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도 못 한 나비효과.(2)
[야]
[이 개자식아]
[너 왜 안 와]
큰일났다, 사빈은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차 위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여기 선생들 지금 온갖 거 다 파쇄하고 뽀개고 난리라고 지금]
명인의 텔레파시를 들으며 사빈의 당황스러움은 더욱 더 심화되는 중이었다.
'아니, 그보다 너 장거리에서 텔레파시 할 수 있었...'
[말 돌리지 마라.]
크윽, 사빈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나도 오늘 내가 결석할 줄 몰랐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아수라장이 된 새벽하늘 어린이집을 지켜보며 교사들이 자신에게 회유든 협박이든 증거조작 비슷한 걸 시도하는 순간 녹음을 해두는 거였는데...
'나라고 안하고 싶었겠냐고.'
자고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 세 개가 불구경 싸움구경 막장 구경인 것을! 사빈은 아쉬움에 자신의 카시트를 주먹으로 콩 콩 쳤다.
[안 나온 놈이 말이 많아.]
물론 예주와 현빈이 일부러 사빈에게 오늘 일정을 전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냥 너무 어리니까.
일반적인 아이였다면 어린이집 등원에 적응해 가고 있을 시기에 '오늘은 거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간다'를 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러니 별다른 해프닝 없이 넘어가기 위해 당일 아침에 전달했을 뿐이지만...
하필이면 진짜 국지적 해프닝이 당장 오늘 새벽하늘 어린이집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헐 야]
'왜?'
[지금 기자 왔다.]
'벌써?!'
한국인들의 정보력을 얕본 사빈은 그렇게 어린이집에서 점점 멀어져 광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
오늘 사빈이 촬영하게 될 광고의 주제는 블루 홀 레스토랑의 봄 에디션이다.
하아, 사빈은 자신에게 묶여진 산뜻한 하늘색과 분홍색이 뒤섞인 스카프를 자꾸 만지작대고 있었다.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데 여기에 집중도 해야되고, 미치겠네.'
명인과의 텔레파시는 가능하다지만 그가 그렇게 설명을 친절하게 해주는 편도 아니고, 보호자인 현빈이나 예주한테 어린이집 측에서 전화라도 오면 좋으련만.
—두 분 혹시 핸드폰 꺼 주실 수 있을까요?
—아아, 네!
광고 세트장은 봄 인테리어를 끝낸 블루 홀에서 그대로 찍었는데,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는 원래 레스토랑이 영업을 하지 않는 시기다. 한마디로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행여나 외부인이 매장 사진을 찍을 가능성을 차단한 거다.
덕분에 새벽하늘 어린이집 원장과 교사들만 애가 타고 있을거다. 덤으로 사빈도.
"앗! 사빈아, 스카프 건들면 안 돼!"
블루 홀 측에서 정기적으로 외주를 맡기는 촬영 업체의 직원이 사빈을 제지했다. 원래라면 고정을 위해 옷 핀을 썼겠지만, 어린아이의 특성상 위험할 수가 있어 말 그대로 평범하게 입혀놓은 상태라서다.
사빈은 순순히 손을 떼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테이블 위에 앉아 기다렸고, 더 심란해졌다.
'식당 대기장면 하나, 미식가인 척 하는 장면 하나, 평론가인 척 하는 장면 하나, 셰프인 척 하는 장면 하나...에효, 찍을 것도 많군.'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어린이집에 있는 도중에 데려온 것도 아니고 하루를 통째로 결석한 거겠지, 사빈은 당연한 사실을 자꾸 되뇌였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겨난 맥락을 자꾸 상기하지 않으면 이상한 데다 화풀이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금은 '혼자 식당에 와 멋있게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는 아이' 촬영 준비 중이다.
힐끔, 사빈은 예주와 현빈이 있는 쪽을 설핏 쳐다봤다. 저 멀리서 잡담 중이다.
오랜만에 제페토119라도 불러볼까 했지만-지난번 상황은 단순 오류일 수도 있으니-전자기기들이 다 멀었다. 촬영에 들어가고 나면 전자기기들이야 가까이 있겠지만 연기를 해야되니 제페토119와 대화하기도 어렵고.
'결국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건가.'
그렇게 현실과 슬슬 타협하고 있을 즈음, 촬영업체 직원이 사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빈이 손님씬 촬영 들어갈게요~!"
누군가가 사빈의 자리를 카메라 바깥쪽의 아무 테이블에서 식당 정 중앙, 오픈키친 바로 앞의 1인용 테이블 석 앞으로 안아 옮겼다.
당연하게도 그 자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들이 둥글게 진을 치고 있는 채였다. 주방 안쪽에도 네 개인가 다섯 개인가 붙어있다.
"메뉴판 보고, 옳지. 턱 잡고 있다가 글자 가리키면서 이거, 이거 하면 되는거야. 할 수 있지?"
"네!"
이번 블루 홀 봄 시즌 광고의 전체적인 컨셉은 '어른의 행동을 대신 하는 아이'이다. 단순히 행동의 성숙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직접 주문하고, 요리하고, 음미하고, 평론하는 모습을 찍는 거다.
"자자, 카메라 킬게요~"
사빈은 자신의 주위에 몰려있다가 부지불식간에 카메라가 형성한 원 바깥으로 나가는 어른들을 보며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이 여기서 어린이집 일을 신경쓰고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으니, 눈 앞의 연기에 집중하자고.
