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4)
기말고사 주간이 됐다.
시험이 끝나면 방학인가.
놀 생각에 벌써 신나는군.
나야 시험에서 F만 안 받으면 돼서 랩실에 계속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시험 기간인데 왜 왔어?”
“교수님이 보고서 제출하래요.”
나 때문이군.
뒷자리에 앉아있던 3학년이 외쳤다.
“끼요오오옷! 연말 퍼리제한다!”
미국에서 열리는 인기 있는 퍼리를 초청해서 상을 주는 시상식, 연말 퍼리제.
당연히 올해부터 시작된 행사다.
인기 있다는 건 털을 잘 팔았다는 소리 아닌가?
온리펄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상을 쓸어가서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어차피 시간도 많겠다 태블릿으로 연말 퍼리제를 보는 걸 같이 봤는데 미남미녀에 몸매도 좋고 잘 팔릴 것 같은 털의 색감과 부드러운 털감을 지닌 퍼리들이 가득했다.
퍼리만 잔뜩 모여있으니 수상할 정도로 수상하군.
“넌 무슨 퍼리가 제일 좋아?”
“흠흠. 여기서 말하긴 좀 부끄럽네요.”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퍼리 하나를 가리켰는데 주황빛 털에 손과 발만 까만 털이 있는 여우 눈나를 가리켰다.
“···.”
여기서 이걸 보고 있는데 더 부끄러울 게 있는 거냐!
“무료로 먹을 수 있는 온리펄스 계정 알려드릴까요?”
“아니.”
수상한 놈들은 어떤 사고 회로를 가졌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세최털
—제목 : 이 모든 영광을 레스타이거에게 돌립니다.
(사슴 퍼리의 감사인사.mp4)
기습 숭배
기습 찬양
넌 구독이다
└후원 존나 박아
└돈구멍 터질 준비해 사슴
└감히 갤주님을 찬양해? 넌 오늘부터 명예 털갤러다
—나는야레스타이거
—제목 : 레스타이거 왜 안 나옴?
(잠자는 레스타이거.gif)
이제 제발 정체를 드러내 주세요
└제발 팬 미팅 한 번만
└말랑말랑하고 거대한 육구를 가진 퍼리는 너무 적단 말이에요
└현기증 날 것 같아 육구 만지고 싶어
└혀로 핥아서 영역표시 해줬으면 좋겠다
└침대에서 프레스를 왘ㅋㅋㅋㅋ
└넓은 품에 안겨서 잠들면 후욱 후욱
—ㅇㅇ
—제목 : 퍼리 모아두니까 먹기 좋네
(퍼리들이 앉아있는 좌석.jpg)
오늘 반찬은 너다!
└다들 맨발인 거 뭐냐고 ㅋㅋㅋ
└분홍 발바닥 발견♥
└헤으응 너무 야해요
└퍼리만 모아놓은 펄즈니의 역작 펄토피아가 생각나네요
└ㅋㅋㅋㅋㅋ 자리 배치도 펄토피아 참고한 듯?
└퍼리만 보고 있으니까 나도 퍼리인 줄 알았는데 인간이라 깜짝 놀람
└인지부조화가 이런 거구나 ㄷㄷ
—와스타이거
—제목 : 본인 여기 있음
(좌석 맨 끝.jpg)
하꼬라 카메라에 가끔 잡힘 ㅎㅎ
└출세했네
└와스타이거) 출세 기념으로 1:1 사이즈 등신대 제작할 거임
└얼마죠?
└와스타이거) 추첨으로 나눠줄 거야 미친놈들아
└하 꼴알못
└계정 오천 개 만들러 간다
└이게 진짜 광기지
—MIKA
—제목 : 다음 연말 퍼리제에 추가했으면 하는 거 있음?
(연말 퍼리제 드론 뷰.jpg)
말만 해
└가면무도회 열었으면 좋겠음 퍼리끼리 춤추기? ㅗㅜㅑㅗㅜㅑㅗㅜㅑㅗㅜㅑ
└단체 수영
└콘돔 주고 방문 잠그기 섹못방 졸잼일 듯
└여자 북극곰끼리 방에 넣고 방 탈출하는 거임 탈출 못 하면 북극이 녹아버려서 세계가 멸망하는 거지
└초식 퍼리 사이에 육식 퍼리 넣어두고 잘 지내나 관찰하면 좋을 듯
└이게 진짜 헝거 게임이지
└퍼리 올림픽
└푯값 천만 원 넘을 듯
└ㅋㅋㅋㅋㅋ 그쯤 되면 추첨 돌려야겠는데
“헤으응··· 왜 내 주변엔 퍼리가 없지?”
