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어린 강장수

윤정 : 허튼짓 말고 거기 그대로 계세요!!!
차원의 균열로 사라지는 민혁을 향해 소리치는 윤정.
민혁 : 으아아아아악!!
그렇게 민혁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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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이전의 세계축을 점프할 때의 느낌보다 더욱 서늘하고 무서운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전처럼 1초 만에 세계축을 이동했던 경험과 다르게 이번에는 정체 모를 차원의 터널을 날아가는 민혁.
민혁 : 으아아아아아악!!
제법 길게 느껴진 찰나의 순간이었다.
‘철푸덕!’
어김없이 땅바닥에 나자빠져 버린 민혁.
민혁 : 뭐, 뭐야 ... 으으 ...
민혁은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내린 논두렁과 눈과 흙이 뒤섞인 흙길뿐, 포장된 도로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시골 동네였다.
민혁은 옷에 묻은 눈과 흙을 털고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소에 짐을 가득 이고서 이동하는 중년 남성을 발견한 민혁.
민혁 : 저, 저기요!!
민혁은 남성에게 달려갔다.
남성 : 뭐, 뭐꼬?! 빨갱이가!!!
남성은 소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민혁 : 에?! 빨갱이라뇨? 저 ... 지금 여기가 어디죠?
남성 : 저리 가소!!!
민혁은 당황스러웠다.
민혁 : 빨갱이라뇨!!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영양군 맞나요?
남성 : 이봐라, 여기가 어댄지도 모리나? 이기 빨갱이 맞네!!
민혁 : 저 서울말 쓰잖아요!! 왜 자꾸 빨갱이 빨갱이 하시는 거에요?!
남성은 잔뜩 겁을 먹다 서울말을 사용하는 민혁을 빼꼼 쳐다보았다.
남성 : 마, 맞네! 옷차림은 또 뭐꼬 ... 국군이가?
민혁 : 구, 국군이요? 저기 ... 지금이 몇 년도 인가요?
민혁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남성 : 일천구백오십 년 아이가 ... 임마 머릴다 떼뿟노?
민혁 : 처, 천구백오십 년이요?!
남성 : 일마 이거 ... 저 짝으로 가믄 국군 병원 있다안카나. 그기로 가보소. 이기 완전 상해 붓네. 쯧.
민혁은 어안이 벙벙했다.
버튼 하나 잘못 눌렀을 뿐인데 1950년 경상북도 영양군에 떨어진 민혁.
민혁 : 잠깐만 ... 빨갱이? 1950년? 뭐야 이거 ... 저기 아저씨!!
소를 끌고 이동하려는 남성을 다시 붙잡는 민혁.
남성 : 와또예?!
민혁 : 지, 지금 그럼 혹시 전쟁 중인가요?
남성은 민혁을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더니, 온몸의 묻은 눈과 흙먼지를 보고 고개를 끄덕했다.
남성 : 마, 니 국군 아이가? 전쟁통에 양키맹키로 쫙 빼입고 뭔소리고? 어서 머릴 떼뿟나 본데, 국군이 압록강 바로 직즌까지 밀고 있다 안카나. 낸또 일마 빨치산인줄 알았노 ... 니 여그서 그러다 빨갱인 줄 알고 총 맞는다.
어안이 벙벙한 민혁.
남성을 그런 민혁을 두고 홀연히 가던 길을 가버렸다.
민혁 : 하 ... 하하 ... 하 ... 미, 미친 거 아니야?
‘허튼짓 말고 거기 그대로 계세요!’
윤정의 말이 떠오른 민혁은 시간축을 점프한 그 자리에서 윤정을 기다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전 세계축과 달리 몹시 추운 날씨의 12월 경상북도 영양군이었다.
(윤정이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그전에 먼저 얼어죽겠어!)
민혁은 너무 추운 날씨에 팔짱을 끼며 남성이 가리킨 국군 병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아, 너무 춥다 ...)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동네 꼬마 아이들의 소리.
