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다.(1)
그러니까, 동체시력이 좋은 사빈은 현빈보다 먼저 예주를 발견했고, '엄마!'라고 외쳐 부르기 위해 창문을 내렸을 뿐이다.
그렇게 창문 내려가는 지이잉—소리가 지나간 뒤에는, 살과 살이 빠르게 부딪칠 때 나는 소리가 차 안으로 선명하게 들어왔다.
짜악!
그러니까 뺨 때리는 소리가,
퍽!
아니 훅을 내지르는 소리가,
뚜둑!
아니 관절 나가는 소리가,
퍼억!
아니 발차기 소리가...
'뭐야?'
넋 놓고 폭력의 현장을 감상하고 있던 사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사빈아, 갑자기 창문은 왜 내렸어?"
와중에 현빈은 저 선명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운전석에 있는 버튼으로 사빈이 내렸던 창문을 다시 올리고 있었다.
"아빠, 저기 봐봐."
"어디?"
사빈의 지시에 현빈은 열려있던 창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역시나 누군가를 때리고 있는 예주를 발견했다.
"...아."
현빈 역시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예주의 여동생,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처제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저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한숨을 크게 내쉰 현빈은 결단을 내리고 차 문을 열었다.
"사빈아, 아빠가 엄마 데리고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
차 문을 닫기 전 현빈은 사빈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창문 내리지 말고, 누가 문 열어달라고 해도 열어주지 말고, 안전벨트 풀지 말고, 폰 놓고 갈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단축번호 1누르고."
"응."
솔직히 말해서 사빈은 '빨리 말리러 안 가고 뭐 하냐'는 심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듣지 않으면 현빈이 자꾸 잔소리 하느라 머물러 있을 것을 알기에 가만히 대답했다.
"예주야!"
이윽고 사빈은 현빈이 예주를 부르는 음성이 닫힌 차창 사이로 작게 새어들리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예주 저놈 무슨 유단자던데, 한국 법으로는 가중처벌이었다고.'
사빈은 민서 씨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예주가 모르는 사람과 실랑이 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두 부모는 운동에 관심이 많은건지, 옷장 안 에는 사이즈가 다른 다양한 도복들이 있었다. 태권도나 검도, 주짓수, 합기도 대회에 나가서 따 온 트로피들은 벽장 한구석 안 천으로 된 녹색 박스에 들어있기도 했고, 국기원 등에서 나눠주는 승급 증서를 모아놓은 파일이 책장에 육아 서적과 함께 꽂혀 있는 걸 봤었다.
그렇기에 민사문제로 번지지 않도록 빨리 말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건만...
'아이고, 저 사람 우는...응? 예주도 우네?'
뭔가 분위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사빈의 좋은 시력으로 보기에도 예주의 신체에는 아무런 흠집이 없었으니 분명 쌍방이 아니라 일방이었을 텐데도...
'저 사람이 엄청나게 잘못하기라도 한 건가?'
때린 사람이 아니라 맞은 사람이 계속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예주의 우는 모습 역시 슬픔이나 서러움이 아니라, 눈썹과 눈의 간격이 좁아지고 눈매가 날카로워진 채 있는 게 분노에서 비롯된, 단순히 눈물샘이 자극되서 나오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았다.
'쟤가 저렇게까지 화 낼 이유가 뭐가 있지?'
약 1.5년간 사빈이 예주와 현빈의 가족으로서 그 둘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굉장히 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현빈이 더 순했고 예주는 더 부드러웠다.
현빈은 종종 사빈이 너무 늦게까지 잠에 들기 싫거나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성을 내고 하면 상당히 낮고 짧은, 고압적인 말투로 주의를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체로 정도가 심하지만 않다면 사빈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려는 경향이 강했다.
예주는 조금 다르게 말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처음부터 가르치려 하는 태도가 보였다.
그 정도의 차이를 빼면 두 사람 모두 삼십 대 초반의 나이 치고는 천진하다거나, 혹은 어리숙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랑말랑한 성격이었는데...
똑똑.
사빈이 예주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긴장하고 있을 때, 건너편 창문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사빈은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떨어진 소리일려나, 생각하고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지만, 그곳에는...
'헉.'
사람이 있었다.
모습은 7~80대 정도로 보였는데, 머리는 백발이 떡이 진 채 대충 넘겨져 있고 얼굴에는 노인 치고도 이상할 정도로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했다. 크게 부릅 뜨고 있는 눈은 누렇고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어 꼭 수정체가 고름덩어리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입 주변에는 방금 뭘 먹고 온 건지 양념장 같은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할머니들 특유의 뻣뻣하고 얇은 흰 수염 몇 가닥이 나 있었다.
한마디로 공포영화, 혹은 공포게임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만큼 징그럽게 생긴 노년의 여성이 창문에 손을 짚고 얼굴을 묻은 채, 사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징, 징그러워!'
