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친이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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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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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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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길은 끝이 없고

DUMMY

역시 수도의 도서관에 딸린 부속 서점이라 규모가 상당했다. 우뚝 솟은 책장 사이를 오가며 그득그득 쌓인 책을 구경했다.


“마나의 변환 과정과 그 효율에 대한 고찰, 몬스터 계통 분류학. 내가 봐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뭐 이렇게 어려운 것밖에 없어?”


가격도 비싸고, 내용은 어렵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한참 보고 있으니, 점원이 다가왔다.


“뭐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혹시 이런 거 말고 어린아이들이 보는 책은 없습니까?”


“얼마나 어린아이 말씀입니까?”


“육칠 세 정도요.”


“아··· 그건 좀.”


점원은 탄식을 내뱉었다. 나도 기대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로스트 파라다이스가 15세 이용가이기 때문.


“그렇다면 조금 어렵더라도 이야기 형식으로 된 책은 없을까요?”


“잠시만요.”


점원은 잠시 사라졌다가 책 몇 권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나마 이것들이 쉬운 책입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이기도 하죠.”


“로스트 파라다이스에서 살아남기, 놓지 마 흑마법, 검술 100일만 하면 데스티니만큼 한다?”


점원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압니다. 제목이 기괴하죠? 모험가분들은 꼭 이런 이름을 지으시더라고요. 어그로가 중요하니 어쩌고 하면서.”


“모험가가 쓴 책이란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어쩐지 데스티니라는 이름이 있더라.


“제목과는 별개로 상당히 깊이가 있는 내용의 책입니다. 모험가분들의 지식을 넓고 얕게 맛볼 수 있는 입문 서적들이죠.”


“주··· 세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급 스킬북 몇 개와 점원이 골라준 책을 전부 샀다. 어쨌거나 신학 총서보다야 쉽지 않겠는가.


혹시나 했지만, 서점에 내가 쓸만한 스킬북은 없었다. 미영이에게 줄 책을 마련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서점 직원에게 타이한 대학으로 가는 길을 물어서 찾아갔다.


대학 교정과 외부의 경계가 없이 잔디와 나무가 우거진 부지에 형식적인 정문이 하나 있었다.


정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니 대운동장이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이 테스트 중이었다.


‘많네.’


얼핏 봐도 수십 명.


오늘로 모집 테스트를 본지 9일째, 이미 수백 명의 사람이 다녀갔을 거다. 그중에 50명을 뽑는 거니까 대충 따져봐도 경쟁률이 십 대 일을 훌쩍 넘는 것이다.


“등록할 겁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뭡니까?”


“교육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보시오.”


운동장 입구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접수 업무를 보고 있던 남자는 피곤하다는 듯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빽빽할 정도로 자세히 향후 일정이 적혀 있었다.


‘테스트 마지막 날 바로 합격자 발표. 선발 기준은 테스트 성적순으로 50명. 수업은 발표 다음 날 바로 시작. 전사부 수업 시간은 아침 아홉 시부터 열두 시, 마법사는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 두번 결석 시 자격 상실.


일주일 수업 후 마지막 시험에 통과하면 아카데미 초급반 졸업. 이후 중급 이상의 과정은 지도교수와 상의할 것.‘


일주일 만에 끝난다면 부담이 없다. 마침 두 계열 간에 수업 시간도 겹치지 않고.


아카데미라고 해서 몇 년씩 하는 거 아닌지 걱정했는데. 스킬을 집중적으로 배울 기회이기도 하니까 지원해 보도록 하자.


“접수해 주시죠.”


“이름과 등급을 적고 지원 분야에 체크하시오.”


종이에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 테스트 접수가 되었다.


“응?”


“뭘 잘못 적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20등급인 데다가 전사, 법사 두 계열 동시 지원?”


“안 됩니까?”


“이런 식으로는 하나도 통과 못 할 텐데? 아카데미 입학 지원은 평생 단 한 번뿐이오. 모험가들이 괜히 50등급을 빠듯하게 맞춰서 오는 게 아니란 말이야.”


