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 가장 보통의 사람 (2)

나는 주문을 외웠다.
「절정고수는 땅을 접어 다닌다.」
대공녀의 앞으로 순식간에 접근한 나는, 그녀를 붙잡고 무시무시하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까지 날아왔다.
“자··· 대공녀! 아니, 전지전능한 지구인 민연지! 여기 네가 상처입힐 사람은 없다. 몇 번을 떨쳐내도 널 쫓아 이곳까지 치달아 온 나뿐이야! 전력으로 임해···!”
“제 전력이 어디까진 지 알면··· 후회할 텐데요.”
“아니! 훨씬 재밌어지겠지···!”
그리고 우리의 첫 합은 전조도 없이 격돌했다.
산도 부숴버릴 기세로 날린 내 주먹은 보이지 않는 벽과 충돌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내게 반작용으로 돌아왔다.
손목 돌아가겠네! 이거!
“하핫!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대공녀가 만든 보이지 않는 방어벽.
공간의 단절인가?
아니, 그렇다면 우린 서로를 볼 수 없어야 한다. 가시광선마저 차단되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부술 수 있다.
투-쾅-!
내 주먹은 다시 한번 그 벽을 두드렸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
“전력으로 상대하라고 했잖아. 잔재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깨진 공간의 파편을 꿰뚫고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나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대지가 솟아올랐다.
마치 칼로 쪼갠 듯한 정사각형의 대지가 오르내리고, 생성되고, 소멸하며 나를 덮쳤다.
진짜 샌드박스처럼 세상을 다루잖아?
대단한데!
“하지만 이 루시 님이 훨씬 대단하지! 으럇!”
꽈광-!
나는 솟아오르는 대지를 깨부쉈다.
그리고 그 속으로 파고들어, 불시에 튀어나왔다.
“내가 아직도 위에 있을 줄 알았어?”
그리고 내 주먹이 대공녀에게 작렬했다.
“으윽···!”
대공녀는 신음을 뱉으며 허공 저편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손맛이 썩 좋지 않았다.
흠··· 뭐지?
몇 번 더 때려봐야겠는걸.
나는 다시 도약했다.
“수정펀치 맛 좀 봐라···!”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진짜 느낌이 이상하다.
나는 황급히 지른 주먹을 빼고 거리를 벌렸다.
방금 내가 느낀 건 참격의 기척이었다. 그것도 운악과 동격의 힘을 지닌 일격필살의 참격.
하지만 그것은 바람도, 소리도 일으키지 않은 채···
조용히 내 팔을 양단했다.
“아. 그래. 공간 조작이다. 이거지?”
내 오른 주먹은 중지와 약지의 경계를 중심으로 쩌억 갈라졌다.
잘린 단면은 너무나 깔끔했다.
대공녀가 만든 공간단열이 내 팔을 세로로 잘라버린 것이다.
주먹을 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팔꿈치까지 잘렸겠는데.
“말했잖아요. 후회할 거라고.”
후회는커녕 실망할 지경이다.
“후회? 풋내나기 짝이 없는 너 따위한테?”
“······?”
「악마는 스스로 신체를 복원한다.」
“당신······.”
공간도 마음도 제멋대로 조작하는 전지전능 대공녀께서 고작 이런 거에 놀라시면 어쩌나?
“보더콜리라고 알아? 몇 시간을 놀아줘도 안 지치는 개 있잖아. 날 그거라고 생각해. 더 재밌게 해 달라고.”
순식간에 상처를 수복한 나는 다시 대공녀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거대한 힘을 갖고 있다 한들, 그 정신적 수준은 20대 지구인 민연지에 불과하다.
어차피 넌,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없어.
파-콰-콰-쾅-!
몇 번의 소닉붐.
나는 사방의 공기를 짓뭉개며 대공녀를 두드렸다.
“다시 해봐···! 공간 조작이든 뭐든!”
“그만···!”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의 거대한 힘.
그것이 대공녀 주변의 공간을 저미고 도려냈다. 그녀를 감싼 대기와 대지가 조각나 가루가 되었다.
