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길은 끝이 없고

“어? 형도 그거 아시는구나.”
“뭐 말이야?”
“그거 요즘 핫한 밈이잖아요. 하지만 그건 약한 자들의 방법!”
“뭐라는 거야. 일단 시간 없으니까 간다. 넌 여기 있다가 내가 성문 열어주면 들어와.”
“네에? 형 혼자 간다고요?!”
“그래. 미안하지만, 성벽 위는 내가 다 해치워야겠다. 너는 그다음이야.”
“아니, 아쉬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시간 없으니까 난 간다. 여기 있다가 문 열리면 들어와.”
나는 곧장 포니투를 소환했다.
유니콘도 자다 일어나면 눈이 붓는 걸까? 포니투의 얼굴은 마치 아침에 일어난 내 모습 같았다.
“자는데 왜 깨우고 그래요···.”
“시끄럽고. 가자!”
나는 포니투에 올라 성벽으로 달려갔다.
“아, 진짜! 준비운동도 안 했는데!”
이건 확실하다. 지능이 있고 말하는 탈 것이 좋은 건 아니다.
‘빠르긴 하네.’
초급 타기 기술인데도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중급 타기 기술 못지않은 빠르기로 전장을 헤치고 가자 성벽은 금방이었다.
“죽겠네! 허리 아프단 말이에요.”
“아, 시끄러워. 엄청 투덜대네. 알았으니까 이제 들어가.”
포니투를 소환 해제하고, 성벽에 달라붙어 반지의 스킬 ‘도약’을 시전했다.
* * *
“형! 형!”
강한은 멍하니 멈춰서 아웃사이더를 태운 유니콘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따라갔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본인이 따라가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일단 사다리도 없이 저 성벽을 어떻게 오른단 말인가?
고민하는 사이 아웃사이더가 성벽에 도착했다.
“어?”
무슨 수를 쓴 건지 포니투를 소환 해제하자마자 그는 성벽 위로 단번에 뛰어올랐다.
“저게 대체 무슨 스킬이야?”
그리고 폭풍이 시작되었다.
멀어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아웃사이더가 지나가는 곳마다 창을 든 병사가 날아올랐다. 이거야말로 무인지경.
마침내 그가 첫 번째 포대에 도착했다.
‘대포는 무슨 스킬로 부수려고?’
강한이 알기로 대포를 파괴하려면 마법사의 강력한 한방 또는 팀원 중 세 명 이상의 집중 공격이 필요하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이 그동안 병사를 막아줘야 함은 물론이다.
-쾅!
“한 방?”
그러나, 아웃사이더는 무기를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간단하게 대포를 파괴했다.
“뭐··· 뭐야.”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레벨을 숨겼나? 하지만 무엇 때문에?
강한이 혼란에 빠진 사이 성벽 위에선 같은 장면이 계속 반복됐다. 모든 것이 한 방.
아웃사이더도 많이 맞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종종 멈춰서서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대략 스무 번 맞을 때마다 웃는데, 대체 이유가 뭐야?’
강한은 문득 어제 일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정말 잘못 걸린 거 아냐? 나쁜 사람은 아닌데 왜 이렇게 오한이 들지?”
포대는 거의 정리됐다. 쉴 새 없이 울리던 경험치 획득 로그가 좀 잠잠해졌다.
비록 막타를 날리지 못했지만, 파티원으로서 나눠 받은 경험치만 해도 엄청난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더 레벨이 높은데, 버스는 내가 탔네.”
성벽이 조용해진 사이 강한은 조심스럽게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콰앙!!!!
자욱한 먼지와 함께 성문이 박살 나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야, 강한아!”
“네, 넵!”
“성 밖에 떨어진 놈들 좀 루팅하고 들어와. 난 입구 좀 마저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형님!”
* * *
“쟤 갑자기 왜 저렇게 공손하냐? 으이그, 하여간 컨셉충. 이번에는 조폭 컨셉인가?”
나는 멀어지는 강한의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뭐 꼭 그렇게 해야 게임이 재미있어진다면 취향은 존중해 줘야지, 어쩌겠어.”
-깡! 깡!
반란군 병사를 몇인가 더 쓰러뜨렸을 때 강한이 돌아왔다.
“제가 싹 다 쓸어왔습니다, 형님! 다 합쳐서 95골드 17실버! 그리고 자잘한 아이템 다섯 개입니다!”
“어··· 그래. 일단 알았다. 계속 가자.”
“알겠슴다, 형님!”
모퉁이를 돌자마자 달려오던 병사와 마주쳤다.