“다음 기회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머잖아 하드코어 지역에 갈 확률이 높다. 그러면 50레벨에 맞춰서 여기 온다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 된다.


“선택은 자유지. 정 그렇다면 저기 가서 줄을 서시오. 호명되면 나가서 테스트를 받으면 되오.”


“고맙습니다. 그럼.”



아래로 내려가자, 테스트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장비의 도움 없이 본신의 능력만을 테스트해야 하니 모든 장비를 다 해제하시기를 바랍니다.”


“다 벗으란 말입니까?”


“네. 옷만 남기고 전부. 장신구도 안 됩니다.”


“옷은 남기라고요?”


“그럼 발가벗으시게요? 저기 기자도 와 있는데?”


아카데미 입학 테스트 취재를 왔는지 기자 하나가 영상을 찍고 있었다.


“뭐, 그럼.”


내 경우에 옷을 남기면 장비를 전부 해제한 것이 아니게 된다.


옷에 아무런 기능도 없는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그 두 개가 현재 가장 높은 등급의 방어구니까.


‘잘됐네. 개꿀.’


남자는 장비를 모두 해제한 것으로 모자라 나를 상대로 마법을 걸었다.


“마법을 하나 시전할 겁니다. 해로운 거 아니니까 저항하지 마시고 받아들이세요.”


한참 동안 중얼거린 끝에 남자는 ‘리셋’이라고 짧게 외쳤다. 그러나 내 몸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정직한 분이시네.”


남자는 피곤한 얼굴로 마나 포션을 들이켰다.


“몸에 걸린 각종 이상 효과를 모두 제거하는 마법입니다. 안 걸릴 줄 알고 마법이나 비약으로 능력치 올려서 오는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버프를 제거해 버렸다는 뜻이구나.


“좌절하는 부정 응시자의 표정을 보는 것도 즐겁긴 하지만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하루 종일 마나 포션을 들이키려니 배가 불러서···.”


나는 남자의 푸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시험장으로 내려갔다.




시험은 상당히 원초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로스트 파라다이스의 주요 스탯인 힘, 민첩, 지능, 체력을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단순한 테스트였다. 그러나 단순한 만큼 확실했다.


한참 동안 기다린 끝에 첫 번째 테스트에 불려 나갔다.


“아웃사이더 님, 올라오세요.”


“예.”


“마력 방출할 줄 아시죠?”


“네.”


마력 방출을 하지 못하는 플레이어는 없다.


마력 방출이란, 말하자면 기술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스킬을 시전하기에 앞서 마나는 적절한 형태와 양의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것을 방출함으로써 비로소 구체적 스킬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마력 방출만 하라는 것은 기어를 넣지 않고 공회전으로 배기가스만 뿜으라는 소리다.


“마력 방출로 여기 있는 마법 촛불을 1분 안에 몇 개 끄는지 테스트할 겁니다.”


로브를 걸친 중년의 미부인이 손을 흔들자 나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촛불이 켜졌다. 완벽한 원을 이룬 12개의 촛불은 가볍게 일렁이며 타올랐다.


“한 번에 하나씩만 꺼야 합니다. 동시에 여러 개가 꺼지면 감점이에요.”


‘단순히 마력량만 측정하는 게 아니로군.’


로브 여인의 말에서 나는 힌트를 얻었다.


총량만을 보려면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마력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게 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단순한 곱셈으로 마력량을 추산할 수 있다.


‘한 개씩 하라는 것은 컨트롤, 촛불 개수는 시전 속도와 더불어 마력량까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겠어.’


“준비됐나요?”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가장 부족한 스탯이 있다면 그것은 지능이다. 비약으로 스탯을 몇 단계 올렸지만, 그것만으로는 레벨의 차이를 뒤집기에 부족하다. 레벨 50인 지원자에 비해 30이나 낮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지능만을 올린 마법사 캐릭터의 경우 레벨 50이면 지능 스탯을 200 넘게 찍을 수 있다.


그에 비해 모든 스탯을 골고루 올린 나는 하의에 붙은 지능 추가점을 고려해도 65에 불과하다.


“네.”


