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식구 (3)
시운이 늦게 온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시아였으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천연하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일해야 하니까."
"어..."
자신을 길바닥에 홀로 두고 일을 하다 늦게 온 시운이 조금 미워지는 시아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런 내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거 들고 따라와."
시아는 제법 묵직해진 그릇을 들고 앞서 가는 시운을 따라갔다.
시운의 뒤에서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는 시아가 잘 따라오고 있음을 계속해서 알려주었다.
덕분에 목적지에 도착한 시운이 뒤로 돌아 시아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덧 시운의 발걸음과 뒤따라오던 동전 소리가 멈춘 곳은 한 공동 주택의 앞이었다.
어린 소녀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던 동전 그릇을 겨우 들고 있던 시아가 손을 털며 시운을 불렀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그릇을 내려놓은 직후였다.
"이제 다 왔어?"
뒤로 돈 시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갯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그 후 시운이 다시 뒤돌기 직전, 바닥에 놓인 동전 그릇을 본 그가 시아에게 물었다.
"무거워?"
"아니, 별로."
"...그래."
어째서인지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시아가 뒤늦게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으나, 시운은 이미 저만치에서 건물의 현관을 열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아는 별수없이 그릇을 들고 시운에게 걸어갔다.
건물 내부로 들어선 두 사람의 앞에는 계단이 있었고, 시운의 눈치를 보니 계단을 올라야 하는 게 분명했다.
계단 앞에 선 시아는 긴 한숨을 내쉬어 계단을 오를 준비를 했다.
그런 시아를 지켜보던 시운은 말없이 그녀에게서 그릇을 빼 갔다.
그 후 '별로 안 무거운데' 라고 말하고 싶은 듯 한손에 든 그릇을 좌우로 짤랑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이 도착한 3층에는 올라오면서 본 다른 층들과 마찬가지로 세 가구의 집이 있었다.
그 중 한 곳의 현관 앞에 선 시운은 들고 있던 그릇을 시아에게 돌려주고 말했다.
"아까 너 때린 아저씨 집이야. 왜 왔는지 알겠어?"
그 말에 문득 겁부터 나는 시아였다.
늦은 시간까지 구걸을 시키고, 구걸로 번 돈을 힘들게 들고 도착한 곳이 자신의 뺨을 갈긴 아저씨의 집 앞이라니.
왜 왔는지 그 이유 따위야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궁금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도둑, 아저씨는 피해자.
품에는 자신이 구걸로 번 동전들이 쌓여있는 그릇.
이 앞은 아저씨의 집.
"이 돈 아저씨한테 주려고?"
시운은 시아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나직막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과 잘 해."
시아가 어떻게 사과할지 생각할 틈도 없이, 시운은 눈앞의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그 뒤로는 시아를 때렸던 중년 남성이 모습을 보였다.
시운과 시아를 알아본 남성은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너네 뭐야? 이 시간에."
시운은 남성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시아의 뒤로 가 그녀의 등을 살포시 밀었다.
시아는 시운이 주는 힘의 방향대로 발을 움직여 남성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시아는 남성과 마주치지 못한 눈길을 바닥에 고정했다.
"뭐, 뭐야?"
당황한 기색의 남성이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상황의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시운에게 보내는 그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남성을 보며 눈만 깜빡이는 시운을 대신해 입을 연 건 시아였다.
"도둑질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도둑질 안 하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동전 그릇이 무거운 탓인지, 긴장한 탓인지.
그릇을 남성에게 건네기 위해 쭉 뻗은 시아의 팔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동전 그릇과 시운을 차례로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남성을 본 시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동냥으로 번 돈입니다. 혼자서."
시운은 말끝의 '혼자서' 를 강조한 뒤 남성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 후 남성은 그릇을 받아 들고 시아에게 멋쩍은 사과를 건넸다.
"그, 그래... 아저씨도 때려서 미안하다."
낮에 도시락집에서 한 것에 이어 남성의 두 번째 사과였다.
그리고 이번 사과에 대한 시아의 반응은 처음과 달랐다.
처음에는 남성의 사과에도 시큰둥했던 시아였다.
물론 남성에게 뺨을 맞은 직후였다는 것도 시아의 시큰둥한 반응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남성의 사과를 들은 시아는 푹 숙인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처음과는 달리 진심이 조금이라도 느껴졌던 것이리라.
두 사람의 악연이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 된 듯 보이자, 시운이 입을 열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이러고 가는 거야? 그, 그래. 조심히 가라."
동시에 고개를 숙인 뒤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남성은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었다.
두 사람이 모습을 감춘 뒤에도 한참이나 현관에 서서 동전 그릇을 바라보는 그였다.
건물을 나오고 먼저 입을 연 건 시아였다.
"뭔가... 뿌듯해."
"뭐가?"
"비록 구걸해서 번 거지만 내가 번 돈으로 빚을 갚았다는 게."
시아가 보여준 의외의 반응에 잠시 할 말을 잊은 시운이었다.
이내 할 말을 떠올린 시운이 시아에게 말했다.
"따라와."
"아직도 갈 데가 남았어? 이번엔 어디 가는데?"
"도시락집."