“네가 어디 있는지 생각해 봐.”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곳이 삭막한 랩실이란 걸 깨달았다.
“졸업해서 꼭 태양 길드에 들어가고 말겠어요.”
왜 태양 길드엔 기인이사만 모이는 걸까.
···
눈 내리는 연말.
세제 공장이 가동됐다.
인건비만 월 4억 원.
초창기라서 물류비용과 영업비용까지 나가는 탓에 돈이 살살 녹는다.
“세제의 성능 검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가동이 늦어졌습니다.”
“상관없어요. 흑자 전환은 언제쯤 될 거 같아요?”
“3달 뒤로 보고 있습니다.”
“고생해 줘요.”
돈 들어가는 건 상관없지만 제품이 안 팔리면 아쉬울 것 같다.
성능은 진짜 좋고 친환경의 끝판왕인데.
“사장님, 지인에게 제품 홍보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
“어렵지 않죠. 쓰고나서 펄스타그램에 후기 올려달라고 할까요?”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한 번 써보고 효과가 좋으면 계속 쓸 테니까요.”
맞는 말이군.
하지만 지금은 기말고사가 끝난 방학이라 나눠줄 사람이라곤 대학원생이랑 교수밖에 없다.
“얼굴에 철판 깔고 태양 길드에 영업하러 가야지.”
근데 연말이라 별로 없을 거 아니야.
몰라, 공짜 세제인데 아무나 주면 좋아하겠지.
태양 길드 사옥 곳곳을 돌아다니며 세제를 주고 다녔다.
“용박 씨, 신상품 세제에요. 하나 받아요.”
“끼아앙~ 고마워요.”
“인호 씨, 내 공장에서 나온 세제.”
“이제야 제품이 나오는군요. 감사합니다.”
“부길마님? 세제 좋아하시죠? 좋아하셔야 할 겁니다.”
“무. 물론입니다.”
솔직히 세제 한 봉지에 20만 원이면 누가 살까 싶다.
2만 원짜리 세제로도 잘 살아왔는데 친환경에 꽂혀서 18만 원을 더 쓸 사람이 과연 많을까?
물론 내 세제는 마법으로 만든 거라 기존 세제보다 더 잘 풀리고 세정력이 좋지만, 가성비가 심하게 안 좋다.
나라가 개판인 상황까지 가서 수도관이 오염된 게 아니면 절대 안 팔릴 세제가 이 세제니까.
내가 세제 100개를 영업용으로 줘서 벌써 2,000만 원의 매출이 사라졌다.
근데 국현 씨는 오히려 좋다고 세제를 마음껏 가져가서 나눠주라고 한다.
우리가 파는 세제는 너무 비싸서 선물용으로 사거나 돈 많은 헌터가 구매층이라는데 내가 나눠주는 사람은 다 헌터라서 적합하다나.
그래서 세제 2,000개가 집에 쌓였다.
무려 매출 4억 원어치가 내 집에 있는 것!
“몰라~ 국현 씨가 나눠주라고 했어~”
한국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니까 방법이 있는 거겠지~
—ㅇㅇ
—제목 : 털파랑의 퓨어 소프? 이거 뭐냐?
(박스에 담긴 세제.jpg)
엄마가 어디서 가져왔는데 핏자국까지 지워주는데?
└퓨어(정화 마법) 소프(향기 마법)
└아 이거 아티팩트였음?
└그래서 1회 사용량만큼 개별포장 되어있잖아
└세탁기에 넣으면 세탁 통까지 같이 청소해 준다는 그 세제 ㅋㅋ
└그거랑 제품군은 같은데 다른 브랜드임
└털파랑? 이거 처음 보는 브랜드인데 뭐냐?
└외국 브랜드겠지
—ㅇㅇ
—제목 : 털파랑 퓨어 소프 좋은데?
(옷 비포 애프터.jpg)
남는 옷 아는 사람 주기 전에 세탁기 돌렸는데 왜 새 옷이 됨?
└5년은 더 입어도 되겠는데 ㄷㄷㄷ
└걸레가 왜 수건이 되냐고 ㄷㄷ
└이게 아티팩트 세제의 힘?