동네 꼬마들 : 너그 아부지 죽었따!
??? : 아이라꼬! 우리 아부지 안 죽었다!!
동네 꼬마들 : 아인데?! 지금 일 났다. 다 죽었다카는데?
??? : 아이다!! 우리 아부지는 괘안타! 괘안타꼬!!
한 아이가 동네 꼬마 무리들을 향해 돌진했고, 뒤엉켜 싸움이 일어났다.
민혁은 곧장 달려가 어린아이들의 싸움을 말렸다.
민혁 : 얘들아, 뭐 하는 거니! 친구끼리 싸우면 안 돼!
동네 꼬마들 : 친구 아인데요? 아부지도 없는 아랑 친구 안 하는데요?
??? : 우리 아부지 있따!!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한 아이와 동네 꼬마들.
뒤에서 민혁의 검은색 정장 복장에 겁을 먹은 동네 꼬마 중 한 아이가 민혁에게 물었다.
동네 꼬마1 : 아저씨 국군이에요?
동네 꼬마2 : 와 국군이 여깃노? 있아도 병원에 있제!
동네 꼬마1 : 봐라. 양복이다! ... 아저씨, 진짜로 압록강까지 갔던 사람들 다 죽었어요?!
??? : 안 죽었다꼬!! 으아앙!!
아이들의 계속되는 놀림에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
민혁은 그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민혁 :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어린 장수 : 훌쩍, 훌쩍 ... 강장순데예?! 와예?
어린 강장수는 동네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죽었다며 놀림당하고 있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민혁.
민혁 : 아! ... 얘들아! 나, 나는 장수 아버지 친구야. 아버지 안 돌아가셨으니까 그만 가. 딴데가서 놀라구!
동네 꼬마들 : 아닌데예? 저희 아부지가 국군들 압록강에서 다 죽어삣다는 데예?!
민혁 : 콱씨!
민혁은 동네 똥개에게 겁을 주듯 땅에 발을 굴렀다.
동네 꼬마들 : 우아아악!!
민혁의 위협에 도망가는 동네 아이들.
아이들이 도망가자 울음을 멈추는 어린 장수.
민혁은 그런 장수의 눈물을 옷 소매로 닦아주었다.
민혁 : 장수야. 내가 진짜 너희 아버지 친구거든? 잠깐 너희 집으로 가볼까? 집에 어머니 계시지?
어린 장수 : 진짜 저희 아부지 살아있어예?!
방금 울음을 멈춘 장수에게 거짓말을 할까 사실대로 고백을 할까 고민하는 민혁.
민혁 : 그러니까 너희 집으로 가서 너희 어머니 뵙고 알아봐야 할 게 있어. 집에 어머니 계시지?
말을 돌리는 민혁.
어린 장수 : 엄니 계십니더.
민혁 : 그래, 너희 집으로 안내해 줄래?
어린 장수 : 야.
어린 장수는 민혁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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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한옥 집 앞에 도착한 민혁.
조금 낡아 보이는 듯했지만, 이전 세계축만큼 다 허물어지기 직전보다는 상태가 훨씬 좋은 일반적인 그 시대의 한옥 집이었다.
어린 장수 : 엄니! 엄니! ...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를 찾는 어린 장수.
어린 장수 : 아, 안된다꼬!!
어머니를 찾던 어린 장수는 마당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나무에 쌓인 눈을 보고 빠르게 달려가 조심스레 눈을 털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의 몸통은 짚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혀놓았다.
어린 장수 : 엄니! 나무 얼어 죽심니더! 눈 쌓여가 가지라도 뿌라지믄 우짤라꼬예?!
춘자 : 아가 와이리 호들갑이노 ...
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춘자.
어린 장수의 어머니였다.
춘자는 민혁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물었다.
춘자 : 뉘시요?
민혁 : 아, 저는 ...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고민하는 민혁.