나도 거기 있었다면 그리 되었겠지만···
“역시, 네 공격은 너무 시시해.”
전조는 다 보이고, 살기도 숨기지 못해. 힘의 크기만 쓸데없이 강할 뿐.
그러니 전부 읽을 수 있지.
“넌 이 세계의 모두에게 사랑받고, 이 세계의 누구보다 강하지. 그러니 싸움이라는 걸 해봤을 리가.”
아무리 작가에 준하는 힘을 쓰고,
전지전능을 가장한다 해도···
그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 같은 게 이 루시 님을 이겨 먹으려고 해? 웃기지 마···!”
나는 4차원 주머니에서 일월단야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어. 살아남고 싶으면 전력을 다해.”
나는 방출하고 있던 강기를 모조리 칼끝에 몰아넣었다.
초압축된 강기의 한 점에 어둠이 자리했다.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공간왜곡의 극단.
나는 운악의 절기를 모방하려 했다.
“너만 공간을 다루는 줄 알았어?”
대공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직도 나와 그녀 간에 있는 힘의 격차는 막대하다.
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일 테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지.
마음껏 놀라라.
그래야 내가 널 살아 있는 채로 잡아 줄 것 아니야?
그리고 내 압축된 강기가, 공간을 베어버렸다.
눈앞의 대공녀는 그 일격에 찢어발겨졌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뭐야? 이거.”
이번에도 손맛이 없다.
공간단열이니까 손맛이 없는 것도 당연한 건가?
아니, 아니야.
찢어발겨진 대공녀의 육체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마치 잉크가 뜬 물을 가른 것처럼, 대공녀의 형상은 참격의 방향을 따라 왜곡되었을 뿐,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아. 뭔지 알았다.”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공포에 찬 대공녀가 다시 한번 공간 그 자체에 상흔을 새겼다.
당연히 나는 그 어린애 장난 같은 일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미적지근한 손맛의 정체가 뭔지
나는 대공녀의 환영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너. 여기 없구나?”
“···!?”
대공녀는 공간을 지배한다.
공간을 구부려 만든 미로 속에 우릴 가둔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릴 가두었다면··· 자신을 가두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겠지.
“지금 네가 보여주는 그 형상. 그건 다른 공간에 숨어 있는 네 본체의 반영에 불과했던 거야. 맞지?”
“······.”
대공녀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이래서 착한 애들은 쉽다니까.
“네··· 맞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저를 상처입힐 수 없어요. 당신의 공격은 무의미하다고요. 날 이만 놓아 주세요.”
“?”
넌 나를 상처입힐 수 없다.
네 공격은 무의미하다.
그건 망할 센 척하는 빌런들의 단골 대사다.
근데 그 대사들이 내 앞에서 단 한 번이라도 진짜였던 적이 있을까?
아니.
“참, 범죄자라는 것들은 자신감이 넘친단 말이야. 자기 앞에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파바바바방-!
나는 다시 공기를 꿰뚫고 대공녀에게 쇄도했다.
그녀의 참격 역시 내 돌진에 반응해 이 공간을 갈라놓았다.
“고마워. 대공녀!”
“!?”
나는 그 공간의 단열을 붙잡고, 좌우로 찢어버렸다.
그 너머에는 새로운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진짜 대공녀가 있었다.
나는 음속 정도의 아주 상냥하기 짝이 없는 속도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얇은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그녀의 목을 붙잡고 지면에 처박았다.
철컥-
“잡았다. 악역영애.”
“커헉···!”
엄살 부리긴, 혹시라도 죽을까 봐 얼마나 섬세하게 힘조절했는데.
“난 두 번이나 네 차원감옥을 꿰뚫고 도망쳤어. 그런데도 이런 곳에 숨어 있다고 안심하다니··· 한 번 나간 곳에 다시 들어오는 건 껌이라고. 생각도 안 해본 거야?”
“흐윽··· 허억··· 헉······.”
나는 대공녀의 위에 올라탄 채로, 숨을 고르는 그녀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 용의자 민연지 씨? 두 가지만 묻고 싶은데··· 대답 해줄래?”