사빈은 너무 놀라 안전벨트가 아니었다면 의자 밑으로 자빠질 뻔했다.
'아니, 저 사람 뭐야? 순간 내가 공포영화라도 찍는 건 둘 알았네!'
사빈은 계속해서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가슴께에 누르고 있었는데, 그러자 창문 너머의 무서운 노파는 씨익 웃었다. 누런 이빨에 금니가 인상적이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도 적응이 되고—아무래도 사빈은 산전수전을 몇십 번이고 겪었으니—슬슬 보고만 있기에도 부담스럽고 무시하자니 독보적이라서 어찌 할 방도를 오르고 있을 즈음, 저쪽에서 예주와 현빈, 그리고 예주에게 맞고 있던 젊은 여자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꺼져!"
예주는 닫힌 차창 너머로도 선명히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외치며 노파를 밀쳤다. 현빈은 예주의 옆에 서 있을 뿐 별다른 제스쳐를 취하진 않았지만, 그로서는 유달리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파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아는 사람인가?'
단순 변태나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던 사빈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 위해 창문을 아주 조금 내렸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말소리는 오감이 좋은 사빈이 온전한 내용을 파악하기 충분한 크기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꺼지, 지라고? 이 XX이,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노파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나고 갈라졌으며, 절음도 심했다.
예주는 대답하지 않았고, 노파의 목소리는 이후로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그 내용이 상스럽고 천박하여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서야 노파가 빽 하고 소리 지르듯이 내뱉은 말로 사빈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미민, 민주가 일러줘서 망정이지, 내내내가, 손자 태어난 걸, 돌 지나서야 알아야 해?"
자신의 외할머니였다.
도박중독자에 빚만 십 억이 넘고, 자식과 해가 넘도록 연락이 없으며, 새벽에는 술에 취해있던 그 사람.
'...허.'
더불어 아까 맞고있던 젊은 여자까지도 누구인지 알아냈다.
"얘 이름은 민주가 아니라 민서야. 주는 내가 예주고. 엄마 자식 이름도 제대로 몰라?"
그 사람은 예주와 자매였고, 존댓말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 '얘'라고 칭한다는 건 어리다는 뜻이므로 예주의 친 여동생, 사빈의 이모였던 것이다.
"모모모르긴 뭘 몰, 몰라? 헷, 헷갈린 거지! 민서, 예서!"
"그니까 씨...됐다."
예주는 위와 같은 대화를 몇 번 반복해 본 것인지, 어차피 안 될 것을 왜 하는지 체념한, 그러니까 지금의 모든 것이 귀찮아진 표정으로 혼자 대화를 중단했다. 애초에 저걸 대화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고는 들고있던 파우치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몇 장의 카드나 신분증 같은 것들만 빼고 노파, 사빈의 외할머니에게 그대로 던졌다.
노파는 몇 번 지갑을 놓치면서 튕기다가 5번째 시도에서야 잡았고, 곧바로 그 안에 든 현금을 확인하고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빈은 천 년이 넘게 살며 본 사람들 중, 천박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이후 차 밖에 있던 예주, 현빈, 민서는 어색한 침묵 속에 서 있었다.
"...나도 가볼게."
"가긴 어딜 가. 너도 타."
그렇게 예주는 운전석, 현빈은 조수석, 사빈과 민서는 뒷자리에 앉은 채 차는 출발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나?'
사빈은 힐끔, 옆에 앉은 자신의 이모를 바라보았다. 앳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숙한 것도 아닌, 20대 초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헝클어진 장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 사람은 얼굴이 새빨겠다. 울기도 했고, 눈물을 참고 있기도 했고, 창피한지 귀가 빨갰고, 방금 언니한테 맞기도 했고.
예주도 동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액면가로 보이는 나이 차가 실제 나이 차이와 비슷할 테니, 못해도 네다섯 살 정도는 터울이 있어 보였다.
'나 참, 이럴 때 만큼은 내가 진짜 한 살 난 아기가 아닌 게 아쉽단 말이야. 이 분위기라도 모르면 좋을 것을'
차 안은 날파리 기어다니는 소리도 들릴 듯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어서, 사빈은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 상황이 어색했다.
분명 어제 블루 홀 레스토랑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사빈이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긴 했지만—예주와 현빈은 앞자리에서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몇 시간 뒤에도 볼 수 있을 일상인데 왜 이렇게 그리운지, 사빈은 이 숨 막힐 듯한 분위기에 왜인지 속이 쓰려왔다.
***
그러나 잠시 후, 사빈은 지금의 이 침묵이 그나마 좋았던 것임을 깨닫는다.
"...애초에 엄마나 언니나 나한텐 둘 다 똑같아.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어?"
"너 미쳤냐?"
두 자매의 듣는사람 심장이 대신 터질 것 같은 말싸움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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