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5)

솔직히 내가 이렇게 설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시켰다.
아마도 절반은 지금 상황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절반은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당장의 계획은 얻어맞고 있었던 사람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미 얻어맞고 있는 걸 보면 사채업자 사장과 관계는 틀어진 것 같았고
잘만 회유하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난 상황을 살피러 사무실 쪽으로 가려다 멈칫했다.
‘아차차 또 큰일 날 뻔했네. 혹시 모르니 옷은 바꿔 입자...’
난 이미 체육관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번 했고,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학교 교복을 입을 걸 아까 저들이 봐버렸으니 위장은 필수였다.
난 두리번거리다 골목 한쪽에 의류수거함을 발견했다.
‘저거다!’
난 주위를 살피고 은밀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헌옷 수거함 출구에 걸린 자물쇠를 향해 워터 붐을 조절해 날렸다.
첫 시도는 너무 약했는지 부서지지 않았다.
난 다시 출력을 조금 높여 자물쇠를 부쉈다.
-폭! 퍽! 챙!
‘됐다!’
난 자물쇠가 부서진 의류수거함을 열고 헌 옷을 뒤적였다.
예상과 달리 옷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는 옷도 여자 옷뿐이었는데, 무슨 화류계 여성이 내놓은 옷인지 대부분 있어야 할 부분이 없는 희한한 옷이었다.
그 중 그나마 내가 입을 만한 것을 주워들었다.
잘 늘어 날 것 같은 검정 레깅스와 커 보이는 검은색 긴 팔 티였다.
‘이런... 이것 밖에 없나. 옷 사는 것에는 돈을 아끼고 싶은데.. 다른 수거함이라도 찾아볼까?’
잠시 옷을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 사무실이 있던 건물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난 얼결에 손에 쥔 옷을 들고 수거함 뒤로 숨었다.
숨어서 그쪽을 몰래 보니, 그 콧수염 사장을 필두로 문신 사내들이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중 맨 뒤에 두 명의 조폭은 힘겹게 무언가를 나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황당하게도 죽은 듯 축 늘어진 흉터의 사내였다.
가로등 불빛에 약간 흐릿하긴 했지만 분명 그가 맞았다.
‘뭐..지? 설마... 죽인 거야?!? 아.아니 겠지.. 기절 한거겠지?!?’
그들은 차 트렁크를 열더니 그를 트렁크에 쑤셔 넣듯 집어넣었다.
마치 범죄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난대 없는 상황에 심장은 거칠게 방망이질 쳤다.
‘고작.. 날치기 실패했다고 죽인다는 건 마.말이 안되잖아. 서.설마 아니겠지..’
난 상황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그중 한 긴 머리 사내가 한편에서 담배를 깊게 빨고 있는 사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형님...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리 식구 아닙니까..”
“그람 우짜냐? 그 씨벌놈 성격 몰러서 그르냐??”
긴 머리 남자는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차라리 그 고삐리 놈. 어떻게든 잡아 족치지 그러셨습니까!”
“염빙! 우덜이 왜 법정이자만 받는지 잊었냐? 검찰이 관련되면 더 복잡해진다. 보류허자.”
“하지만!!..”
사장은 그의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씁! 흰소리 말고 연장이나 단도리 혀라. 오늘 우째 느낌이 거시기 해분다.”
긴머리의 남자는 깊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휴~... 예... 형님...”
그들은 중형차 2대에 나눠 탔다.
그들이 곧 자리를 뜰 것 같아 난 마음이 다급해졌다.
‘고삐리는 날 말하는 것 같고.. 씨벌놈은 또 누구지? ... 젠장 .. 일이 점점 커지네... 쫓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으아 미치겠네. 하지만... 유일한 증거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질 판인데.. 쫓아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시간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손에 쥐어진 레깅스와 쫄티를 급하게 갈아입었다.
잘 들어가지도 않는 그 옷들에 손발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옷은 아주 꽉 끼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밝은 곳에서 보았다면 분명 영락없이 변태로 낙인 찍힐 모습이었다.
