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4)

1935년 3월.
베를린 국회의사당.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단상 앞.
“독일은 아주 오랜 시간 고통받아 왔습니다.”
독일 제 3제국의 총통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대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전쟁.
그건 이후에 나올 어떤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는 결코 독일의 잘못으로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고도로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협상국의 야욕, 동맹국 간의 신의로 인해 벌어진 전쟁입니다.”
사라예보에서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에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흩날렸던 시절.
모두가 바랐으나 모두가 바라지 않았던 전쟁.
인간이 참호선 사이 굴러다니는 개뼈다귀만도 못했던 그날의 기억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패배, 패배, 패배, 패배.
좌중이 술렁이는 사이, 그들의 앞에 선 영도자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 전쟁은 우리의 죄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스트리아와의 신의를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협상국은 우리의 죄를 과장해서 떠들어댔고, 저 비열하기 그지없는 17계획으로 독일의 국토를 침범한 것은 나몰라라 하며, 프랑스에서 벌어진 전투는 모두 우리의 범죄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우리의 목에 개목줄을 채웠습니다. 비스마르크 이후로 무궁한 번영과 영광을 이루었던 이 나라의 앞길에 거대한 암초를 던졌습니다. 추한 이기심과 야욕으로, 그저 전쟁에 나가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우리를 깎아내고 수천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총통이 팔을 휘두르자 장내의 모든 인원이 숨을 죽였다.
베르사유 조약.
-전차 보유 금지.
-항공기 보유 제한.
-육군을 10만 명 선으로 감축.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
-오이펜-말메디의 할양, 알자스-로렌의 할양, 단치히 할양 등 수많은 독일의 강역을 내놓을 것.
이 치욕스러운 조약 앞에 분개하지 않은 독일인은 없었다.
어째서 협상국은 우리를 이토록 겁박하는가? 적군을 쏴죽인 것이 죄라면 협상국 또한 죄인이다. 민간인을 약탈한 것이 죄라면 협상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민족자결주의? 오이펜-말메디와 알자스로렌에 사는 독일인들은 독일인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억지투성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개소리.
-라인강 서부에 새로운 공화국을 건국해야 한다.
-라인란트 지방을 프랑스가 점유하여 프랑스의 새로운 영토로서 병합해야 한다.
그 와중에 협상국 간의 회담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라고는 독일 국민 수천만명을 모조리 폭도와 군인 사이 그 어드메즈음으로 만들 법한 개소리들뿐.
상황이 여기까지 오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의 총통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내는 끊임없이 술렁였다. 기자들은 하이에나 같은 태도로 사진을 찍고 영상을 촬영했다. 사람들의 불안과 흥분은 점점 달아올랐고.
마침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총통이, 마침내 선언했다.
“나는 더 이상 베르사유 조약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외국 기자들은 광분하며 날뛰었지만, 의사당에 자리한 대부분의 독일인은 그렇지 않았다.
“지크 하일!!”
“하일! 하일 히틀러!!”
“독일 만세!! 대독일 만세!! 총통 각하 만세!!!”
그들은 환호했다.
독일은 이제, 1차 세계대전의 멍에를 벗어던질 준비가 되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대중들은 하나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독일, 그 무엇보다 독일, 세상 그 무엇보다도!
-방어와 공격을 할 때도 형제처럼 함께 서 있다네
-마스에서 메멜까지, 에치에서 벨트까지!
-독일, 그 무엇보다도 독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의사당을 가득 메우고 울려퍼지는 노랫소리를 듣는 동안, 총통의 입가에는 미소 비슷한 것이 띄워져 있었다.
.
.
.
-독일의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징병제가 도입될 것입니다. 또한 독일의 영공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공군이 창설될 것이며, 이들은 제 3제국의 강역을 보호하는 충실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베르사유 조약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갔던 바로 그 울타리 말입니다.
“말 한 번 잘하는군.”
모리스 가믈랭(Maurice Gustave Gamelin)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히틀러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사유 조약.
프랑스의 장병 수백만 명이 죽어간 대가로 체결한, 너무나 관대했던 종전조약.
독일의 영토도, 인구도, 기술력도, 공업력도, 무엇 하나 제대로 조정하지 못했던 최악의 조약.
오이펜-말메디? 거기 크기가 뭐 얼마나 된다고 독일놈들이 타격을 입겠나. 알자스로렌? 거기는 철광이 많은 곳인데, 철이라면 이미 독일 내에도 충분히 있다. 공업력? 함부르크도, 뮌헨도 뜯어내지 못했는데 공업력이 없어졌겠나. 기술력? 사람을 못 뺏었는데 기술력이 사라졌겠나.
결국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독일은 여전히 강대국이었으며, 이제 그동안 기른 힘으로 그나마 억제기가 되어줬던 베르사유 조약마저 말 그대로 찢어 버리고 있었다.
가믈랭은 자조하듯 웃었다. 포슈 장군이 베르사유 조약을 두고 20년짜리 휴전 조약이라 했었지? 그 말대로라면 4년 뒤에는 전쟁이 일어나겠군.