"어?"
시아는 놀란 얼굴로 시운을 멀뚱히 쳐다봤다.
마찬가지로 시아를 멀뚱히 쳐다보던 시운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그랬어?"
"갈 데야 널렸어. 길바닥이 내 집인데 뭐."
"...이제 아니니까 따라와."
길바닥 생활을 떠올리며 잠시 굳은 표정이었던 시아가 다시 놀란 얼굴로 시운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시운은 말없이 시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뗐다.
시운에게 이끌려 걷는 동안, 시아는 시운의 마지막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이제 아니라니.
이제 길바닥이 내 집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럼 설마 같이 사는 건가?
내가 그래도 될까?
보육원도, 길바닥도 싫긴 해.
어느덧 걸음을 멈춘 시운이 목적지를 보여주며 시아에게 건넨 말은, 여러 생각에 어지러웠던 그녀의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했다.
"이제 여기가 네 집이야."
무언가 적힌 큰 간판이 시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글을 읽을 수 없던 시아였으나, 간판의 글을 몰라도 이곳이 어딘지는 알 수 있었다.
몇 시간 전 왔었던, 시운이 일하는 그 도시락집이었다.
시운은 시아를 만난 후 처음으로,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겹쳐 본 시운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저 싱그러운 미소가 가혹한 세상에 사그라들지 않기를.
자신과는 다르게, 평범하고 행복하게 자라기를.
"진짜? 진짜야?"
한껏 들뜬 시아의 물음에 시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종소리와 함께 가게의 문이 열렸다.
"왔어요? 안녕, 시아! 또 보네?"
"환영한다, 시아야!"
난생처음 느껴보는 따뜻한 환영에 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글썽이는 눈물을 다급히 닦아 낸 시아가 웃으며 시운을 바라봤다.
"들어가자!"
시운의 손을 꼭 잡은 시아는 앞장서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그날 밤 유독 밝고 따뜻해 보였다.
***
시아를 홀로 두고 가게로 뛰어온 시운의 첫마디는 우목과 민채의 말문을 막기에 충분했다.
"오늘 쉬겠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잠시 대답을 주저한 시운이 짧은 사이 있었던 시아와의 일을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금방 끝난 시운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민채는
"시아? 이름 예쁘게 잘 지었네요?"
라며 시운의 작명 실력을 칭찬했다.
우목은
"네 의도는 알겠는데... 아까 그 중년 손님께 사과까지 시켰다 치자, 그 다음엔 어쩔 거냐? 다시 길바닥으로 내쫓을 것도 아니고."
라며 이후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고려했다.
"같이 살게 해 주십시오. 시아한테 드는 돈은 전부 제 월급에서 빼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 곳에 살게 해달라는 부탁 이후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부탁이라니.
시운은 스스로도 파렴치하다고 생각했다.
"의외네요? 처음 보는 애를 그렇게까지 신경쓰고."
"저도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습니다."
"응? 무슨 말이에요? 그 애한테 빚이라도 졌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인데요?"
"..."
민채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시운을 본 우목이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됐다. 무슨 말인지는 나중에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그새 식구가 또 늘겠네."
"어? 시아도 같이 살게 해주는 거예요?"
부탁은 시운이 했으나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민채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시운이가 저렇게 부탁하는데 별 수 있나. 대신 조건이 있다."
시운과 민채가 동시에 물었다.
"뭡니까?"
"뭔데요?"
우목이 말한 조건은 별다른 건 아니었다.
시운을 받아줄 때와 마찬가지로, 시아도 함께 사는 대신 가게의 일을 돕는다.
물론 월급은 준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지금까지 도둑질을 했던 모든 가게에 빚을 갚는다.
얼마나 걸리든, 꼭 전부 갚는다.
이 두 가지가 그 조건이었다.
우목의 조건을 들은 민채가 볼멘소리로 투정했다.
"에이, 그게 뭐예요. 지금 이 조그만 애한테 일을 시키겠다고?"
"그럼 네 돈으로 키우고 빚도 네가 갚든가."
"그럼 월급을 올려주든가."
"갓난아기도 아니고, 그 애가 가게에 도움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뭐 힘든 일 시키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그럼. 좋네. 그쵸, 시운 씨?"
시운은 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얼굴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 우목에게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무슨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참."
"...감사합니다."
"농담이다, 임마. 집에 애 있으면 분위기도 밝아지고 좋지, 뭐."
민채가 옆에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예쁜 여동생이 생겨서 좋네요, 전."
시운은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 뒤 허리를 폈다.
'이렇게 갚을 빚이 또 늘었습니다, 두 분께는.'
시운은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전과는 확연히 다른 미소였다.
저도 모르게 지었던 찰나의 미소와는 다른, 미소를 인지한 후에도 짧게나마 유지한, 본인의 의지가 담긴 미소였다.
"오늘 쉰다며. 애 보러 안 가냐? 길바닥에 혼자 두고 왔다며."
"애 보러... 무슨 아빠같네. 오빤가?"
우목과 민채가 주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시운을 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시운은 조용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입구로 걸어갔다.
잠시 후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시운은 두 사람을 보며 힘차게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