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의 주인

퀘스트.
각성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러 특권 중 하나.
완료 시 짭짤한 보상을 준다고 알려졌다. 보통은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즉시 떴다.
뭐 퀘스트 목표는 간단했다. 몇 마리를 처치하라거나, 우두머리를 잡으라거나 제한시간까지 버티기 등 주로 마수와 관계되었다.
물론 던전 진행 도중에 급작스럽게 퀘스트가 나타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마수와 관계되지 않는 퀘스트도 있었고.
하지만 이 두 개가 겹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각성자들이 당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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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검의 주인이 되십시오. 원 주인을 죽여야 온전히 가질 수 있습니다. / 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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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었다. 괜히 눈떴다가 ‘살아있네?’ 하면서 찌르면 어떻게한단 말인가.
“진짜 이놈의 게이트에선 별 일이 다 생긴다니까··· 어···뭐야? 퀘스트?··· 야 니들도 떴냐?”
“큰 형님도요? 설마.. 주인을 죽이고 검을 빼앗으라고 나왔나요?”
내용이 심상찮았다.
손에 있는 이 검이 내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저들이 검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더 찔릴테니까.
그건 싫었기에 용기를 가지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보일락말락했지만, 대충은 뭐하는진 알 수 있었다.
일어나지 않아야할게 일어났다는 듯 멈칫하며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작은 형님··· 이런 퀘스트도 있습니까?”
“아니...잠깐, 들은적은 있는디..”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 입을 꾹 닫았다.
[..와하하하하!! 그래. 나를 가지려는데 이 놈은 너무 약하다! 오직 강자만이! 나를 가질 수 있다!]
마음속에서 큰 소리가 들렸지만 여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슬그머니 뜬 눈과 ‘형님’들의 눈이 서로 마주쳤으니까.
‘아 진짜..’
이 상황에서까지 죽은 척을 하는건 바보짓이었다.
피하든가 도망치던가, 항의하던가, 애원하던가. 이외의 답은 백지를 내는것과 다름없지.
재빠르게 벌떡 일어나자 각성자들이 쳐다봤다, 침묵에 휩싸인채.
하긴. 나 같아도 죽인 상대방이 다시 일어난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 같긴하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와..이게 무신.. 칼로 찔렸는데 일어나는거여?.”
“이새끼 이거..야 막내, 제대로 못찌른거아냐?”
“아닙니다 형님. 분명 제대로 배를 푹 찔렀습니다. 피 나온거 보시지 않았습니까?”
“음.. 뭐, 음.. 이게 무..아 뭐 좋아. 일단 저놈부터 죽이고 생각하자고.”
병장기를 꽉 쥐고 다가오는 각성자들.
나도 모르게 손에 생긴 검을 꼭 말아쥐고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검을 써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검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볼 수 있었다.
긴 날
철로 된 칼자루
칼날과 자루 사이에 양옆으로 펼쳐진 가드.
이상하게 많이 가벼운것만 제외한다면 그냥 영상매체에서 자주봤던 일반 검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아니, 겉모양만 친다면 오히려 앞에 서있는 각성자놈들이 든 병장기가 더 멋져보였다.
‘솔직히 생긴건 그닥..’
[..뭘 감상쳐하고 있어. 뒤지고싶냐. 내가 이래뵈도..]
“야, 순순히 내놓아라. 그러면 이번엔 목숨을 살려줄테니.”
가장 앞에선 자, 형님이라 불리던 자가 칼을 겨누며 또다시 ‘협상’을 시도했다.
“···진짜?”
[믿냐 병신아. 아니다. 그냥 주면 안되겠냐? 너 너무 약해빠졌어.]
갈등했다.
검이 귀중해 보이는건 둘째다. 문제는 하나. 오직 나였다. 각성자도 아닌마당에 게이트에서 나온 물품을 제대로 쓸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난 고작 일반인 이니까.
하지만 준다고 해서 내가 살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안 주자니 다시 한 번 더 배때기에 구멍 나겠지.