그러나, 아무리 마법 위주 캐릭터라 하더라도 장비의 필수 기준을 채우기 위해서는 다른 스탯도 어느 정도 찍어야 한다.


게다가 HP가 너무 낮으면 곤란하니까 체력에는 투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50레벨 마법 캐릭터의 지능 스탯은 실제로는 150에서 160 정도가 최대치일 것이다.


“그럼 시작합니다. 셋, 둘···.”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칭호 ‘특급 배송’으로 인한 마법 시전 속도 20% 증가 효과.


마력 방출 양만 잘 조절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하나!”


신호가 떨어지는 즉시 세심하게 마력을 조절했다. 가장 초급마법인 매직 애로우 정도 되게.


-핏


다음번엔 그 절반.


그러나 촛불은 흔들리기만 할 뿐 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둘 사이 정도 되게 다시 방출.


-핏


이번에는 꺼졌다.


‘됐다.’


거기서부터는 딱 그 정도 마력을 사용해서 무지성 방출하는 데만 집중했다.


돌고, 방출, 돌고, 방출.


한 바퀴 돌자 다시 촛불이 켜졌다.


‘집중하자.’


잡념을 없애자, 시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중간중간 시험관이 촛불을 다시 켜는 동안 잠시 멈춰야 할 정도로 가속이 붙었다.


‘더 빨리!’


어찌나 빨리 돌았는지 1분을 채우기 전에 마력이 부족해졌다.


띄엄띄엄 마력이 회복되길 기다려 하나씩 끄고 있다 보니 시험관이 촛불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만!”


시험관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89개. 마력량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대단한 시전 속도와 컨트롤이군요. 더군다나 등급이 고작 20이라니 마법부에 기대주가 등장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이름이 뭐였죠?”


“아웃사이더입니다.”


“좋아, 기억해 둬야겠어요. 제 이름은···.”


나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시험관님, 잠시만요.”


“응?”


“저쪽에서 저를 부르고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저긴 전사부인데? 마법 지원자 아닌가요?”


“둘 다입니다.”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시험관을 뒤로하고 옆 시험장으로 달려갔다.



“지원자 아웃사이더 여기 있습니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건, 전사부 시험관도 매한가지였다.


“왜 거기서 오나?”


“마력 측정을 하고 왔습니다.”


시험관은 서류를 들추며 내 얼굴을 봤다.


“허허. 나 살다 살다 이런 건방진 핏덩이는 처음 보는군.”


생긴 지 5년밖에 안 된 게임의 NPC에게 핏덩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나야말로 살다 살다다.


“성질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규정이 있으니 테스트는 해주마.”


터질듯한 근육의 남자가 나를 노려봤다.


“자, 쳐봐라.”


“뭘 말입니까?”


“원래는 측정판을 치는 것이지만 네놈은 내 배를 한 대 칠 수 있게 해주마. 내 반탄력을 뚫고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직권으로 더 이상의 테스트 없이 합격시켜 주마.”


“······.”


남자는 배를 탕탕 쳤다.


방어구 따위는 애초에 걸치지도 않았다. 고작 레벨 20짜리 주먹이 아파봐야 얼마나 아플까.


“뭐하나?”


그렇지만 내 4개 스탯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 힘이다.


몸 자체의 힘 35에, 상의 50, 하의 30. 도합 115.


거기에 칭호 효과 ‘분노조절장애’로 공격력 20%가 가산되면 138의 힘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


“스킬 써도 됩니까?”


“······.”


“초급 기술 정권 지르기입니다.”


큰 기술인 줄 알고 쫄았나? 눈썹 꿈틀하는 거 봤는데.


“···하! 얼마든지.”


한 박자 늦었어. 이 근육 쫄보야.


근접 공격 전사라면 힘과 체력에 모두 투자해야 한다. 따라서 제아무리 50레벨을 꽉 채웠다 하더라도 힘으로 130을 찍기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게 누가 옷을 입혀 놓으래?’


스킬의 효과까지 꽉꽉 채워, 50레벨의 맨주먹에서도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힘을 실은 내 왼 주먹이 시험관의 우복부, 그러니까 정확히 간이 위치한 부위에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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