└ㅇㅇ) 영상으로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왜 쓰는지 알 것 같다
└ㄹㅇ
—ㅇㅇ
—제목 : 털파랑 <- 이거 한국 기업인데?
(홈페이지 맨 밑 소재지.jpg)
대전에 위치함
└여기 김민수가 지은 공장임
└시발 세상에 김민수가 혼자냐?
└펄달프상 수상 예정자 김민수
└?
└진짜라고..
└진짜 맞음 태양 길드 와서 홍보용으로 하나씩 주고 감
└난 못 받았는데?
└그때 사옥에 없었던 거임
└아 진짜네
—용박이
—제목 : 선배님이 세제 주고 갔어요
(털파랑의 퓨어 소프 박스.jpg)
몬스터 피 묻을 때마다 세탁소에 맡겼는데 이제 집에서 빨 수 있어요
└세탁소 오열
└정보 세탁소가 이미 쓰던 제품군이다
└수입품보다 더 싸서 싱글벙글 웃고 있을걸?
└ㄹㅇㅋㅋ
└근데 이걸 왜 씀? 너무 비싼데 세탁소에 맡기지
└헌터는 옷이 오염되는 일 많아서 쓸만할걸?
└세탁소에 맡기고 가져가는 것도 일이야
└빨래는 자동으로 되냐?
└가정부가 해주잖아
└ㅇㅎ 가정부가 있지
—음탕한꼬리로나를
—제목 : 퓨어 소프 이거 쓸만하네
(깨끗해진 욕실.jpg)
물에 풀어서 청소하니까 락스 냄새 안 맡아도 되고 좋다
락스는 하수구에 붓고 조금 있다가 물 부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님도 태양 길드였음?
└음탕한꼬리로나를) ㄴㄴ 지인이 받았다길래 2피스 받아옴
└님 그거 세탁기에 넣으면 통 청소 한방임
└덤으로 하수구도 같이 뚫리자너 ㅋㅋ
└음탕한꼬리로나를) 바로 하러 간다 세탁기 다 뒤졌다
—퍼리조아퍼리최고
—제목 : 이거 마법으로 만든 세제라 무독성임
설거지하는 데 써도 되고 샴푸나 바디워시 대용으로도 가능함
퍼리 씻겨줄 때도 쌉가능
└몸에 쓰면 유분까지 다 씻겨서 하지 말라던데
└먹어도 되지만 먹지 말라는 물과 같음
└몸에 묻으면 안 되는 거 묻었을 때 이상한 화학물질 붓는 것보다 이게 더 낫다
└집에 하나 쟁여둘까?
└20만 원짜리 세제를 산다고? 미쳤어?
└샴푸, 비누, 바디워시, 치약, 주방세제, 락스 역할을 하는데 하나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
└ㅋㅋㅋㅋㅋ 이렇게 말하니까 있어서 나쁠 건 없긴 해 양도 많고
—늒네
—제목 : 퓨어 소프? 흠
(퓨어 소프 제품군.jpg)
직수입보다 30% 싸다!
출시가 올리기 전에 쟁여!
└이건 대체제가 없다고!
└바로 위에 있잖아
└20만 원에 이 성능? 가져와
└무려 펄달프상 수상자가 만드는 세제다
└펄달프상이랑 세제랑 알빠노인데 믿음직해 ㅋㅋㅋㅋㅋ
—ㅇㅇ
—제목 : 왜 세제 때문에 호들갑임?
걍 개비싼 세제고 돈값 하는 건데 왜 난리지?
└요즘 감성 이해 못 하겠다
└저거 사면 헌 옷을 새 옷으로 바꿔줌
└러시아냐? 뭐든 공산화되게?
└세제 못 사서 부들대는 버러지 컷
└ㅇㅇ) 나 전문직이다
└전문직(백수)
└ㅋㅋㅋㅋㅋ
└ㅋㅋㅋㅋ
└20만 원에 퓨어 소프 제품군을 쓸 수 있으면 무조건 써야지 병신이야? 왜 안 사?
—ㅇㅇ
—제목 : 세제 가지고 호들갑 떠는 이유는 간단함
(깨끗한데 헐어버린 이불.jpg)
20년 쓴 이불도 새것처럼 만들어 주기 때문이지
└씹 20년이면 갖다 버려라
└ㅇㅇ) 애착 이불임 없으면 잠 못 잠
└이건 패션 브랜드 신상 같은 느낌인데
└빈티지 감성이··· 있어!