차라리 그냥 주어서 살아남는 길을 도모하는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뭐 돈이야 ‘물의 기술석’을 팔면 되는 일 아닌가.
어차피 10억만 있어도 당장의 급한 불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화재도 어렵지 않게 제압이 가능하리라. 돈이란게 다 그렇지 뭐.
‘그래. 차라리 욕심내지 말자.. 검을 주는대신 기술석을 달라고 하..’
하지만 내 장미빛 구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 기술석 내가 먹었는데?]
‘뭐??’
잘못들었나?
‘어.. 내가 잘못들은거지?’
[아니 맞아. 기술석 내가 먹었다고.]
‘그 비싼, 아니, 누가봐도 10억원은 되보이는 걸? 그냥 먹어치웠다고?’
[나참, 그거 먹은 덕분에 내 ‘레벨’이 올라서 너가 자동으로 치유된거다.]
‘레벨?..아까 홀로그램에 뜬거 말하는건가?’
[그래. 고마운줄도 모르고..그깟 돈이 중요하냐. 내가 있는데.]
‘이런 미친.. 난 당장 돈이 필요하다고! 잠깐..’
막혀보이는 벽에도 쥐구멍 하나쯤은 있는 법이.
검의 말 덕분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불현듯 머리에 튀어올라왔다.
‘그래. 네가 있었지.’
[나와 함께라면 이까짓 일들은-]
‘널 팔면 되겠다.’
[손쉽게 처리 가능.. 잠깐 뭐? 감히 날 팔아? 이 씨부랄놈이 나를 뭘로 생각하는거야?]
‘각성자도 아닌 내가 너를 어떻게 써먹어? 게다가 당장 이 상황은 어떻게 벗어나는데? 나는 검을 쓴 적도 없다고! 차라리 너를 저놈들에게 비싼값에 파는게 낫..’
[이거 미친놈아냐? 하나 뿐인 무기를 주면 너는 살 수 있겠냐?]
‘어짜피 뭘해도 살 방법이 없다면, 그나마 제일 확률 높은 걸 고르는게 정배지’
분명 나쁘지만은 않은 계획이었다.
시간을 너무 끈 것만 빼면.
“···왜 아무 대답이 없지? 이번에도 도망칠 생각을 하는거냐? 정신 못차렸네 . 야, 저새끼 죽이고 검 가져와.”
아오.. 앞의 사람을 신경썼어야 했는데. 검과 대화하느라 앞의 놈들에게 차마 신경을 쓰지못한게 패착이었다.
“아..아니 그게”
황급히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무기를 든 두 명이 내게 다가왔으니까.
등에선 식은땀이 옷을 젹셨고, 손은 파르르 떨렸다.
“아이고 병신아. 그렇게 떨어서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겠냐?”
“검을 쥐는 자세를 봐라. 잠깐이나마 긴장했던 내가 부끄럽네.”
“크크. 게이트 내부에서 일반인이 각성자들에게 피해나 입힐 수 있을 것 같아? 마력을 더욱 받는다는 우리를?”
그렇게 주절주절 설명할 필요 없어. 나도 잘 아니까.
저들에게 칼을 휘두르는건 요행을 바라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일반인보다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각성자들을 내가 어떻게 제압한단 말인가? 아무리 저들의 신체등급이 F라 하더라도 무리다.
계란으로 바위치는 일이나 다름 없는 일.
[하.. 그런데 너나 쟤네들이나 도찐개찐이네.]
‘뭐가 도찐개찐이야. 저들은 각성자들인데..’
[아 그러셔요? 웃겨 정말. 니나 저놈들이나 서로 존나게 약해서 거기서거기같다. 뭐 너보단 낫겠지만 솔직히 성에 안차긴한다.]
검은 밑도끝도 없이 이죽거렸다. 한 대 쥐어박고 싶네.
무리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올때마다 조금씩 뒤로갔다. 얼마지나지 않아 큰 돌에 부딪쳤다. 이놈의 돌은 왜 여기에 박혀있는거야?
이럴 때 할 수 있는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도망쳐야겠다.’
