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준상 : 오오! 이민혁한테 ... 아니, 이민혁 얼굴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다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다야. 크큭.
(난 여기서 도대체 얼마나 싸가지가 없던 걸까.)
윤정 : 작전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준상 : B동 연구소 완전히 날아간 거 알지? 여기 A동 아래로 가서 점프해라.
윤정 : 가요 선배.
민혁 : 응.
(미치겠다 ... 이제 진짜 임무 시작인가?!)
연구소 아랫층 ‘워프존’에 도착한 두 사람.
임무 투입을 기다리는 많은 요원들이 보이고, 민혁이 도착하자마자 수 많은 요원들 사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민혁이네?!)
(어제 복귀했다던데?)
(어제 복귀했는데 바로 임무라고?)
(작전에 미친 새끼, 여전하네)
남자 요원은 민혁에 대체로 적대적인 듯 보였다.
(피투성이로 복귀해서 권윤정이 껴안고서 왔다는데, 민혁 씨 괜찮은가?)
(권윤정이 불여시 같은 년이라니까? 민혁 선배는 카리스마지, 저건 그냥 싸가지야.)
(근데 민혁 선배가 부사수로 고른 게 권윤정이라잖아?)
여자 요원들 역시 윤정에 적대적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전부 들리는 윤정과 민혁.
윤정 : 신경 쓰지 마세요. 선배 커리어나 실력이 독보적이라 뒤에서 저래 놓고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해요. 지금 여기에 선배가 눈치 볼 사람 한 명도 없으니까, 혹시 누가 말 걸면 최대한 싸가지 없게 굴면 돼요.
그때, 남자 요원들 사이에서 제법 덩치 좋은 사내가 민혁에게 다가왔다.
대성 : 야, 이민혁.
윤정은 민혁에게 속삭였다.
윤정 : (어제 본부 로비에 김대명 기억하시죠? 김대명 친형이에요. 그냥 반말로 싸가지 없게 굴면 되요.)
대성 : 어디서 처맞고 질질 끌려왔다더니 멀쩡하다?
민혁 : 너였으면 실려 왔을 것 같은데?
(풉!)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받아치는 민혁.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다른 요원들도 웃음을 참지 못했고, 이번에는 윤정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성 : 우하하하! 싸가지 여전하네? 걱정되서 그러지이, 보니까 얼마나 못 쳐먹고 작전 뛰었으면 몸뚱이가 좀 작아진 것 같은데?
평소 민혁에 라이벌 의식을 갖고있던 대성은 조금 왜소해진 민혁의 체격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대화에 위험함을 감지한 윤정은 대성을 막아섰다.
윤정 : 선배님, 저희 작전 투입시간 다 되갑니다.
대성 : 얼마짜린데?
윤정 : 열흘 보고 있습니다.
대성 : 그래 잘 다녀와라. 다치지 말고.
대성은 윤정의 요구에 예상외로 별말 없이 둘을 보내주었다.
대성이 비켜선 넓은 공간에는 작은 방 크기의 원형 통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고, 윤정과 민혁은 그중 하나에 들어섰다.
윤정은 워프 엔진 사용이 처음인 민혁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윤정 : 설정된 세계축으로 이동하는 걸 점프라고 해요. 엔진이 작동을 시작하면 허공에 균열이 생기면서 그곳에 강렬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요. 블랙홀 같이.
민혁 : 아프진 않아?
윤정 : 네, 조금 어지러운 정도에요. 참고로 점프는 어디서나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빨려 들어갈 때 주변 물체나 사람이 같이 빨려 들어갈 수도 있어서 임무 시작할 때는 이렇게 워프존이라는 작은 방에서 안전하게 출발해요. 워프 엔진 하나의 입력값이 보통 사용자 한 명 몫보다 조금 넉넉한 정도라 물체는 괜찮을지 몰라도 사람이 같이 빨려 들어가면 위험해요.
민혁 : 응 ... 이해했어.
윤정 : 그럼 출발할까요? 먼저 보내드릴게요.
윤정은 민혁의 워프 엔진의 화면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손목 위로 작은 홀로그램이 나왔고, 허공의 홀로그램에 무언가 입력하는 윤정.
입력하는 손이 무척이나 빨라 뭐가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민혁이었다.
윤정 : 다 됐어요. 준비하세요.
윤정의 말이 끝나자, 민혁의 등 뒤로 태어나 처음 느껴지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 서늘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민혁의 몸은 튕겨져 나가듯 강렬한 힘으로 빨려 들어갔다.
민혁 : 으아아아아아악!!
털썩!
1초 남짓한 정말 찰나의 순간, 설정한 세계축으로 도착한 민혁.
자신을 잡아끌었던 강력한 힘의 여파로 발라당 넘어져 버린 민혁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는 민혁.
이내 차원의 균열이 열리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 사아아아
계단 두어 칸 높이 허공 위에 깨끗하게 갈라지는 공간, 신기하리만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열린 공간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윤정.
윤정은 민혁과 다르게 사뿐히 내려앉아 주위를 살폈다.
두 사람은 자동차 도로 위 한복판이었다.
인적없는 도로는 잘 포장된 깨끗한 2차선 도로였지만,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량이 한 대도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시골의 어딘가였다.
윤정 : 저희 옷부터 구해요.
그곳엔 몹시 차가운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민혁은 자신이 평행우주 관리국으로 끌려가기 전, 한겨울 12월의 날씨였던 것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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