-깡!
”어우 씨, 깜짝이야!”
놀라서 자동으로 방망이가 나갔다. 강한은 저 멀리 날아가 찌그러진 병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뭐해? 가자.”
”코··· 인좌?”
⋮
내 정체를 알게 된 강한은 훨씬 마음이 편해 보였다.
어색한 극존칭을 때려치운 것까진 좋은데 갑자기 우러러보기 시작해서 귀찮아졌다.
“형이 올라가자마자 성벽 아래로 비 오듯이 사람이 후드둑 떨어지잖아요. 전 클리어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첫 만남과는 달리 말도 많아졌다.
“저 형 영상 수십번 봤는데, 왜 시그니쳐 대사 나올 때 바로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멍청하긴.”
“시그니쳐?”
“하지만 그건 약한 자들의 방법!”
기분에 취해 함부로 지껄인 내 죄가 크다.
“대신맨을 혼자 잡았다고 해서 허언증이라도 있는 걸까 고민했지 뭐에요!”
“하아··· 알았는데, 이제 조용히 하자. 보스 방이잖아.”
“어, 그러네요.”
보스는 이 성의 성주.
본신의 무력도 상당하지만 데리고 나오는 부하의 수가 만만치 않다.
병종도 다양하여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보병대가 1페이즈, 성주 아래 대장 격인 기사, 용병대장, 마법사 셋이 2페이즈, 마지막으로 성주를 제압하면 끝이 난다.
-척척척
첫 페이즈인 보병대가 칼같이 발을 맞춰 들어오고 있었다. 통일된 디자인의 방패와 칼로 무장한 밀집대형이었다.
“형, 이제 어쩌죠?”
“뭘 어쩌겠어. 하던 대로 해야지.”
“일단 전투함성부터 할게요.”
“그래.”
강한의 함성이 울려 퍼지자, 공격력과 방어력이 확 늘어났다.
‘10퍼센트 증가였던가?’
함성이 없었어도 워낙 높은 수치여서 상관없겠지만.
“내성에 적의 침투를 허락하다니.”
성주가 나설 것도 없이 보병대를 이끄는 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전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형을 유지한 수십의 보병이 거리를 좁혀왔다.
“적은 소수다! 한시라도 빨리 제압하고···.”
-까라라라라랑!
“혼란을 수습한 뒤 재정비···.”
-까라라라랑! 깡!
“하자···.”
대장의 정해진 대사가 끝나기 전에 병사들은 모두 바닥에 누웠다.
“와··· 이건 진짜···. 무슨 볼링치는 것 같네요.”
나는 입이 떡 벌어진 강한의 옆으로 돌아왔다.
“이게 내 전공이야. 밀집대형. 나는 이런 게 그렇게 좋더라.”
최단 시간에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효율. 어쩌면 나는 군대 체질인지도 모른다.
‘북부 전선 입대도 고려해 봐야 하나?’
“···대단한 전사였군. 하지만 이제 다를 거다.”
보병대를 지휘했던 기사와 더불어 용병대장, 마법사가 동시에 나섰다.
“형, 저는 뭘 할까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보니 민망했는지 강한이 물었다.
”너 맷집 좀 되지?”
“형만큼은 아니겠지만, 제일 많이 찍은 게 체력이긴 해요.”
“그럼 하나 맡아서 버텨봐. 그사이에 내가 정리하고 갈게.”
“그럼, 제가 기사 맡을게요. 탱커는 탱커끼리.”
“그래.”
아무리 일대일이라도 방어력 위주인 상대끼리니까 조금은 버티겠지.
나는 그쪽에 신경을 끄고 용병대장과 마법사를 바라봤다.
‘역시 마법사 먼저 해결해야겠지?’
용병대장은 장검 하나를 들어 나를 노리고 있었다. 공격에 치우친 전형적인 딜러 포지션. 그러나 귀찮기로 치면 마법사가 우선이다.
-캉!
강한은 이미 기사와 무기를 맞부딪혔다. 양손검이 아닌 방패와 검. 일명 방패바바.
그간 쓰던 양손검은 컨셉을 위한 부무장이었던 모양이다.
강한이 어느 정도 버티는 것을 확인하고 마법사에게 접근했다.
“대시.”
불시에 들이닥쳐 한방에 마법사를 정리하려던 계획은 이어진 마법사의 수에 무산되었다.
“블링크! 레비테이션.”
마법사는 용병대장의 뒤로 이동하는 것만으로 모자라는지, 무기가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상공에 떠올랐다.