[푸핳. 도망갈 공간도 없으니 지랄마. 그나마 저놈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니 승산이 아주 없진 않겠네. 물론 타이밍 맞춰 공격해야겠지만···. 그런데 과연 그걸 니가 할 수 있을까?]
‘···왜 자꾸 조롱질이야? 도와주진 못할망정. 내가 주인이라며?’
[나참, 주인이 주인 다워야 주인이지. 주인 같지도 않은 주인을..]
‘아 그냥 입닫어’
[싫어.]
‘이 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이제 고작 다섯 걸음 떨어져 있었다.
네 걸음
아씨 어쩌지? 사과해야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겠지.
이제 고작 세 걸음..
[아하하, 사과하고 싶지? 이미 늦었어. 내 말에 ‘휘둘리는’ 꼬라지 하곤. 뭐 저들도 너하고 도긴개긴이긴해도 어쨌뜬 각성자니-]
‘휘둘?’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았다. 저들이 한 걸음 더 다가올때 손에 쥔 칼을 ‘휘둘’렀다.
수평으로 크게 휘두르자 맨 오른쪽 가슴에서 시작해서 맨 왼쪽 놈 목까지. 그대로 선을 만들었다.
기습적인 공격이라 그런지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이 크게 동그래졌다. 하지만 아무리 F급이더라도 각성자는 각성자란건가.
재빠르게 병장기를 들어 벙어했다,
문제는 그 이후의 상황이었다.
“어?”
검은 여러 무기와 부딪쳤음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그대로 지나갔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검이 지나간것 처럼.
철이 부셔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지 않았다면 빗맞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병장기를 그리 가볍게 지나갔는데 사람의 살이 무슨 문제겠는가. 검은 그대로 각성자들의 살갗을 베고 지나갔다.
각성자의 몸은 일반인보다 분명히 단단할텐데.
말끔히 베인 두 명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상처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씨..씨벌..”
“마..말도..”
사람이 베였다. 심지어는 일반인한테. 이게 말이 되는건가? 눈에 어린 당혹감이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이..이게 무슨.. 일반인따위가 어떻게..”
[···뭐야 이거?···너 일반인 아니냐? 반응 속도 왜이래?]
‘내가 사람을 죽였어.. 내가.. 내가..’
[뭐 그에비해 멘탈은 형편 없네.]
억울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정당방위라 하더라도 죽인건 맞는데. 평안하다는게 말이 되는건가?
‘사람이 죽었어. 내가 죽였다고. 그것도 각성자를. 그걸 가지고 멘탈을 운운해?’
[하.. 이 새끼 존나 답답하네. 이 미친새끼야. 저들은 널 사람으로 보았냐? 왜 혼자 지랄이야.]
‘이 미친 검이 무슨 소리하는거야? 어쨌든 사람은 사람이잖아?’
[아 그래. 그러시겠죠. 뭐 칼 맞고도 그런생각 하는지 보자.]
“하.. 하.. 그래.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이젠 혼자 남아 있는 ‘큰 형님’이 반은 실성한듯 웃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검을 향하는 눈빛이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중간에 퀘스트뜨는것도 이상했는데, 목표가 마수가 아닌 아이템, 그것도 검이라고?..아하하하 마검이구나! 그 검!”
‘마검?’
[얼씨구? 나를 감히 마검 따위로 불러?]
왠진 모르겠지만 검은 불쾌한 티를 팍팍냈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각성자가 ‘아공간 가방’을 소환하더니 도끼를 꺼내 쎄게 말아쥐었다.
“그 검! 너따위 일반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검이 아니다. 마검. 주인에게 막강한 힘을 준다는 그 검! 내게 다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오우.. 저 눈빛 봐. 이봐. 나를 줘도 상관은 없는데 넌 죽을걸?]
알고있다. 검을 향해 내리 꽂은 두 눈. 저 눈길에서 생애가 보장 받을 수 있을리 없겠지.
아무말 않고 있는 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어왔다.
[휘둘러!]
‘휘둘?’