그렇게 사빈은 셰프에게 주문을 하는 사람부터 요리사 특유의 높은 모자와 붉은 스카프를 쓴 채 프라이팬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기도 했고(불은 CG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비형랑 첫 촬영 때보다 더 격식적인 유러피안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봄 시즌 특별메뉴를 맛있게 먹었으며, 넥타이 프린팅이 된 흰 셔츠 위에 베이지색 멜빵을 걸친 모습으로 음식들을 보며 만년필을 들고 파일철 위에 평가목록이 정해진 종이를 하나하나 체크하기도 했다.
"컷! 좋아요~"
드디어 끝났구나! 내심 옷 갈아입는 걸 엄청나게 귀찮아 하고 있던 사빈은 마음속으로 환호하며 들고있던 만년필형 펜과 파일철을 아무 어른에게나 넘기고 곧장 오늘 입고왔던 옷을 개어 논 테이블을 향해 뛰었다.
'핸드폰, 핸드폰!'
마침 현빈이 그 옷 옆에 핸드폰을 둔 채로 블루 홀 직원과 촬영업체 직원들의 설명을 듣고 있던 터라, 옷을 갈아입는 척 제페토119와 대화하기엔 최적의 상황이었다.
드르륵.
사빈은 테이블과 같이 있던 의자를 하나 뺀 다음 그 위에 올라가고, 또 점프와 동시에 손을 테이블에 짚어 자력으로 테이블 판 위에 올라갔다.
'이 정도는 이제 쉽지.'
탁탁, 손에 묻은 먼지를 턴 사빈은 멜빵을 벗으면서 홈 버튼을 눌러 은근슬쩍 카메라를 켰다.
몇 명 이 쪽을 주시하고 있는 어른들은 있었으나 혹여 사빈이 다칠까봐, 아니면 그냥 귀여워서 였고, 실제 만 1세 아이도 현대 인터넷 중독의 폐해로 이 정도는 할 테니 들켜도 상관은 없었다. 대화야 어차피 텔레파시로 할 테니까.
'제페토119야, 답 해 봐라.'
명인의 정체를 안 뒤로, 그리고 저번에 이상한 컴퓨터 언어가 뜬 이후 잘 대화하지 않았지만, 사빈은 아무리 오래간만에 부른다 해도 제페토119가 대답할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갑을관계가 있다하면 갑이 제페토119이니 반응하지 않아봐야 손해는 그 쪽이 더 크니까.
그래서 반응이 오자마자 어린이집 상황에 대해 물어 볼, 생각이었는데...
'...뭐야?'
사빈은 일순 주변의 공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
온도가 내려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삭막했다. 그 어떤 생기도, 그러니까 동물적인 움직임도 시야에 들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시간이 멈췄나?'
주변의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방의 물방울, 혹은 실낱같은 먼지 한 조각까지도.
'...아니, 멈춘 건 아니야.'
시간이 정말 멈췄다면 온도 역시 사람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런 기색은 없다.
무엇보다 사빈 역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은 물론이고 내리고 있던 멜빵의 어깨끈도 팔에 걸쳐진 모습 그대로 마치 강철이라도 된 듯 고정되어 있었다.
'안구운동도 묘하게 느려.'
본래 인간의 눈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것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약 0.3초밖에 걸리지 않으니까.
다만, 눈은 느릿하게라도 움직인다. 사빈은 이 사실을 인지했고, 이 관측을 토대로 현재 상황에 대한 가설 하나를 세웠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어.'
그래, 이건 불가능하지 않았다. 인간의 육안으로 감지할 수도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 뿐이라면 지금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사빈은 자신의 독백과 같은 생각은 아주 멀쩡한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저 가설이 발생하게 된 맥락까지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내 사고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거지.'
자신이 체감하는 시간의 흐름이 0에 가까워질 정도로,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생각을 하고 있단 거다.
그렇다 해도 이상한 점은 있었으니, 체감 속도의 차이가 너무 과했다.
학문을 탐구하는 게 본업이던 사빈이니만큼 자신의 사고가 주변 시간을 늦추게 할 정도로 빨라지는 경우는 몇 번 겪어보긴 했지만, 끽해야 7분은 충분히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2분이 지나있던 정도지 이렇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무엇보다 난 지금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는 아니니까.'
상식적으로 실현되기 불가능한 수준이였으나, 그가 까먹지 않고 있던 사실 하나가 있다.
사빈의 뇌파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 둘 중 하나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제페토119.'
사빈은 다시 한 번 그것을 불렀다. 다만 그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더 진중하고 차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제페토119 역시 응답했다.
[예, 부르셨나요?]
화면에 글자를 띄움과 동시에 사빈의 머리 속에도 그것의 음성이 울렸다. 이전처럼 기계음이 섞인 소리는 아니었으나, 여러 목소리가 혼재된 양 겹쳐진 발성은 여전했다. 조금 더 깔끔해졌을 뿐이었다.
[저희 제페토119들은 언제나...]
치직, 화면에 뜬 글자들이 잠시 일그러졌다.
[선우사빈, 당신을...]
또다시, 일그러졌다.
[#우사ㅂㅣㄴ&, 당신@¿을...]
그렇게 마지막으로 일그러지고,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이 재배열된다.
[피노키오, 당신을 기다립니다.]
도저히 사빈의 것이 아니었으나, 아무리 봐도 사빈을 부르는 것이라고밖엔 생각되지 않는 이름 하나와 함께.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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