난 가방에서 아까 만든 마스크를 꺼내 쓰고
교복과 신발을 넣어 의료 수거함에 대충 숨기고 그들을 쫓았다.
그리고 이미 시야에 사라진 차를 찾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호흡을 조절하고 발로 워터 붐을 사용했다.
-팡!! 붕~~!
난 제법 높아 보이는 건물로 올라갔다.
그리고 착지를 위해 다시 워터붐을 조절했다.
하지만 호흡 조절에 실패해 살짝 굴렀다.
“윽!”
살짝 아픔이 느껴졌지만 난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난 곧바로 난간으로 달려가 두리번거리며 차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어디지······?. 저기다!’
난 곧바로 그 차가 진행하는 방향 쪽 건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두세 걸음 달음질친 후 다시 워터 붐을 사용해 그 건물로 건넌 뛰었다.
난 계속해서 그 차의 위치를 확인하며 다음 건물을 찾아 뛰기를 반복했다.
물론 아직 숙련되지 않아 움직임이 투박했다.
하지만 몇 번을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능력 사용에 익숙해져 갔다.
‘이제 좀 익숙해 진다. 역시 난 실전파인가. 크하핫.’
난 계속해서 그들을 쫓았다.
시내 안에서는 신호도 걸리고 차도 밀려서 비교적 여유 있게 따라붙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시 외곽으로 빠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발을 디딜 만한 높은 건물도 사라지고 차의 속도도 빨라졌다.
난 자연스럽게 공중에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 양발을 번갈아 워터 붐을 사용했다.
나 조금씩 갈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갈증이 너무 심해져 정신을 잃고 흙탕물을 먹은 전례가 있으니 덜컥 겁이 났다.
‘젠장.. 어쩌지? 여기서 추적을 포기해야 하나?’
그러다 문득 달을 가린 구름이 보였다.
‘어! 어쩌면 구름은 수증기의 결집체니까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밑져야 본전이니 시도라도 해보자.’
난 워터 붐의 출력을 최대로 높여서 구름에 도달할 때까지 연속으로 사용했다.
구름에 도달하자 다행히 해갈이 조금 되는 것을 느꼈다.
‘오! 된다!’
하지만 구름은 직접 마실 수 없었고, 피부로 흡수해야 해서인지 생각만큼 충분히 해갈되지는 않았다.
딱 적당히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구름이 낮고 많은 날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추적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난 계속해서 발은 놀리며 작게 보이는 차를 뒤따라갔다.
하늘을 뛰어다니는 환상적인 상황이지만, 낭만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감각을 떠올리며 호흡 조절과 발에 힘을 주는 타이밍 등등 미세 조절하기에 바빴다.
어는 순간 건물은 완전히 사라지고 숲 같은 지형이 나타났고 주위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서울 근교에 이런 숲이 있는 지형이 있다니.’
난 차의 불빛을 보고 그 차를 계속 따라갔다.
산길 비슷한 곳으로 들어서는지 차의 불빛이 굽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는 곳이 보였다.
난 직감적으로 이들의 목적지가 그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지는 저긴가?’
차는 그 곳 앞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 곳엔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는 듯 고급 suv 차가 두 대 주차 되어있었다.
난 그곳 근처 나무로 활강해 착지했다.
‘헉..헉... 엄청 힘드네.....헉.헉. ... 얼마나 멀리 온 거지?’
난 조심스럽게 불이 켜진 곳을 가보니 제법 커 보이는 건물이 하나 보였다.
그 건물 바깥은 여러개의 철창이 즐비한 곳이었다.
주차를 마친 사채업자 일행은 차에서 내린 후 건물의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난 은밀히 내려와 그 건물 창문으로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악취가 심하게 났다.
‘윽.. 무슨 냄새야..’
난 섣불리 얼굴을 내밀기보다는 깨진 창문 모서리 부분에 스마트 폰 카메라를 대고 그곳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증거를 남기기위해 녹화를 시작했다.