민혁 : 저, 저는 국군입니다! 장수 아버지 일로 찾아왔습니다.
춘자 : 서, 설마 ... 우리 장수 아부지 ... 죽었는교?!
국군과 장수 아버지 일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춘자.
민혁 :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 저는 장수 아버지랑 친구입니다! 가족들이 잘 있는지 부탁받아서요 ...
춘자 : 하이고 ... 깜짝이야 ...
어린 장수 : 엄니! 나무에 눈 쌓이믄 안된다꼬!
춘자 : 조용히케라 손님앞에서! ... 어서 안으로 들오이소.
민혁 : 실례하겠습니다 ...
민혁은 춘자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어둑어둑 해 질 녘이 다 되어가는 시간, 방안은 촛불 하나를 켜놔 주황 불빛의 아른거림으로 가득했다.
민혁을 방으로 안내한 춘자는 곧바로 어린 장수를 불렀다.
춘자 : 가만있어 보이소. 방에 불 좀 지펴야 겠심더 ... 장수야! 너 가 방에 불 좀 때온나!
어린 장수 : (야!)
밖에서 나무에 쌓인 눈을 조심스레 털던 어린 장수는 어머니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했다.
춘자 : 그라고! 불 지피믄 차도 좀 가온나!
장수 : (야!)
역시나 우렁찬 어린 장수의 대답.
민혁 : 장수가 씩씩하네요 ...
춘자 : 아가 시끄럽지예?
민혁 : 아닙니다 ...
잠시 침묵이 흐르는 두 사람.
민혁은 아무 계획도 없이 우연히 만난 어린 장수를 따라왔고, 그런 상황에서 만난 춘자와 무슨 말을 나눠야 할지 몰라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춘자 : 장수 아부지 ... 살아있는교? 지금 아도 없꼬 솔찍하게 말하셔도 됩니더 ...
민혁 : 그게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민혁.
민혁 : 저 ... 잘 모르겠습니다.
춘자 : 예?!
민혁 : 그, 그래서 찾아보려구요!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뱉는 민혁이었다.
춘자 : 차, 찾는다꼬예? ...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아 실망한 듯한 춘자의 표정.
민혁 : 네 ...
춘자 : ... 지도 얘기 들었심더. 국군이 압록강까지 밀어가 다 이기뿐기. 중공군이 억수로 내려와가 밀맀다고예 ... 죽기도 많이 죽었다 카든데 ... 애 아부지 소식이 통 없어가 ...
민혁 :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춘자 : ... 하이고오, 고맙심니데이 ...
춘자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훔쳐 닦아냈다.
춘자 : 근데 성함이? ...
민혁 : 아, 저는 이민혁이라고 합니다.
민혁의 이름을 듣자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춘자.
춘자 : ... 장수 아부지한테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 친구 맞아예?
이미 방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민혁은 머리가 하얗게 된 지 한참 됐고, 입은 열리는 대로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민혁 : 그, 그러니까 ... 그게 ... 저, 전쟁 중에 만났습니다! 제 목숨을 살려주셨어요!!
당황한 민혁은 이제는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춘자 : 아 ... 그래가 서울말씨를 쓰는교.
춘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딱히 의심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이때다 싶은 민혁은 춘자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민혁 : 그, 그래서 제가 장수 아버지 성함도 정확히는 몰라요. 제가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만한 정보들이 있을까요?
춘자 : 장수 아부지 이름은 강만습. 그라고 또 ... 어대 부대인지는 아는교?
민혁 : 아! 그것도 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춘자 : 가만있어 보이소.
춘자는 서랍을 뒤져 편지를 몇 통 꺼냈다.
‘국군 제6사단 7연대 1대대 2중대 중사 강만섭’
편지에 적힌 정보를 확인한 민혁.
민혁 : 혹시 뭐 적을 만한 게 있을까요?
춘자 : 그런 거 없심더. 그냥 이거 한 통 가져가소. 장수 아부지 찾는다는데 뭔들 못 내주겠심꺼?
