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지평선(cosmic horizon)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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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캇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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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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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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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12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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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DUMMY

우리가 충분히 놀랄 여지도 주지 않고 토드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 하베스터는 평소엔 무척 유순한 동물입니다. 지구로 치면 흔히 고래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 말이 정확하다고 여겨집니다. 그 정도로 환경 친화적이고 가족을 돌보며 서로 아낄 줄 아는 아주 영특한 생명체죠. 일례를 들자면 크렐 성인들은 성계의 구름층에서 살던 하베스터가 항법장치 고장으로 주변을 헤매던 동족의 우주선을 제대로 된 항로까지 끌어다 준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래서 초반의 졸전에는 저네들과 평화로운 대화가 통할 거라 지레짐작한 탓도 좀 있었죠. 하지만 리퍼에게 지령이 내려오면 그 때부터는 180도로 돌변합니다. 그보다 사납고 포악한 생명체는 이 우주에 둘도 없습니다. 감히 상상이나 가십니까? 우주정거장의 초중합금 장갑을 아무 어려움 없이 꿰뚫고 지표면을 따라서 저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거구가 대기층을 헤엄치며 사람들을 잡아먹고 건물을 깔아뭉개며 해로운 방사능을 뿜어내는 전율스런 장면을? ”

그때 나는 별로 중요치 않은 의구심을 품고 토드에게 물었다.

“ 넌 그때 만들어지지 않았잖나? 그런데 마치 직접 겪은 것처럼 말하는군. ”

“ 주인인 크렐 인들의 기억은 전부 제게로 전해져 있습니다. 그 분들은 문명의 발달과 우주 생활의 연장으로 인해 인식의 확장을 통한 사고의 교류에 익숙한 고등생명체였죠. 그러한 기억과 지식은 전부 저장되어 제게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크렐 문명의 유일한 전승자라 할 수 있죠. 사실 그걸 부정할 사람도 없구요. ”

“ 네가 잘난 건 인정하지만 우리는 저 괴물들이 언제쯤 본색을 드러내는지를 알고 싶은 거야. ”

그러자 잠시 네모난 머리를 갸웃대던 토드가 말했다.

“ 이런. 뭔가 정보가 잘못 전달됐군요. 중간에 누락된 게 있어요. 크렐인 특유의 인식의 확장교류에 익숙한데다 너무 오래 혼자 있다 보니 제 생각을 남도 당연히 알겠느니 하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우선 사과드립니다. ”

“ 미안한데 아까부터 언급되는 인식의 확장이란 게 대체 뭐지? ”

내 물음에 토드의 붉은 눈이 빛났다. 이 로봇은 설명을 무척 좋아하는 체질인 모양이었다.

“ 인식의 확장이란 크렐인들이 발견한 각 개체별 사고(思考)의 확장 연결 및 지식의 상호 공유를 위한 범 행성권역을 아우르는 대규모 인식력 네트워크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터넷 네트워크를 생명체에 적용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죠? ”

나는 그를 밉살스럽게 바라봤다.

“ 전혀 간단하지 않아. 각 개체별로 사고가 개방 연결된다는 것은 곧 개인의 비밀이 전혀 없다는 뜻이잖나. 크렐인들은 사생활이란 개념이 없었나보군. ”

“ 숨길 게 없으니까요. 구질구질한 비밀이 많은 인간과는 달리 크렐 인들은 집단적 지성에 의해 행동이 좌우되었습니다. 하나의 절대적인 지능의 독재체제가 아니라 각 공동체의 의견을 충분히 조율하고 그것을 모아 모든 것이 결정되었죠. 이 성계의 거주민들이 아직 감을 못 잡고 있는 민주주의의 최종완성판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

그의 자세한 설명에도 의심에 찬 못마땅한 눈길은 거둬지지 않았다.

“ 그건 그렇고 인간에 대해 상당히 많은 걸 알고 있군. 혹시 너 말야. 저 밖의 불쌍한 동물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게 아냐? 정작 너는 입담 좋은 외계 스파이고. 내가 볼 때 그게 더 설득력이 있겠어. ”

“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양해를 구한 토드는 다시 들어온 통로로 나갔다가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들고 와서 내 앞에 놓았다.

“ 따뜻할 때 드시죠. ”

곧바로 등을 돌린 토드의 뒤통수에 나는 손을 턱 얹었다.