“하여간 무기나 휘두르는 것들이란.”
마법사의 거만한 눈길이 전장을 훑는 동안 용병대장이 덤벼들었다. 일격에 끝내려는 듯 검에 강렬한 검기가 서렸다.
그러나 나는 그간 잘 쓰지 않던 헬멧의 스킬을 작동했다.
“상향등!”
강렬한 빛이 용병대장과 마법사를 동시에 덮쳤다.
“크악! 내 눈!”
“윽!”
나는 눈을 부여잡은 용병대장부터 깔끔하게 정리했다.
-깡!
손 한 번 못써보고 쓰러진 용병대장을 뒤로 하고 곧바로 대도의 반지 스킬을 시전했다.
“도약!”
마법사는 연신 눈을 껌뻑이며 나를 찾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마법사의 머리 위에 있었다.
“하여간 마법사란 놈들은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
-깡!
마법사는 용병대장의 옆에, 파리채에 맞은 파리처럼 찌그러졌다.
“휴··· 생각보다 시간 걸렸네.”
강한은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지만 아슬아슬해 보였다.
“혀··· 형! 다 끝났으면 좀!”
“어, 그래.”
-깡!
기사의 뒤통수를 한 대 후리는 것으로 2페이즈가 끝났다.
“헉··· 헉···. 죽는 줄 알았어요.”
“너 생각보다 맷집 훨씬 괜찮다?”
“제가 초반에 경매장에서 체력의 비약 사 먹어서 체력을 열 개나 올려서 그럴걸요?”
“얼마인데?”
“하나에 백만원 정도요.”
“오우 씨.”
출처를 의심받지만 않는다면 휴게실에서 빼다가 비약을 팔고 싶다. 백 병만 팔아도 일억이네. 강한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헤비 과금러였다.
“더러운 황제의 주구 같으니!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내 너희만큼은 반드시 갈아 마시고 죽겠다.”
그때까지 잠자코 앉아 있던 반란의 수괴가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전신을 검은색 갑주로 감싼 성주는 일견 보기에도 강해 보였다.
“강한아, 쟤 혹시 뭐 떨어뜨리는지 아냐?”
“세트 아이템인 ‘흑기사의 철옹성’이 유명하죠.”
“뭐로 이뤄진 세트인데?”
“투구, 중갑 상하, 부츠, 허리 플레이트, 건틀릿, 방패, 검이요.”
“여덟 개라···.”
“랜덤으로 하나씩 내놓는 거라. 다 모으려면 수십번 깨야 할거에요. 그리고, 그것보다 귀한 게 극악의 확율로 흑기사의 흑마를 주거든요? 근데 이게 진짜 극악이라 지난 5년간 100마리도 안 나왔대요.”
“······.”
세트 효과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35레벨이라면 50까지는 충분히 쓸 거다.
‘더 이상 상점제로 낙원을 돌아다닐 수는 없지.’
“좋아, 결심했다.”
“뭘요?”
나는 강한을 슬쩍 밀어냈다.
“비켜봐. 시험해 볼 것이 있어.”
⋮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지금 뭐 하는 거냐?”
“무기 바꾸잖아. 신경 쓰지 말고 대사 쳐.”
“그 꼬챙이가 무기라고? 나의 이 ‘철옹성’ 앞에서?”
나는 ‘회초리’를 쌩쌩 소리 나게 흔들었다.
“거 참, 자존감 강한 캐릭터네. 조금만 기다려봐. 몇 대 맞으면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건방진 자. 자초한 화임을 알라.”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성주는 손잡이가 까만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 주변으로 격렬한 기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죽어라!”
성주가 검에 모인 방대한 기운을 일거에 내뿜는 순간.
-찰싹!
손목에 회초리가 살짝 얹어졌다.
때렸다기보다는 건드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미약한 타격이었지만, 막 힘을 쏟으려 하던 성주에게 상태 이상 ‘무력’이 적용되면서 체내의 기혈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크억! 이··· 이게 무슨!”
“야,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빠르게 가자.”
나는 회초리로 나머지 여섯 대를 몰아서 때렸다.
-짜자자자자작!
성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몇 차례 바뀌더니 내 앞에 무릎 꿇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오, 통했다. 일단 좀 벗자.”
“무엇을 말씀인지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싹 다.”
“알겠습니다.”
성주는 경건한 표정으로 자신의 ‘철옹성’을 한 꺼풀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강한은 또다시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 왜 맨날 감탄할 만하면 이러는 거예요···.”
Comment ' 1