뭐 당연한 말이지만, 프랑스 의회가 이걸 두고 볼 리는 없었다.
공군 재무장.
징병제 도입.
둘 다 베르사유 조약에 정면으로 중지를 치켜드는 내용이었고, 의회가 군부를 불러 이를 ‘제재’할 방법을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러나.
“군은 독일에게 맞서 승리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요, 가믈랭 원수?!”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희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공황 핑계대면서 군 예산을 구조적으로 감축한 것은 당신들 의원 나리들 아닙니까. 그 때문에 군은 독일에 대한 공격 계획이 없으며 마지노선을 위시한 방어 전략을 채택한 상태입니다.”
베르사유 조약 찢었다고 군대를 보내기에는, 프랑스군은 너무나 약체화되어 있었다.
대공황 기간의 초고열 예산 감축.
거기에 군과 정치권의 대립, 정치권 내부의 분열, 군 내부의 알력다툼까지.
“당장의 군사력으로만 평가하면 승산이 있겠지만, 독일은 우리가 침공하는 즉시 징병을 개시하고 군수공장을 뿜어낼 겁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ㅡ”
“정말입니까?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거국적 노력’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총사령관, 말이 심하지 않소!”
“저는 사실만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경제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이 상태로 군을 출병시키는 것은 프랑스의 경제를 세 보······ 아니, 열 보, 백 보도 넘게 후퇴시킬 겁니다.”
정말 그걸 감수할 용기가 있으십니까?
가믈랭의 비아냥에 의원은 조가비마냥 입을 꽉 다물었다. 당장 군에 들어갈 예산을 늘리자고 주장했다간 자기 목이 파리의 단두대에 내걸릴 꼴이니.
군이 제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게 증명되었으니, 다음 타자가 나설 차례.
“프랑스는 독일을 포위하여 견제하기 위한 대국적 협력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주프랑스 대사가 던진 발언에, 영국과 이탈리아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이제 그 마수를 전세계를 향해 뻗으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 대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하나로 뭉쳐 독일을 견제해야 합니다.”
유럽의 외교관계가 다시금 출렁였다.
이른바 또 다른 협상국의 결성.
당장 독일을 침공하는 게 불가능할지언정,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삼국이 1차대전 때처럼 반독 포위망을 결성한다면 독일 또한 함부로 팽창을 꿈꾸지 않으리라는 발상.
프랑스의 제안은 이 발상의 핵심축이었던 영국과 이탈리아에 가장 먼저 전달되었고, 세 나라의 외교가는 잠시 불타올랐다.
이탈리아 남부 휴양지 스트레사(Stresa)에서 만난 삼국의 총리 중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것은 영국의 램지 맥도널드였다.
“대국적 협력이라면 어느 정도 범위를 생각하시는지?”
“먼저 여기 계신 대영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이 저희 프랑스 공화국과 연합한다면 3자 안보 체제가 되고, 최종적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나 폴란드 등과 연합하여 동서남북으로 독일을 포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말은 거창하군.
정말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몇 년 전에 독일은 이미 폴란드에 유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독-폴 경제전쟁 종결이라는 안건으로.
이미 독일에게 받아먹은 놈들한테 다시 독일을 적대하라고 하면 과연 좋아할까? 당장 경제전쟁이 다시 시작될지도 모르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지만······ 거긴 국경선이 너무 길다. 독일이 침공하면 한 달은 버틸 수 있으려나.
체코슬로바키아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폴란드가 독일과 쎄쎄쎄할 것을 생각하니 ‘아, 이건 안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일단 표정은 관리했다.
다음 타자는 이탈리아였다.
“영국이 동의한다면 우리 이탈리아 또한 반독 포위망 결성에 참가하겠소.”
책임 떠넘기기냐.
맥도널드는 급히 이탈리아 측 인사들의 표정을 확인했지만, 딱히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뭔진 몰라도 이미 외교적 전략이 세워진 상태로 보였다.
그게 대체 무슨 전략일까.
아니, 그건 둘째 치고.
과연 이 조약에 가입하는 것이 영국에 도움이 될까.
그의 머리는 재빠르게 굴러갔지만, 결국 영국이란 나라는 총리 하나의 의지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이른바 스트레사 체제로 기록될 이 회의를 놓고 대독 유화파와 강경파가 맞붙었고, 이미 조약에는 ‘되도록이면 찬성’하는 걸로 결론이 난 상태.
맥도널드는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영국은 이 조약에 동의하겠습니다.”
1935년 3월.
스트레사 체제로 기록될 짧은 질서가 잠시나마 서유럽에 도래했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을 견제할 타이밍이 아니지 않나? 소련이 저토록 강성한데 견제해야 할 대상을 잘못 잡은 것 아닌가?’
‘프랑스 혼자서는 결코 독일과 맞설 수 없다. 독일을 공격해줄 동맹국을 하나라도 더 끌어모아야······.’
‘대독전 포위망에 참가하면 에티오피아와 전쟁할 때 영프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겠지?’
삼국의 생각이 죄다 제각기 따로 노는 시점에서, 이미 파멸은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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