“ 잠깐만. 좀 전의 대화는 깡그리 무시하는 거야? 나는 꽤 심각하게 물은 건데. ”

그러자 타이밍 좋게 몸통을 회전시킨 토드는 양쪽 집게 팔을 들고 어이가 없다는 포즈와 뉘앙스로 말했다.

“ 그거 농담 아니었나요? 이쪽 성계의 유머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여겼는데 제 착각이었나 보군요. ”

무시하는 말투에 화가 난 나는 토드의 붉은 눈에 바짝 얼굴을 들이민 채로 협박조로 말했다.

“ 내 질문에 얌전히 대답이나 하시지. 이 버릇없는 깡통아. ”

“ 흠. 일절 대답할 가치가 없는 의심은 일단 무시하기로 하고 제가 어째서 지구권 정보에 이리도 빠삭한지 말씀드리죠. ”

“ 빠삭? 로봇 주제에 비속어까지 쓰는군. ”

내 말에 토드는 갑자기 작위적인 웃음소릴 냈다.

“ 하핫. 크렐인들이 20만 광년의 긴 여정을 거쳐 이 성계 근처에 도달했을 때는 인류가 각지에서 피라밋을 비롯한 지구라트를 쌓던 중이었죠. 그리고 천 년이 지나 하베스터가 뒤쫓아 와서 주인님들을 몰살시켰을 때는 기원전 약 3,000년경이었답니다. 혼자 남은 저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지구권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 행태를 관찰해왔죠. 로마 제국과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싸움을 좋아하는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는 광경을 야만스럽게 바라보면서요. 용케 공멸하지 않고 버티는 걸 보면서 감탄도 꽤나 여러 번 했었죠. 그리고 인간이 라디오를 발명하고 TV를 발명하고 마침내 인공위성을 쏘아대면서 흐릿해지던 관심도 되살아났답니다. 사실 이전에 해오던 연구가 지지부진한데다 무척 심심했었거든요. 그렇게 애정을 갖고 살펴보면서 이 곳에 우연찮게 흘러든 인류의 탐사선도 몇 개 주웠죠. 그 안에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의 유전자 지도까지 들어 있더군요. 저는 그걸 재현해서 지금 당신들께 대접하는 중이구요. ”

“ 그래서 징그럽게 오래 산 골동품 로봇 나리. 지금 노익장에 존경이라도 표해 달라는 뜻인가? ”

“ 설마요. 그럴 지도요. ”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 뭐야. 어중간하게 굴지 말고 확실하게 가부를 말해. ”

“ 일단 얼굴부터 좀 치워주실래요. 전 눈이 의외로 좋아서 당신 눈썹에 뿌리를 박고 기생하는 기생충까지 관찰할 수 있거든요. 이계의 미시적 원시생물을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접하는 건 저로선 상당히 괴롭답니다. ”

졸지에 기생충 모판 취급을 당한 나는 발광 직전까지 화가 나서 그에게 앉았던 의자를 집어던졌다.

“ 뭐라고. 사람을 대체 지금 뭘로 보는 거야. ”

토드는 가볍게 의자를 피한 다음 침착하게 답변했다.

“ 난폭한 외계인이요.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화해의 포옹을 거쳐 잠시 진정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차 한 잔을 마셨다. 과거 커피 유전자 지도까지 실어서 우주로 띄워보낸 과학자 일동에게 감사했다. 물론 그 동안에도 토드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나는 잠시 그의 말을 가로막고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

“ 그보다 크렐 인들이 20만 광년의 거리를 항해해 왔다고 했는데 이 은하계는 기껏해야 10만 광년에 불과해. 그렇다면 너희는 대체 어디서 온 거지? ”

“ 인간 기준으로 이 곳 은하계의 위성은하로 불리는 마젤란은하입니다. 거긴 이미 쑥대밭이 된 지 오래라서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요. 물론 이 곳이라고 해서 무사한 건 아니었습니다. 리퍼의 침략이 한창 진행 중이었으니까요. ”

나는 깍지 낀 손을 풀고 수염이 돋기 시작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 그렇다면 리퍼는 다른 은하계로부터 왔단 뜻이로군. 맞나? ”

“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이 은하계의 북쪽 방향에서 왔다고 판단됩니다. 이는 그들의 침략이 마치 물이 흘러내린 것처럼 계측됐기에 알게 된 내용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쪽 은하계에 떨어지지 않고 우리 마젤란은하에 직격해서 문제였죠. 그들의 침입은 마치 하나의 물방울이 일으킨 파문처럼 순식간에 마젤란은하 전체로 파급됐습니다. 정말 무서운 속도였죠. ”