“국현 씨, 2,200개나 줬는데 이래도 되는 거 맞아요?”
“다 쓰기 전까진 사지 않겠지만 홍보는 톡톡히 됐습니다. 대형마트인 홈마이너스에서 납품 계약 왔습니다.”
“홈마이너스!”
하이스트 근처에 있는 엄청나게 큰 마트로 그곳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모든 시설이 집중된 마트다.
전국에 지점이 있어서 내 세제가 납품된다면 매출이 안 나와서 전전긍긍할 일은 없어질 거야.
“세탁업체와 공급 계약을 맺을 건데 그것까지 된다면 적자는 안 날 겁니다. 물량이 확보되면 수출도 고려할 건데 이건 3개월 뒤에 진행하겠습니다.”
“왜 3개월 뒤에요?”
“국가별 성분 검사도 있고 지점도 세워야 하고 판매점도 알아봐야 하고 물량도 확보해 놔야 해서 그렇습니다.”
무섭다.
이게 한국대 수석 졸업생의 능력인가?
앞으로 하라는 거 잘해야지.
***
이제일은 보고서를 읽었다.
‘김민수··· 세제 공장을 세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겨우 세제 따위로 돌풍을 일으킬 줄이야.’
집에서 쓰는 고급 세제와 같은 제품군을 만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만 먹히는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인기와 기세는 한국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근본적으로 다른 세제와 크게 달랐으니까.
“왜 이리 싸지? 우리나라는 인건비가 비싸서 이 정도로 싸지 못할 텐데.”
“김민수가 마법을 부여하는 아티팩트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만든 거라면 효율이 높아서 그럴만하지.”
고효율 아티팩트만으로 기존 대기업까지 꺾을 성장 가능성을 보유하게 될 줄이야.
‘아티팩트는 미래다. 고효율로만 만들어도 경쟁에서 이길 수 있어.’
“우리도 소모성 아티팩트를 만들어 볼까?”
“지시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야. 이게 돈이 될까?”
“저희 수준의 개발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진행시켜. 세제 분야는 건드리지 말고. 괜히 밉보이면 큰일 나.”
옛날이었다면 길드에서 공장을 세운 뒤 공산품을 만들면 좆소 길드 소리를 들었겠지만, 이젠 아니다.
대공황은 끝났다지만 여파는 남아있고 길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은 아티팩트로 큰 수입을 올리지만 수많은 나라가 비전투 계열 각성자를 모아서 아티팩트 양산을 시작했는데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법.
살길은 미리미리 만들어둬야 했다.
···
“시제품입니다.”
마법으로 만든 초고밀도 에너지바.
평범한 초코바 같지만, 무게만 1kg에 달해서 어지간한 사람은 입에 넣고 씹는 것조차 힘든 음식이다.
으적 으적 으적 으적
‘씹기 힘들지만, 맛있다.’
“잘 팔릴까?”
“수요는 충분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단순히 칼로리만 높은 게 아닌 탄단지가 골고루 들어간 데다가 영양제까지 갈아 넣은 슈퍼푸드다.
헌터뿐만 아니라 재난 물자로도 훌륭해서 초콜릿 비스킷을 쟁여두는 것보다 열량이나 영양적으로나 나은 제품.
분명 수요는 충분하다.
‘문제는 초코바 하나에 5만 원이나 한다는 거지.’
비싸지만 만들 가치는 있다.
중요한 건 고정 수요층이 있다는 거니까.
으적 으적 으적 으적
‘김민수는 해냈다. 마법의 효율만으로 인건비나 지리적 위치나 상관없이 가성비를 만들어 냈어. 이거 하나에 5만 원이면 부피를 생각했을 때 싼 게 맞아.’
“양산은?”
“공장을 세우는 데 3개월은 걸립니다. 아무래도 겨울이고 하이스트 쪽에 각성자 건설사가 몰려서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도 바빠, 적당해. 초고밀도 컵라면은 개발됐나?”
“아직 연구 중입니다. 면을 익히는데 들어가는 물이 너무 많은 게 애로 사항입니다.”
세상은 앞으로 더 많이 바뀔 것이다.
대기업은 신형 아티팩트로 무장한 새로운 기업에 무너지고 사람들의 삶은 달라질 테니까.
다가오는 새로운 해의 시작.
“잘 됐으면 좋겠군.”
제일 길드가 어떻게 변할지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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