민혁 : 감사합니다 ...
민혁은 편지를 자켓 품 안에 고이 넣었다.
‘벌컥’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린 장수.
어린 장수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와 컵을 들고 있었다.
춘자 : 차 좀 드시지예. 이게 ‘감재차’라꼬. 감재 우려가 만든 겝니더.
민혁 : 감사합니다 ...
민혁은 불과 몇 시간 전에 마셨던 돼지 감자차를 또 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극심한 추위에 떨다 들어와 마시는 감자차의 맛은 이전과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민혁 : 맛이 좋네요 ...
춘자 : 먹을 게 감재 밖에 없어가 ... 전쟁통에 먹을 게 있는 기라도 어댑니꺼.
민혁 : 그렇죠!
춘자와 민혁의 대화사이에 눈치를 보던 어린 장수는 민혁에게 물었다.
어린 장수 : 아저씨! 저희 아부지 지금 어디있심니꺼?
어린 장수는 활짝 웃고 있었고, 춘자는 고개를 돌렸다.
민혁 : 으, 응? ...
당황하는 민혁을 본 춘자는 어린 장수를 막아섰다.
춘자 : 고마해라. 살아계신단다. 또 찾아도 주신단다. 그러니까 ... 고마해라.
어린 장수 : 치!
어린 장수는 그만하라는 춘자의 말에 조금 토라진 듯 보였다.
어린 장수 : 엄니! 나무에 눈쌓이면 안 된다꼬. 나뭇가지 뿌러진다!
춘자 : 알았다 고마해라 쫌!
어린 장수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방에서 나가버렸다.
민혁 : 나무가 ... 많이 중요한가 봐요?
춘자 : 하아, 맞심더. 그냥 흔한 그런 나문데, 우리 장수한테는 중하지예 ...
민혁 :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춘자 : 장수 아부지가 고마 요 집 뒤에 있는 어린나무 하나 뽑아가 심은깁니더. 장수가 아부지 간다꼬 아가 울고불고해싸 ... 나무 잘 돌보라꼬. 나무가 지라 생각하라꼬 말도 안되는 소릴해싸가 애가 저리 됐심더.
(어릴 때부터 저 정도면 말 다했지 ...)
민혁은 자신에게 물을 뿌리던 늙은 장수가 떠올랐다.
춘자 : 나무는 그저 나문데 ... 왜 저카는지 몰겠심더.
민혁 : 그래도 마음이 의지될 곳이 있으면 장수한테는 좋은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건넨 민혁은 불과 몇 시간 전, 나무를 없애려 했던 자신에 양심에 찔렸다.
춘자 : 날이 벌써 이리됐는데, 묵을 곳은 있심니꺼?
민혁 : 아 ...
춘자 : 하루 묵고 가시지예. 우리 장수 아부지 땜에 여까지 와 고생하셨는데예.
민혁 : 그럼 ...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
춘자 : 일 없심더. 장수랑 지는 여서 자고, 옆방이 비아가 그기서 묵으시면 될낍니더. 가만있어 보자. 옆방도 불 때야겠노. 장수야!!
어린 장수 : (야!)
춘자 : 옆 방도 불 좀 때라!
어린 장수 : (야!)
민혁 : 감사합니다. 저는 말씀해 주신 것도 있고 정리할 게 있어서 지금 바로 옆방으로 가겠습니다.
춘자 : 지금가믄 바닥이 억수로 찰 낀데 괘안심꺼?
민혁 : 괜찮아요!
춘자 : 편한데로 하이소.
민혁은 춘자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나무를 꼭 껴안고 있는 어린 장수의 모습이었다.
어린 장수 : 아부지 ...
(나무를 없애는 건 ... 아에 불가능하겠다 ...)
여차하면 나무를 없앨 생각을 했던 민혁은 어린 장수의 그런 모습에 경우의 수를 하나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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