“···도대체··· 흐윽··· 뭘······.”
“이 빙의는 네 의지에 의한 것이었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갑자기 일어났어요···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이 세계에 있었고··· 작가라는 사람이 제게 힘을 양도해 주겠다고 머릿속에 속삭였어요. 그것뿐이에요. 정말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럼 둘째! 황제, 카셀 소백작, 타리안 궁정백, 파리스 시종장, 미콜라 후작 등··· 널 좋아하는 남주들이 폭주하는 것. 그건 당신이 한 짓인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모두가··· 모두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해서···”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공녀에게 소리쳤다.
“똑바로 말해! 그 모두가 오직 널 갖고자 하는 바람으로 극악무도하게 변해버렸는데도 부정하는 거냐!?”
“정말··· 정말 아니에요······.”
그녀는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그래. 아니겠지.
나도 안다.
민연지 네가 그런 짓이나 할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좋아. 민연지 씨. 당신을 대규모 정신조작에 의한 강요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인지하였습니까?”
“······.”
대공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몸은 점점, 그녀가 쓰러진 지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전 아직 포기할 수 없어요. 이 세상엔 제가 필요해요. 저는 꼭 이곳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 거예요.”
그녀는 차원의 그림자 속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는 안 돼.”
“···네?”
“대공녀. 당신이 사라져야만 이 세상은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인이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후배님. 부탁해.”
- 알겠습니다···!
다시 ‘그 감각’이 찾아왔다.
차원닻에 의해 내 존재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대공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뭘 했긴.”
나는 내 목에 있는 초커를 톡톡 두드렸다.
그 초커는 대공녀에게도 똑같이 채워져 있었다.
“목줄을 채웠지.”
그리고 우리는 단숨에 파비안이 있는 곳까지 끌려갔다.
“어떻게···!”
공간 이동을 마친 대공녀의 외마디 비명이 숲에 울렸다.
그녀는 자기 능력을 쓰려고 열심히 정신을 집중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못 달아나. 넌 이미 목줄이 채워졌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파비안을 칭찬했다.
“잘했어. 내가 준 설명서 다 읽었구나?”
“다는 아니고 필요한 데까지는 어떻게든 했어요. 말이 어려워서 정확히 무슨 기능인가 모를 뻔했다니까요.”
그 기능이야말로 차원닻의 핵심 기능.
지정된 초커를 찬 자의 사고에 간섭하여 현실조작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네가 결정타를 넣었네? 파비안.”
“그게 중요한가요. 결국 선배가 깔아놓은 판에 숟가락만 얹은 꼴인데···”
“후훗. 그래도 네 덕이야.”
그때, 대공녀의 손이 루시의 발목을 붙잡았다.
“안 돼요··· 돌려보내 주세요. 제가 이 세계를 지켜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이 세계는 망가지고 말아요. 제가 없으면 안 돼요······.”
그렇게 울부짖는 대공녀의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나는 그녀를 풀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실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다.
나는 몸을 숙여 그녀를 일으켰다.
그리고 품에 껴안았다.
“잘 들어. 민연지. 이 세계는 네 생각과는 달라.”
“다르다니······.”
“나도 꽤 오랫동안 네가 이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했어. 마치 작가처럼.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널 잡으려고 했지.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어. 너도 이 세계에서는 한 명의 등장인물에 불과했던 거야···”
작가의 힘을 양도받은 대공녀.
그녀는 마치 전지전능한 듯 이 병든 세계를 고쳐 치유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앞으로 몇 번을 시도하더라도 실패할 것이었다.
설령 이 세계를 회귀시키더라도.
“···민연지. 이 세계는 네가 생각하는 악역영애물의 세계가 아니야. 너의 존재로 치유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야.”
“그럼 도대체······.”
“이 세계에 있어서 너는 모든 비극의 근원이야. 왜냐면··· 여기는, 로즈니아는 집착물의 세계관이니까.”
오직 그것만이, 내가 이 세계에서 끌어낸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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