“ 정확히 얼마나 소요됐지? ”

“ 도주 과정에서 주인님들이 수집했던 정보를 기반으로 통계를 반복해서 분석한 결과 약 십 오만 년에 걸친 침략이라 추정됩니다. 백 년 남짓의 수명을 지닌 생명체에겐 정말 까마득히 길고 긴 시간이지만 우주 시간대에선 찰나나 다름없죠. 마젤란은하에 속하던 수억 개의 별세계가 그들 리퍼에게 잡아먹혔습니다. 그리고 황폐화됐죠. 그들은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시야를 이쪽 은하계로 돌려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엄청나게 빨랐죠. 심지어 마젤란은하에서 곧바로 도망쳐 온 우리 크렐인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으니까요. ”

동생들과 함께 레비아탄의 등에 매달려 속도를 체감한 바가 있던 나로선 쉽게 이해가 갔다.

“ 우린 하베스터를 레비아탄이라 부르지. 저들 체내에 초광속을 가능케 하는 물질이 있다는 걸 알고 벌써부터 채취를 하고 있어. 나 또한 그 작업을 거드는 인부 중의 한 사람일 뿐이고. ”

“ 당신께 우리 크렐 주인님들이 하베스터의 추격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사정이 약간 다릅니다. 사실 우린 하베스터가 먼저 점찍은 이쪽 행성계에 멋도 모르고 접근하다가 들킨 것에 불과하죠. 앞서의 발언은 멸망당한 전 주인님의 명예를 위해 약간 가공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

나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 착한 로봇이로군. 그래서 우리가 들어야 할 얘기는 이제 끝인가? ”

“ 아뇨. 이제 본론입니다. ”

나는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마냥 남의 일이던 동생들이 부러웠다. 괜히 귀를 기울였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식곤증에 시달리던 맥스웰과 윌은 탁자에 엎드린 채로 깊숙이 잠들었다. 모처럼 배불리 먹은 나도 잠이 와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간만에 말이 통하는 상대를 찾은 토드는 대화를 좀처럼 멈추려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하품을 해가며 그의 말을 계속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토드의 말에 관심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는데 한낱 인간. 개중에 초라한 죄수 신분의 개인이 대처하기엔 정말 터무니없을 정도로 스케일이 컸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지구 표면에 붙박혀 살던 시대에 공룡을 멸종시켰다는 거대 운석의 공포에 떨던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나중엔 익숙해지면서 아예 무감각해지고 마는 것이기에.

어차피 내가 뚜렷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래서일 수도 있었다. 물론 인류를 위한 전령노릇은 해야겠지만 과연 몇 명이나 믿어줄지. 음모론에 해박한 ‘제레미’나 귀를 기울이겠지. 다른 사람들은 우주미아가 됐던 죄수가 광막한 우주의 공포에 짓눌린 나머지 미쳐서 돌아왔다고 여길 테고.

여기 말 잘하는 토드를 대동해도 코미디 프로에나 출현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긴 따져보면 너무 잘 믿어줘도 문제였다. 공황에 휘말린 인류가 막나가는 식으로 어떤 흉악한 짓을 벌일지 벌써부터 머리가 따끈따끈해졌으니까. 아. 지끈지끈이었나?

나는 찻잔을 비우며 너머로 토드를 슬쩍 넘겨다보았다. 벌써부터 저 녀석의 수다가 귀찮아졌다. 하지만 혹시라도 저 로봇이 숨겨놨을 우주선을 빌려서 기지로 복귀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자. 그럼 이제 본론을 들어보도록 하지. 외계인 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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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새로 생긴 형제 +5 15.10.01 2,311 79 15쪽
11 루돌프 대령 +9 15.09.30 2,314 63 16쪽
10 사냥꾼 +6 15.09.28 2,394 66 12쪽
9 레비아탄 +6 15.09.26 2,961 69 10쪽
8 낭만의 달, 광기의 달 +3 15.09.25 2,515 67 11쪽
7 함정 +4 15.09.24 2,826 73 12쪽
6 교전 +1 15.09.23 2,746 68 8쪽
5 우주요새 바실리스크 +1 15.09.22 3,539 7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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