이유는 모르겠지만, 검의 말에 팔이 먼저 반응했다. 아까처럼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수평선을 가르듯 그었다.
<빠직>
검은 우두머리가 들었던 도끼를 깔끔하게 반으로 나눠버린 뒤 목까지 막힘없이 베어들어갔다.
‘헉헉..’
몸과 분리가된 머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자 내가 무슨 짓을 또다시 했는지 마음에 와닿았다,
“헉!”
응당 붙어있어야할 신체가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일반인인 자신의 손으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무릎에 힘이 풀렸다.
[···미친놈. 니가 대체적으로 형편없는건 맞는데 하나는 인정한다. 반응속도 하나 만큼은 각성자에 준하네.]
‘내가 사람을 죽였어.. 내가.. 내가 사람을..’
[..얼씨구? 야, 정신차려!···아씨, 이 새끼 존나 답답하네. 안죽였으면 니가 뒤졌어 이 병신아. 살고싶은거 맞냐?!]
‘살고싶으면?’
살아남으려고 게이트 내부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생존하려고 강도들에게 기술석을 주지 않고 도망쳤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생전 휘둘러본적 없는 칼을 휘둘렀다.
이 모든 행동의 총합은 생존이었고,원칙이었다. 어떤 생각과 행동에서도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 살아야지.’
[이제야 좀 정신차렸네. 야, 몇 명 더 온다. 마력으로 봤을 땐.. 한 여섯 정도 되겠는데?]
‘···어떻게 아는거야? 그것보다 여섯? 만약 저들이 나를 보면 내 상태를 보고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흐하하 시체 네 구와 칼을 든 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니놈이 저들을 모두 죽였다고 생각하겠지. 뭐 나야 좋아. 새 주인을 찾을 수 있으니.]
‘헛소리 말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면 믿어주지 않을까?’
[하하하. 어디 해봐. 공격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게다가 바닥에 쓰러진 놈들과 같은 길드라면.. 더더욱 즐겁겠다. 하하하.]
싸가지없게 말을 하긴 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검의 말이 맞았다. 젠장. 일단 살아남는게 우선이다.
‘일단 도망쳐야겠다.’
[도망? 각성자들에게서? 그럴 수 있을까?]
‘그럼 어쩌라고.’
[내 알바냐. 전리품이나 줍던지, 시체 인척 하든지.]
이렇게 들을 가치도 없는 말도 할줄이야. 평상시라면 무료한 일상에 즐거움이었겠지만, 지금같이 급박한 상황에선 짜증만 났다.
‘시끄러워’
···그래도 바닥에 떨어진 검은 손에 꼭 말아 쥔 채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와 진짜 도망가려고?]
‘그럼 방법이 있어? 일단 도망을..’
[하하하. 이미 늦었어.]
“멈춰라!”
등 뒤에서 돌리는 낯선 목소리.
[내가 도망 못칠 것 같다고 이야기 했을때 알아차렸어야지.]
하..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았다.
여러 명. 아니, 검이 말한대로 정확히 여섯 명이 각기 병장기를 든 채 자신을 쳐다보았다.
“어디를 급히.. 뭐지 이 시체는? 설마..?”
여섯 명이 모두 자신과 검과 시체를 번갈아보았다.
젠장맞을.
이 확고한 증거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마지막 지푸라기도 잡아봐야지 않겠는가.
“잠깐만요! 제가 먼저 공격을 당한-”
“중렬아! 범진아!”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시체로 뛰어갔다.
[와.. 진짜 같은 길드야? 반농반진이었다지만..진짜 좆됐네?]
‘빌어먹을’
하지만 부리나캐 달려간 것 치곤 뭔가 이상했다. 흐느끼며 애도한다기엔 손이 몸을 이리저리 훑고다녔다.
[뭔 물건찾냐? 뭔 손이 저리 바쁘게 움직여?]
몸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지 표정이 찡그려지더니 나를 노려봤다,
“이새끼야! 감히 우리 길드를 공격해? 이놈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석을 노린게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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