창문으로 본 내부는 넓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그 창고 주변부는 철제 책상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고, 그 책상 위에는 섬뜩한 형태의 칼과 톱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철제 책상 사이엔 가스통과 그것에 연결된 커다란 토치 같은 것이 있었다.
그나마 중앙은 비교적 공간이 있었는데 천장에서 내려오는 갈고리 달린 체인과 수도와 연결된 긴 호수가 늘어져 있었다.
아마도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개 도살장 같았다.
난 건물 내부의 음산한 분위기가 압도 되는 것 같았다.
난 어쩐지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괘.괜히 왔나..’
그리고 정중앙에는 이미 온 손님들이 있었다.
매우 잘생긴 청년 하나가 철제의자에 떡하니 앉아 있었고, 그 뒤로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들이 6명이 둘러싸듯 서 있었다.
사채업자 일행들은 건물로 들어가 그들 앞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을 본 청년은 다소 격양된 말투로 말했다.
“정사장님 그깟 사소한 일 하나 못하면 제가 어떻게 일을 맡기겠어요?”
사채업자가 담담히 말했다.
“쩝. 이번 일은 미안허게 됐소. 중간에 쪼께 껄쩍지근한 일이 생겨부러서 거시기 해부렀소. 그라도 이미 꼬리 잘랐응게. 너무 걱정하덜 마소.”
청년이 놀랐다는 과장 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와~ 벌써요?”
청년은 크게 비웃으며 말했다.
“푸하하하. 근데 그거 알아요? 내 입장에선 정사장님이 꼬린 거?
“에헤이~그런 섭한 소리를. 다시는 이런 일 읍도록 단도리 허겄소. 그라지 마소.”
청년은 여전히 언짢다는 듯 말했다.
“하아~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시네. 정사장님! 충치 생긴 걸 방치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뿌리째 뽑아야 해요. 인생이 그래. 그거 조금 섞은 거 당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거든. 근데 그걸 내버려 두니까 근간을 흔드네? 그럼 난 어쩌면 좋을까? 그냥 썩은 부분 도려내고 때우는 게 낫지 않을까?”
정사장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홍대표님.. 농이 지나치지 싶소? 나가 지금까지 헌일이 얼만디. 이런 식이면 곤란허지.”
홍대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 갔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게 문제야. 당신이 너무 많이 알아. 이미 경찰 조사 들어갔고 당신 이름까지 거론된 상태야. 이제 당신 노리는 건 시간문제라고. 조사 시작하면 우리 사업 이야기, 내 이야기 안 나온다는 보장 있어요?”
“이 정홍식이 그리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요. 나가 치밀허게 계획 세워났응게 걱정마소. 좋게. 좋게. 넘어갑시다.”
홍대표는 가소롭다는 듯 웃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진짜 치밀하긴 하더라. 나랑 관련된 자료 따로 모아 두는 걸 보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요?”
정사장 그의 말에 얼굴은 와락 꾸겨졌다.
“.....허허허.... 이 음멍한 놈...아주 감시가 일상이구만..”
정사장은 얼굴을 확 바꾸고 정색을 하고는 소리쳤다.
“야들아 뭐더냐!! 이미 볼장 다 본 거 안보이냐!! 배떼지에 공기 좀 넣어 드려라!”
정사장의 외침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그의 패거리들은 순식간에 연장을 꺼내 들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으으앗!!!!!!!!
정사장 패거리와 홍대표의 거리는 고작 3m도 안되는 거리였다.
청년은 달려드는 그들을 보고는 얼어붙은 것인지 귀를 막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허.헉! 아.안돼!?’
내가 순간 홍대표을 살려야 하나하고 움찔한 순간,
홍대표의 똘마니들이 순식간에 품에서 무언가 꺼내들었고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탕! 탕! 탕! 탕! 탕!
놀랍게도 그들의 손에는 소음기 달린 총이 들려있었고, 순식간에 피는 사방으로 튀어 벽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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